달콤한 말씀을 누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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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과는 가장 배우기 어려운 공과이다. 또 이것은 하루 아침에 배워지는 것도 아니다. 실로 많은 나날을 거쳐야만 믿는이들은 자기의 육체가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가장 좋은 것 가운데에도 더러움이 섞여 있음과, 혹은 바울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18절)라고 한 말에 동의하도록 하나님은 그로 로마서 7장의 체험을 많이 갖게 하신다. 이 말하기를 배우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믿는이들은 많은 고통스러운 실패를 거치지 않을 때에 항상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천백번의 실패를 거칠 때에야 비로소 스스로 의롭다 하는 모든 것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육체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렇다고해서 종결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심판은 끊임없이 이어져야만 한다. 언제든지 믿는이들이 자기를 심판하지 않고, 육체를 무용지물로, 가장 형편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조금이라도 자기를 영화롭게 한다면, 하나님은 그의 찌끼를 불태우기 위하여 부득불 그로 불을 통과케 하신다. 스스로 낮추고 자신을 더러운 자로 인정하는 사람은 얼마나 적은지!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결코 그분의 역사를 그치지 않으신다. 육체의 영향력에서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자기를 심판하는 마음도 한 순간도 쉴 수 없다. 그렇지 않을 때 다시 육체의 자랑 안에 떨어지게 된다...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이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우리가 죽음의 단계를 버리고서는 결코 부활의 단계로 들어 갈 수 없다. 부활 생명을 얼마나 체험하는가는 당신이 얼마나 죽음을 체험하는가에 달렸다. 최근에 승천의 생명을 추구하는 믿는이들 중에 육체의 죽음이 제쳐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죽음의 위치를 저버린채 전진한다는 위험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은 육체의 행위를 경시하고 육에 속한 것을 영에 속한 것으로 여기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것은 바로 육체를 영에 속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오, 죽음은 모든 것의 기초이다, 사람은 진보할 수 있어도 이 기초를 잃어버릴 수는 없다. 만일 육체가 죽어야 한다는 이 사실을 견고히 붙잡지 않는다면 부활하고 승천한 생명도 헛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육체가 더 이상 우리를 미혹할 권리가 없을 정도로 신령하고 진보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대적은 우리로 십자가의 경계를 떨쳐 버리고 외형적인 신령함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육에 속한 사람의 많은 말, 즉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 나는 어떠어떠합니다. 더이상 과거와 같이 행하지 않습니다.』라는 말들은 누가복음 18장 11,12절의 기도 소리와 같다. 이들은 육체를 벗었다고 생각할 때에 육체에 의해 속임을 당하게 된다. 우리는 늘 주님의 죽으심 안에 거해야 한다.


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 p.152-153, 159-160,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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