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누림을 함께 나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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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ugene
  • 조회 수 629

우리가 어떤 실행 안에 있지 않다면 우리의 육체는 그렇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는 어떤 성경적이고 시대의 흐름에 부합된 그러한 실행 안에서 가장 강하게 폭로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갈망 - 그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 - 을 몰랐을 때 그의 육체가 그렇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난 이후에는 그의 육체가 가장 강하게 작용된 것과 비슷합니다(창16장).

그 당시 아브라함을 통해 나타난 육체는 죄를 짓는 육체도 아니었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육체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그에게 나타났던 육체는 하나님의 갈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육체였습니다.

이것은 위의 육체의 세 방면 중에서 가장 처리되기 어려운 방면입니다. 우리가 육체에 대해 첫번째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죄를 짓는 육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면은 주님이 마치 세리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가까이 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쉽게 - 그분의 구속에 근거해서 - 그분의 긍휼을 얻을 수 있는 방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두번째 방면은 선을 행하는 육체의 방면입니다. 이것은 마치 반짝이는 구리를 금이 아닌 것으로 인식하는 문제와 같아서 쉽지 않고 처리되기도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방면을 구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진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세번째 육체의 방면은 종교적인 열심을 위한 육체의 방면으로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아 내는 실행의 방면과 아주 흡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옛 사람의 열심이고 다른 하나는 새 사람의 실행일 뿐입니다. 이 둘은 표면적으로는 비슷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종교적이고 옛 사람의 열심이 실행 안에서 어떤 성취를 위해 달음질하게 될 때 - 그것이 주님의 인도라는 명분으로 포장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 그것은 육체의 본성 안에서 실행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것은 그러한 실행과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긍휼과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극한 분노로 반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한 실행이 새 사람이 아닌 옛 사람에 의해 실행되고 있다는 한가지 - 결정적인 -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새 사람의 인격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실행에 그렇게 강하지 않으며 오히려 수동적으로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아5:2).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갈망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렇게 잠잠한(?) 이유는 자신의 옛 사람이 잠들었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행하는 것을 배우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사람의 재촉이나 사람의 강권에 의해서는 움직일 수 없고 움직여지지도 않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의 작은 음성이 있을 때, 주님의 작은 재촉함이 있을 때 그들의 움직임은 누구도 저지할 수 없는 마하나임의 군대와 같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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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ugene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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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상 세 방면으로 구분했는데, 세번째 방면을 두번째 방면에(큰 틀에서) 포함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
2009.11.29. 20:05
Eugene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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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굳이 이렇게(?) 세 방면으로 구분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한가지는 어떤 면에서 종교적인 육체의 방면(가령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으려는 것)은 선의 방면이라고 보기도 그렇고 악의 방면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종교적인 육체의 방면을 좀 더 부각시켜 그것을 빛 가운데 드러냄으로 치료되게 하려는 이유에서입니다. ^^
2009.11.30. 1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