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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 되신 주 예수님 외에 말씀의 사역자에 두 부류가 있음을 보아야 한다. 구약의 말씀의 사역자가 한 부류이고 신약의 말씀의 사역자가 다른 한 부류이다.

 

구약의 사역자는 원칙상 완전히 객관적인 것으로서 그들에게는 주관적인 체험이 거의 없다. 예레미야는 주님 앞에서 주관적인 체험을 많이 가졌고 이사야도 주관적인 체험을 많이 가졌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에게 주관적인 체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들은 그들 개인의 체험일 뿐 말씀의 사역자가 원칙적으로 갖는 체험은 아니다. 구약의 원칙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고 사람은 다만 그의 입에 주신 말씀을 그대로 말해 내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한 쪽에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한 쪽으로 말해내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사울도 선지자 중의 하나였다. 발람도 그러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자와 그리 큰 관계가 없음을 본다. 사람은 수도관같이 한 쪽에서 흘러들어온 물을 다른 쪽으로 흘러보내면 된다. 이런 상황에서 파이프는 파이프이고 물은 물로서 서로 큰 관계가 없다. 이런 말씀의 전달에서는 정확하게 전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묵시는 보호를 받고 그 안에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신약의 사역자는 다르다. 만일 신약의 사역자가 하나님의 목적을 이를 수 있다면 구약의 영광보다 훨씬 뛰어날 것이나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할 때에는 구약의 사역보다 더욱 위험한 것이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먼저 사람에게 말씀을 맡기시고 그것을 사람 속에 두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그의 생각과 느낌과 그의 이해와 기억력을 사용하여 그의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끗하게 전파한다면, 그것은 구약의 사역자보다 몇 배나 더 영광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의 어떠함이 첨가되면서도 전파된 하나님의 말씀이 변하지 않고 손상되지 않은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에게 약간의 어려움과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즉시 손상을 입게 된다.

 

혹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복잡한 방법으로 말씀하시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제거하지 않으시고 왜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을 지으시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만일 이렇게 하면 사람은 범죄의 어려움을 피하게 되고 구속의 번거로움도 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할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답변과 같은 원칙으로 말씀의 사역자에 대한 문제에도 답변하라. 하나님은 그분이 지으신 사람이 선택이 없이 다만 복종하는 기계 같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그분께 온전히 복종하는 기계를 만드시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럴 때 사람에게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하나님에게도 영광이 없게 된다. 그런 복종과 선량함은 아무 가치가 없다. 비록 어떤 잘못이나 죄가 없을지라도, 거기에는 거룩이 없고 피동적인 복종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왼손 오른손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선량함 또는 죄악을 택할 줄 아는 사람을 창조하고자 하셨다. 만일 하나님이 지으신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면, 그가 하나님께 드린 영광은 선택할 줄 모르는 기계의 순종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선 또는 악을 택할 수 있는 자유의 의지를 주셨다. 선 또는 악을 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만일 선을 택한다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일인 것이다. 사람이 악을 택하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겠지만, 선을 택하는 것은 커다란 영광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적으로 순종하는 기계나 선만을 행하는 기계를 만드시지 않고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선 또는 악을 택할 줄 아는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스스로 선을 원하고 순종할 정도로 역사하신다. 이것은 영광스런 일이다.

 

신약의 말씀의 사역에서 하나님은 동일한 원칙을 사용하신다. 어려움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여 말씀하시는 데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다.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실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천사를 사용하여 말씀하실 때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심지어 하나님이 나귀로 말미암아 말씀하시는 것도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보다는 어려움이 적다. 왜냐하면 나귀는 우리같이 복잡하지 않고, 그렇게 많은 생각의 문제나 이해력의 문제나 기억력의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동기의 문제도 없고 영의 문제도 없다. 나귀에게는 문제가 거의 없다.

 

만일 하나님이 말씀을 나귀의 입에 두어 말해내게 한다면 아주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귀를 사용하여 말씀하신 것은 예외적인 일이다. 선지자에게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은 나귀를 사용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나귀더러 선지자가 되라는 뜻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이 선지자가 될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용도를 위하여 특별히 지어졌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분은 순종하는 기계를 원하시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말씀을 전달하는 기계를 얻고자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유 의지가 없는 기계를 원치 않으시고 자유 의지가 있는 사람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사람을 그분의 말씀의 사역자로 택하신 것은 일대 모험 같을 지라도 그분은 이렇게 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사람에게 의탁하여 말해 내게 하셨다. 이 사람은 복잡하고 죄의 문제와 더러움의 문제와 연약함의 문제 등이 많은 사람이다. 이뿐 아니라 겉사람의 문제와 천연적인 사람의 문제와 혈기의 문제들이 있어 하나님을 대적한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사람에게 맡기셨다. 하나님은 극히 큰 어려움 가운데서 극히 큰 영광을 얻고자 하신다. 만일 하나님이 이 지극한 어려움을 뚫으실 수 있다면 그분은 지극히 큰 영광을 얻으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여 말씀하신다. 동시에 사람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파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손상을 입힐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에게 많은 역사를 하셔야 하고 철저한 역사를 하셔야만이 그분의 말씀을 사람에게 의탁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게 하실 수 있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고린도 전서 7장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로 택함받은 바울이라는 사람은 그의 말씀의 사역이 곧 계시일 정도로 완전하고 한 자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는 그의 말씀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틀리지 않았고 한 단어 한 단어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이런 사역을 할 수 있게 되었는가?

 

이는 그가 생각하고 말하고 결정한 것과 그가 가진 의견 등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문제가 없이 다 옳고 정확할 정도로 하나님의 다룸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계 같은 정확함이 아닌 사람의 정확함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 속에 그분의 말씀을 두시고 어떻게 말해 내게 하는지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의 입에 그분의 말씀을 두심은 그분이 한 마디 읽으면 한 마디 반복하는 식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이 한 마디 말할 때 한 마디 반복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 별로 틀린 것이 없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사람 속에 두신다. 사람은 생각을 사용하여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 속에 빛을 넣어주시지만 사람은 생각을 사용하여 그 빛을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은 부담을 사람 속에 넣어 주시지만 사람이 말씀으로 그 부담을 표현해 내야 한다. 사람이 생각하고 찾아내어 말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신다.

 

신약의 말씀의 사역은 하나님이 한 단어 한 단어 사람에게 들려준 것을 사람이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하나님이 사람의 영을 비추사 사람의 영으로 그 말씀에 대해 부담을 갖게 하고, 그 말씀은 사람 속에서 한 순간 비추는 빛과 같기 때문에 사람은 생각을 사용하여 그 빛을 붙잡아야 한다.

 

사람이 생각으로 그 빛을 붙잡지 않을 때 그 빛은 사라지는 것 같다. 당신이 생각으로 빛을 붙잡은 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그 빛을 설명할 수 있는 한두 마디 말씀을 구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생각하고 있을 때 생각나는 말씀이 있다면 그것을 적어내라. 그것에 대해 느낌이 있다면 입으로 말해보라. 만일 어떤 일에 대해 판단이 내려졌다면 그 판단을 말해보라. 만일 당신에게 어떤 의견이 있다면 그 의견을 적어보고 말해보라.

 

당신이 속의 모든 느낌과 모든 판단을 말하고 당신의 모든 의견을 말하면 말할수록, 영 안에서 짐은 점점 가벼워지고 당신의 영 안에 있는 빛과 생각으로 붙잡은 빛도 더욱 해방될 것이다. 이렇게 말할 때 당신 속의 모든 부담이 덜어질 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말을 하고 당신의 사상을 말하며 당신의 느낌과 의견을 말했지만, 그것을 다 마쳤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그분의 말씀으로 인정하실 것이다.

 

이것을 보았는가? 이것은 조항으로 되어 있는 말씀을 외우는 것과 얼마나 다른지! 여기서 말하고 쓰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신이지만, 당신이 하나님의 다룸을 받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셨다. 이것을 말씀의 사역이라고 한다. 본래 당신 속에는 빛과 부담이 있고 당신의 의견과 주장과 느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에게 그런 느낌이 있고 그런 의견과 그런 생각과 판단이 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이 그런 뜻을 표현할 수 있도록 몇 단어나 몇 마디 말씀을 당신에게 주실 것이다. 당신이 말하고 있지만 그 말한 것을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으로 인정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높이 올리워져야만이 말씀의 사역자가 될 수 있다. 당신의 생각이나 감정에 문제가 있다면 결코 말씀의 사역자가 될 수 없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다룸을 받지 않은 사람으로서 믿을 만하지 못한 당신의 의견을 하나님의 말씀에 집어넣는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그분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떤 형제가 한 말에 문제가 있고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그 사람 자신의 말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빛을 주시고 부담을 주시며 어떤 뜻을 주실 뿐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금 그분의 말씀을 생각해내고 그것을 느끼며 그 말씀에 대해 어떤 의견과 주장을 갖게 하실 정도로 그분의 사역자를 신뢰하신다. 비록 그 의견과 주장이 당신 자신의 의견과 주장일지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사역자를 신뢰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하신다. 하나님은 의견과 사상과 느낌과 관점에 있어서 당신이 그분 자신을 닮을 정도로 당신에게 역사하신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하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하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단계에 이를 수 있다면, 당신이 말할 때 하나님의 영이 당신 위에 있게 되고 한편으로 당신이 말하면 하나님의 영은 당신의 말을 입고 나갈 것이며, 당신이 한 마디를 할 때 그분은 한 마디를 내보내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약의 선지자의 예언이요 신약의 말씀의 사역이다.


 

우리는 고린도 전서 7장에서의 바울의 상태를 보기로 하자. 6절 :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여기의 「권도」는 「찬성」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바울의 뜻은 내가 이것을 찬성하는 것이지 명령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바울 자신 안에서 일어난 내적 반응이었다. 바울은 속으로 어떤 일에 찬성했을 뿐 그 일을 명령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런 내적인 역사가 얼마나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얼마나 분명한지를 보아야 한다. 그는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임을 알았을 뿐 아니라, 이것은 나의 명령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뜻에 찬성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분명했다. 40절에서 우리는 이것이 성령의 말씀하심이요, 성령이 바울의 찬성에 동의한 것을 볼 수 있다. 거기서 바울이 그 일을 좋게 느꼈지만 결과적으로는 성령이 그 일을 좋게 느낀 것이 되었다. 하나님은 바울의 섬세한 느낌을 사용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말하고 주 예수님이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시는 것도 엄중한 일이다. 가령 어떤 문제가 발생하여 어려움이 많은 형제들이 당신을 찾아왔을 때 그 중 젊은 한 형제에게, 『자네가 그에게 가서 말하게.』라고 말했는데 그가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면, 그 젊은 형제에게 있는 위임은 큰 것이고 문제를 일으켰을 때 그것은 엄청난 것이다. 만일 그에게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쓰실 수 없다.

 

오늘날 신약의 말씀의 사역자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한 단어 한 단어 할 말을 정해 주고 그것들을 외우라고 하시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편의 문장을 외우라고 하셨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한 마디를 하시면 한 마디를 말하고, 한 단어를 말하시면 그것을 전달하고, 한 편에 육백 글자가 적혀 있다면 그 단어들을 다 외우기만 하면 책임은 끝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만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전달하기를 원치 않으시고 그분의 말씀을 생수와같이 속으로 들이마시고 다시 그것을 흘러나가게 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빛과 부담을 주시고 몇 마디 분명한 말씀을 주시어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말해내게 하신다. 이럴 때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을 쓰실 수 있고, 쓰실 수 없는 사람은 쓰실 수 없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세상으로 당신을 보내어 당신 임의대로 말하게 두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말씀의 사역자의 책임은 정말 가볍지 않다. 일어나 하나님을 위해 말하는 사람은 그 속의 느낌과 사상과 의견에 근거하여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고 주장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그의 책임은 가볍지 않다. 나의 느낌이 잘못되었을 때 나의 말도 잘못되고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을 때 나의 말도 잘못된다. 나의 주장이 잘못되었을 때 나의 말도 잘못된다. 나의 의견이 잘못되었을 때 나의 말도 잘못된다. 만일 나의 생각이 믿을만하지 못하고 나의 느낌과 의견과 판단이 믿을 만하지 못하며 나의 마음과 영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면, 내가 한 말도 믿을 만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사람이라면 말씀의 사역자가 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여기에 하나의 기본적인 문제가 있다. 즉 우리가 섬세한 느낌을 갖고 우리의 느낌이 하나님의 느낌을 대표할 수 있고, 그 느낌이 독립적 곧 우리의 것이자 부속적, 곧 하나님께 속한 것이 되도록 우리가 그분께 인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7장에서의 바울의 말은 정말 보통 말씀이 아니다.

 

고린도 전서 7장 7절에서 바울은, 『나는... 원하노라』고 말한다. 이 용어는 같은 장 32절에서도 사용되었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원하는 어떤 느낌을 볼 수 있다. 그는 그들이 자기와 같기를 원했다. 40절에서 우리는 이것이 성령의 원하심임을 볼 수 있다. 바울의 원함이 하나님의 원함이 되었다. 바울이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바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바울 속에 있는 그 「원함」은 얼마나 신중한지!

 

만일 바울의 원함이 틀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일 이 「원함」이 잘못되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히 혼란된다. 바울의 이 「원함」은 그의 영 안의 매우 섬세한 느낌이다. 만일 「원함」과 「원치 않음」 사이에 문제가 있고 바람과 바라지 않음 사이에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울의 섬세한 느낌을 지배한 분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가 느끼는 것이 바로 성령의 원하는 바였던 것이다.

 

여기에 주님께 쓰임을 받은 한 사람이 있다. 주님은 그의 느낌을 믿을 수 있다. 형제들이여, 주님이 당신의 느낌을 쓰실 수 있는가? 주님이 당신을 신뢰할 수 있는가? 우리는 참으로 주님에 의해 파쇄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의 느낌을 쓰시지 못한다. 바울의 느낌은 하나님이 능히 쓰실 만하고 신뢰하며 믿을 만한 느낌이었고 정확한 느낌이었다.

 

12절에서 바울은,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남은 사람들에 대해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분명히 느끼면서도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끝에서 그는 그도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놀라운 것이다. 바울은 이런 단계에 이르기까지 높여졌다.

 

25절에서 바울은 주님 앞에서의 자신의 상태를 다음과같이 분명히 말했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는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여기에 거듭 주님의 긍휼하심을 받아 범사에 충성된 자가 되기까지 수년 동안 그분을 따랐던 한 사람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청지기요 그리스도의 사역자이며 하나님의 비밀의 청지기이다. 청지기에게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은 충성이다. 그는 무엇에 충성하였는가? 그의 사역에 충성을 다했다. 그는 하나님의 비밀의 청지기요 그리스도의 말씀의 사역자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비밀을 그의 손에 맡기고 그분의 말씀을 그의 손에 맡기셨다. 말씀의 사역자에게 강조될 점은 바로 충성이다.

 

그가 이 말을 한 의미는 이렇다. 『주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충성된 자가 되어 오늘 내 의견을 말하겠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 아닌 내 원함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아 그분의 말씀을 맡은 사역자가 되어 내게 어떤 명령이 주어지지 않아서 그것에 대해 감히 무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수차 하나님의 비밀을 맡았고 하나님의 비밀을 서술하였기 때문에 그 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내 의견을 말하겠다. 내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수차 영적인 일을 접했고 그런 부류의 일을 다루어 왔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조금 배웠고 계속 배워 왔기 때문에 비록 내게 주님의 명령이 없지만 수년 동안 내가 보고 배운 것을 너희에게 말하겠다. 나는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지만 오늘 내 의견을 너희에게 말하겠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그의 의견을 인정하신 것이다. 오, 하나님은 바울의 의견을 그분의 의견으로 인정하셨다. 이것은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지! 하나님을 찬미하자! 사람의 의견이 주님께 인정될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긍휼하심을 입어 충성된 한 사람이 여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우리 안에서 조각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단지 사람 안에 거할 뿐 아니라 사람 속에서 조각하고 조성한다는 것을 안다. 사람 몸에 조성된 성령의 역사는 누구도 제거하지 못한다. 성령이 사람 속에 거하여 사람과 하나로 연합된 동시에 계속 사람을 조각하고 계신다.

 

당신은 주님의 영이 사람 속에 거함이 손님으로 십 년, 이십 년 간 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사람은 한 채의 집 같아서 손님이 가버리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성령은 사람 속에서 조각하시고 온전케 하시며 조성하신다. 성령은 조금씩 주님의 성품을 당신 안에 세우신다.

 

어떤 사람이 한 동안 살던 집은 그 사람의 어떠함을 나타내게 된다. 우리는 사람에게 주어진 은사는 사람 속을 변화시킬 수 없으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할 때 사람은 하늘에 속한 성품을 나타낸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람에게서 산출된 성령의 열매는 사람의 성품상의 변화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세우신 성품이다.

 

성령이 당신의 생각 속에서 역사하여 당신의 생각에 변화를 가져오고 당신의 감정 안에서 역사할 때 당신의 감정이 변화된다. 또 성령이 당신의 의견 안에서 역사할 때 당신의 의견도 변화되게 된다. 성령이 당신의 판단 안에 역사할 때 당신의 판단도 변화받게 된다. 성령은 당신의 성품의 변화를 위하여 당신 안에서 역사하시어 조성하는 역사를 이루신다.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인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은 그를 통해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성격을 사용하셨다. 삼일의 성령의 열매는 사람 안에 있는 성령이 사람의 성격으로부터 만들어낸 것이다. 성령이 사람 속에서 날마다 역사하고 조각하시며 날마다 사람을 다루실 때 자연히 어떤 성격이 자라나게 된다. 이 성격은 사람의 성격이지만 또한 사람 속에서 성령이 조성하신 것이다. 이 성격은 완전히 사람에게 속한 것이지만 성령이 낳은 것이요 사람 속에서 성령이 역사하심으로써 산출된 결과이다. 성령이 사람 속에서 역사하실 때 그 사람은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게 된다.

 

우리는 변화도 성경의 기본적인 교리이자 기본적인 체험임을 보아야 한다. 빌립보서 3장이 기본적인 체험 중의 하나이고 고린도 후서도 기본적인 체험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육체가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주시고 우리 성품 안에서 어떤 것을 만드실 것을 믿는다.

 

주님의 영은 사람이 집에 거하는 것같이 우리 안에 거하시지 않고 우리의 생명으로 거하신다. 주님이 그의 안에 십 년, 이십 년 동안 생명으로 거하셨는데도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주님의 영은 당신 안에서 당신의 생명이 되시기 때문에 당신의 생각이 변화되고 당신의 감정과 판단과 의견, 당신의 마음과 영이 변화될 것이다.

 

본래 당신 속에는 육체가 충만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십자가로 말미암아 당신의 육체가 처리되고 당신의 육체가 정복될 것이다. 당신의 감정과 생각과 판단, 당신의 마음과 영 안에 새로운 조성이 있고 과실이 맺힐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조성이란 무엇인가? 성령의 조성은 곧 하나님이 사람 속으로 건축되고 조성된 없어지지 않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의 주님의 역사가 견고한 결실을 가지며 그 열매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거듭 주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주님의 역사로 충성된 자가 되었다. 충성은 그의 사역을 가리켜 말한다. 그는 내게 주의 명령은 없으나 내 의견을 너희에게 말한다고 했다. 그의 의견에는 성령의 조성이 있다. 바울의 말은 보통 묵시가 아닌 그의 안에 조성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조성된 말씀은 묵시의 말씀이 되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사람이 성령의 묵시 아래 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아는 반면에 또한 말하는 이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임을 느끼게 되고 자신에게 어떤 의견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성령의 조성이 그의 안에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가 한 말은 성령의 말씀이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의 조성하심이다. 우리의 의견과 말과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하나님과 상반되지 않도록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조각하심이 필요하고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가 될 수 있다.

 

각사람 속에서 성령이 조성한 성품은 다 같은 모양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메시지에는 바울의 특색이 있고 베드로가 전한 메시지에도 베드로의 특색이 있다. 베드로의 서신은 체제에 있어서 바울 서신과 다르고 요한이 쓴 것은 다른 사람이 쓴 것과 다르다. 각 사람에게 각기 다른 체제가 있다. 체제는 완전히 개인에 속한 것이다.

 

성령의 조성이 있는 사람은 그의 체제까지도 성령에게 쓰임을 받는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만일 성경 육십 육 권이 다 같은 체제의 말씀이라면 성경은 죽은 책이라는 인상을 줄 것이다. 오늘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에게 나타날 때 사람마다 각기 다른 체제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이 사람 속에서 조성한 결과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말하나 다 성령의 말씀하심인 것이다. 성령의 통제하에 순복하는 사람은 자신의 특색이 나타나도 된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 중 많은 풀이 있지만 같은 뿌리를 가진 것이 하나도 없고, 많은 나무가 있지만 완전히 같은 모양을 가진 두 나무도 없다. 많은 사람이 있지만 완전히 똑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은 없다. 이 별의 영광과 저 별의 영광은 같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 속에 있는 성령의 조성하심과 내 속에 있는 성령의 조성하심은 다른 것이다. 바울도 성령의 사랑으로 충만하였고 요한도 성령의 사랑으로 충만하였다. 그러나 공과를 배운 사람은 누구나 바울에게 있는 성령의 사랑과 요한에게 있는 성령의 사랑이 다르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들에게서 성령의 사랑이 나타날 때 특징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획일적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들 각사람에게 자신의 특징이 있다. 또한 각각 성령의 조성하심이 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우리가 고린도 전서 7장에 따라 행할 수 있다고 결코 잘못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전성경에서 오직 고린도 전서 7장 만이 그렇게 말했다. 고린도 전서 7장은 가장 높은 사례이다. 주님이 말씀하시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말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고린도 전서 7장은 우리에게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줌으로써 에베소서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골로새서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고전도 전서 7장은 바울이라는 사람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줌으로써 에베소서 뒤에 있는 바울이 어떤 바울이고 갈라디아서 뒤에 있는 바울이 어떤 바울이며 골로새서와 복음에 대해 분명하게 쓴 로마서 뒤에 있는 바울이 어떤 바울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고린도 전서 7장의 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믿으실 만한 감정을 갖고 하나님이 신뢰하실 만한 생각을 가지며 하나님이 믿으실 만한 의견과 하나님이 믿으실 만한 말을 가진 한 사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사람에게 위탁해도 그 말씀은 아무 손상을 입지 않고 도리어 최고의 계시가 된다. 만일 고린도 전서 7장이 없다면 우리는 성령이 바울을 통하여 하신 역사만 볼 수 있을 뿐 성령이 바울 안에서 무엇을 역사했는지를 알 수 없다. 고린도 전서 7장은 이 사람의 느낌이 믿을 만하고 이 사람의 생각과 말도 믿을만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위에 임할 때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위에 임하지 않을 때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만일 우리가 믿을 만하지 않다면 설령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한다 할지라도 문제가 된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은 계시를 위탁하실 수 없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 자체가 믿을 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빛을 그에게 위탁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가 말씀의 사역자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그 사람의 사상이 믿을 만하지 못하고 그 사람의 의견과 그 사람의 말이 믿을 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어떠함에 따라 어떤 계시가 나온다. 만일 다른 서신만 있고 고린도 전서 7장이 없다면, 우리는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이 사람이 믿을 만하기 때문에 계시가 그에게 손상을 입지 않고, 바울의 말하는 체계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온전케 할 정도로 영광스럽고, 바울의 개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영화롭게 할 정도로 영광스러우며, 바울이 구두로 한 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풍성하게 할 정도로 영광스럽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되 사람의 속한 것을 첨가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에 손상을 주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영화롭게 하고 더욱 풍성하고 온전케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고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 해방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 말씀의 필요보다 더 큰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가 걸어야 할 어떤 길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기 바란다. 우리의 섬세한 감정이 다 믿을 만하고 우리의 그런 감정이 나타날 때 그것이 주님의 느낌이 되고, 우리 속에 어떤 취향이 있을 때 그 취향이 우리 안에서 성령이 역사한 결과가 될 수 있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을 주시고 더 깊고 강한 다룸을 주시며 우리를 엄하고 철저하게 깎아내는 역사를 하시도록 그분께 간구해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서 흘러나간 사랑과 인내일지라도 그 사랑과 인내는 성령이 맺은 열매이어야 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렇게 깊고 철저한 역사를 많이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열매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이런 열매들은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다. 성령이 우리를 재조성하여 그런 사람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열매 맺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형제들이여, 하나님이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당신 위에 역사하시고 당신 속에 성령을 조성하셨다면, 당신은 당신의 느낌이 성령의 느낌이고 당신의 생각이 성령의 생각이며 당신의 의견이 성령의 의견인 것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당신에게 맡기사 당신에게 말하라고 하실 때, 당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보게 하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큰 영광을 얻으시게 할 것이다.

 

오늘 기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주님이 신뢰하실 만한 사람인가에 있다. 우리는 문제가 하나님의 말씀에 있지 않고 사역자에게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사역자가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도 없다. 오늘날 하나님은 전과같이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결코 선지자의 직분을 교회 중에서 제하실 뜻이 없다.

 

그러나 오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사역자가 적은 데 있다. 교회 안에 사역이 있는가의 여부와, 더 많은 사역이 있을 수 있는가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교회가 빈곤하고 어두움 안에 있는 원인은 우리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임을 보기 바란다. 우리는 엄숙히 주님께 말하자 『주여, 당신의 말씀이 나를 통해 흘러나도록 나를 깨뜨리소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워치만 니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 "말씀의 사역의 최고봉",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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