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말씀을 누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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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우리가 주님을 향해 사랑하는 갈망을 가진 뒤에는 그분을 접촉하고 그분을 만지고 그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영을 사용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를 주님에 대한 누림으로 이끈다. 이같이 우리에게는 두 기관―즉 사랑하는 마음과 받아들이 영―이 필요하다. 받아들이는 영은 기독교에서 크게 무시되어 왔다. 어떤 곳에서는 메시지들이 사람들의 사랑하는 마음을 일어나게 자극하지만, 그들의 영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주님을 찬양하자! 그분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새 마음 뿐 아니라 새 영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비단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 뿐 아니라 그분을 접촉하고 누리기 위한 영도 가졌다. 이것은 놀랍다! 우리의 새 마음은 주님을 향해서 매우 부드럽다. 그것은 완고하거나 굳거나 강한 마음이 아니고, 주님을 향해 고기같이 부드러운 마음이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어떤 뉘우침의 느낌도 없이 많은 죄악들을 행할 수 있었다. 우리 마음이 완고하고 강퍅했기 때문에 죄에 대해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 우리 마음은 주님에 의해 바뀌어졌다. 이제 우리는 부드러운 마음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때때로 우리는 겨우 한 마디 했을 뿐인데도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느낀다. 그럴 때 우리는 나머지 말을 멈추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마도 그 첫부분의 말에 대해 심지어 사과하기까지 할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사소한 실수나 경미한 동기상의 불순함까지도 느끼는데, 이는 우리의 마음이 부드럽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로 회심했고, 소생되었고, 돌이켰다는 것을 입증한다. 우리의 마음은 부드럽고 민감하다.


더 나아가 우리는 모두 어떻게 우리의 영을 사용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 모두에게는 사랑하는 마음과 받아들이는 영 둘 다 필요하다. 비록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도 사람의 영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은 죽어 있고 기능이 없었다. 에베소서 2장 5절은 우리가 허물과 죄들 안에서 죽어 있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가 우리의 영 안에서 죽어 있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몸이나 혼 안에서 죽었던 것이 아니고 우리 영 안에서 죽어 있었다.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주 예수님은 우리 영을 소생시키시고 살아나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 있고 새롭게 된 영을 갖고 있다... 사탄은 간교하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이 영의 문제를 잘라내었고 숨겨 왔다. 그들은 성경을 읽지만, 그들의 영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생각을 사용함으로써 말씀을 읽는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기도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마치 운동 선수가 몸을 훈련해야 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의 영을 훈련해야 한다. 우리의 영을 무시하도록 배워온 것은 가련한 일이다. 우리의 생각을 주의하도록 배웠지, 우리의 영을 주의하라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근본주의적인 가르침이나 오순절적인 은사에 주의하는 것은 비극이다! 역사에 의하면, 가르침이나 은사는 교회를 건축하는 데 효과가 없었다. 이것은 가르침과 은사가 절대로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주된 것은 우리의 영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효력 있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
[에스겔의 이상, p.148-150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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