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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의 느낌과 영을 인식함」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영과 혼의 차이를 볼 것이다.
Ⅰ. 영과 혼의 분리
심리학자들은 사람을 분석하여 형이상학적인 부분과 형이하학적인 부분의 두 부분으로 나눈다. 형이하학적인 부분은 육체를 의미하며, 형이상학적인 부분은 정신을 의미하는데 이는 성경에서 말한 혼이다. 그들은 사람의 몸 안에 정신, 즉 혼만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 안에 혼 외에 영이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은 「혼」만을 말하지 않고 「영과 혼」을 말한다. 영과 혼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2절은 혼과 영을 나누는 것에 대해 말한다.
생명 안에서 참된 영적 성장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영과 혼이 서로 다른 두 가지 것임을 알아야 하며, 영이 무엇이고 혼이 무엇이며, 무엇이 영적이고 무엇이 혼적인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영과 혼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어야 혼을 부인하고 혼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 앞에 영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다.
A. 혼 대(對) 영
고린도 전서 2장 14절과 15절은 두 부류의 사람에 대해 말한다. 한 부류는 혼적인 사람(「육에 속한 사람」에 대한 원문은 「혼적인 사람」이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영적인 사람이다. 이것은 사람이 혼과 영, 다른 이 두 가지 중 하나로 말미암아 살고 또 그것에 속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사람은 혼으로 말미암아 살고 혼에 속하여 혼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영으로 말미암아 살고 영에 속하여 영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분별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혼적인 사람은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고 알 수조차 없다. 이것은 혼이 영과 대비됨을 분명히 보여 준다. 영은 하나님과 통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분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은 혼과는 조화되지 않으며 적절하지 않다. 영은 하나님의 것들을 좋아하고 수용하기를 기뻐하지만 혼은 그렇지 않다. 혼은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어리석게 여긴다.
성경 안에는 육신이 영에 반대됨을 보여 주는 로마서 8장뿐 아니라 혼이 영과 반대됨을 보여 주는 고린도 전서 2장도 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하고 영에 속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혼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은 혼에 속하고 영에 속하지 않는다. 로마서 8장은 육신에 관해 말하면서 죄와의 관계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죄짓는 사람은 다 육신에 속한다. 그러나 혼은 반드시 직접적으로 죄와 관계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죄를 짓지 않고 육신에 속하지 않는(사람이 볼 때) 사람도 여전히 혼적이고 영적이지 않을 수 있다.(엄격하게 말해서 사람의 혼은 육신 아래 타락하였으므로 사람은 혼적일 때 또한 육신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가 혼 그 자체를 말할 때 혼의 존재와 육신의 존재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죄에서 해방되어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육신에 속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영적이고 혼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 그것은 반드시 우리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이해하거나 하나님에 속한 것들의 뜻을 파악하고 좋아하고 받아들일 수 있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고 육신 안에서 날뛰는 것만 멈춘다면 우리가 영적일 수 있고 하나님과 통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비록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고 더이상 육신 안에서 날뛰는 것 같지 않다 할지라도 여전히 혼으로 말미암아 살고 영으로 살지 않을 수 있다.
주님의 구원은 우리를 죄와 육신에서 구해 내실 뿐 아니라 혼에서도 구해 내신다. 주님의 구원의 목적은 우리가 죄나 육신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혼 아닌 영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구원은 우리를 도덕적인 사람이 되도록 도덕성의 정도에서 구원하실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를 영적인 사람이 되도록 영성(spirituality)의 정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훌륭한 도덕성을 지닌 사람이 반드시 영적인 사람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혼적인 사람으로서 혼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형제나 자매는 매우 도덕적이고 선함에도 불구하고 혼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고 혼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속한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깨달음이 없고 그러한 것들을 갈망하거나 소중히 여기지도 않으며 심지어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B.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 혼의 무력함
고린도 전서 2장 14절은, 『혼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에 대한 혼의 상태에 관하여 분명하고도 충분히 말해 준다. 혼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받지 않고』, 『깨닫지도 못한다』.
혼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원하지 않을 뿐더러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혼이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고 싶어할지라도 그것들을 깨닫거나 이해할 수 없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혼의 본성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과 조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혼은 하나님에 속한 것들을 원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더우기 혼에는 하나님의 것들을 깨닫는 능력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혼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도, 관심도, 소망도 없을 뿐더러 그런 것들을 찾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이해조차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를 혼으로 말미암아 살지 않도록 혼에서 구출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도록 하실 수 있다.
우리는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의 혼의 무력함에 관하여 분명해져야 하며 그것을 중요한 문제로 여겨야 한다. 혼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받지 않으며 깨닫지도 못한다. 혼으로 말미암아 사는 어떤 형제나 자매는 매우 선하고 잘 처신하며 미덕이 있지만 영적인 것들을 알지 못하며 영적인 것들을 갈망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러한 많은 형제 자매들을 만나 왔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에 매우 조심하므로 그들의 행동에 흠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벽처럼 막혀 있고 그것들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의 도덕성이나 선악이나 옳고 그름의 표준대로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며, 모든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의식과 통찰력이 부족하다. 그들은 그들의 생각 안에서 영리하고 그들의 지식 안에서는 강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영 안에 빛 비춤이 없으며 영의 느낌이 무감각하다. 그들을 선한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나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행위에 관한 한 그들은 정말 선하다. 그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고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안다. 그들은 영리하고 빈틈이 없으며 부지런하고 철저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접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마치 그들은 나무나 돌이 된 것처럼 아무 느낌도 이해하는 능력도 없다. 게다가 종종 영적인 것들을 향한 그들의 마음은 냉랭하다. 그들은 이해하는 데에서도 느릴 뿐 아니라 추구하는 데에서도 또한 게으르다.
그러므로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인 것은 아니다.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행위에 있어서 그저 단순히 선하지는 않다. 그들은 영의 느낌을 가지며, 영적인 것들을 이해하며, 내적으로 하나님의 방법을 알며,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 노련함을 가지며, 영 안에서 산다. 선함과 영적인 것은 매우 다르다. 많은 형제 자매들이 선하지만 영적이지 않다. 그들은 선하지만 영 안에서 살지 않는다. 여러분은 그들에게서 선함은 대하지만 영은 대하지 못한다. 여러분은 그들에게 사람의 미덕은 보지만 하나님의 향기는 맡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 말하자면 그들이 육신 안에 있는 것 같지 않지만 그들은 확실히 혼 안에 있다. 비록 그들은 육신을 방종하게 하지는 않지만 영 안에 살지도 않는다. 그들은 죄 짓는 일들을 승인하지는 않지만 영적인 것들을 갈망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육신을 좇아 죄를 짓지는 않지만 자아, 즉 혼으로 말미암아 산다. 혼이 그들의 생명의 근원이며 그들의 생활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들은 혼 안에서 혼으로 말미암아 살기 때문에 혼적인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인 것들을 원하지 않으며 그러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C. 혼의 내용
혼은 우리의 개인적인 인격, 우리의 자아이다. 그러므로 혼은 우리 자신이다. 분석적으로 말하자면 혼 안에 포함된 것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세 부분이다. 생각은 사람의 사고하는 기관이다. 이것은 우리가 대개 두뇌라고 말하는 것이다.(생리학상으로는 두뇌이고 심리학상으로는 생각이다.) 그것은 혼의 주요한 부분이다. 사람이 사고하고 묵상하고 고려하고 기억하는 것은 모두 혼 안에 있는 생각의 기능이다.
타락 후의 사람, 특히 오늘날의 사람은 대부분 생각 안에서 살고 생각의 사고의 지시를 받는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한다. 사람의 행동은 항상 사람의 사고에 묶인다. 사고 안에 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것이 사람이든 어떤 사물이든간에 우리가 사람의 생각을 얻으려면 사람의 사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오늘날 대단히 많은 이론들과 학교들과 교육 체계가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사람의 생각을 얻기 위해 사람의 사고를 다루는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만일 당신이 그의 사고로 인해 어떤 사람의 생각을 얻을 수 있다면 당신은 그를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생각, 즉 두뇌 안에 살고 생각의 사고의 지시를 받기 때문이다.
혼 안에 있는 감정은 사람이 사랑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기관이다. 사람이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흥분하거나 침체하는 것은 다 사람의 혼 안에 있는 감정의 기능이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에 약하다. 그들은 감정이 풍부하고 매우 쉽게 흥분한다. 그들은 종종 문제들을 그들의 감정으로 처리한다. 그러한 사람을 사고로 설득하면 통과하기가 어렵지만 그들의 감정은 매우 쉽게 움직여질 수 있다. 그들은 당신의 생각으로는 쉽게 설득되지 않지만 감정으로는 쉽게 움직여진다.
혼 안에 있는 의지는 사람이 결정을 내리는 기관이다. 사람이 결정하고 결심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받아들이고 거절하는 것은 모두 사람의 혼 안에 있는 의지의 기능이다. 어떤 사람은 생각 안에 있고, 어떤 사람은 감정 안에 있고, 어떤 사람은 의지 안에 있다. 생각이나 감정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이나 감정으로 살듯이 의지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의지로 산다. 생각이나 감정이 그 사람들의 가장 강한 부분이듯이 의지도 그러하다. 의지 안에 있는 사람은 확실히 그의 결정에 있어서 강하다. 일단 그가 어떤 행동의 과정에 관해 결심했다면, 결코 그를 변경시킬 수 없다. 당신이 그를 설득하더라도 그는 이유를 주의하지 않는다. 당신이 감정으로 그에게 호소하더라도 그는 결코 감정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의지로 말미암아 행동하는, 의지 안에 있는 사람이다.
혼 안에 있는 것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세 부분이다. 이 세 부분은 모든 사람 안에서 저절로 표현된다. 모든 사람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더러는 생각 안에 더 많이 있고, 더러는 감정이 더 풍부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의지에 있어서 더 강하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 아주 총명하다. 감정으로 그들을 움직이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을 얻으려면 당신은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 그들은 생각, 혹은 두뇌 안에 살고 있는 지적(知的)인 사람들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특히 감정에 있어서 풍부하다. 그들은 마치 두뇌도 없고 생각도 없고 감정만을 소유한 것 같다. 그러한 사람들은 종종 그들의 감정으로 인해 일을 그르친다. 당신이 그들을 설득해 보면 그들은 주의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않으며 그들의 마음이 감동되지도 않는다. 만일 당신이 그들을 감정으로 다룬다면 그들의 내부를 만지기는 매우 쉽다. 수천 혹은 수만의 이유들도 그들에게는 한두 방울의 눈물보다 효력이 없다. 때때로 당신이 아무리 그들을 설득해도 그들을 납득시키지 못하지만 당신이 단지 약간의 눈물을 흘리기만 하면 그들을 설득할 수 있다. 그들은 감정을 주의할 뿐 이성은 주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이 지식 안에 있지 않고 감정 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의 의지는 특별히 강하다. 그들은 모든 것에 대해 어떤 제안이나 의견을 가진다. 그들은 일단 결정을 하면 매우 확고해서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대개 아주 견고하고 완고하며 감정이나 이성은 주의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 대해 그들의 완고한 의지로 생각을 정립하고 방침을 세운다. 당신이 그들을 설득하려 해도 그들은 이해하지 않는다. 당신이 그들에게 감정을 사용하려 해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지식 안에도 있지 않고, 감정 안에도 있지 않고, 의지 안에 있다.
Ⅱ. 혼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
A. 혼적인 사람
생각 안에 있는 사람이든 감정 안에 있는 사람이든 의지 안에 있는 사람이든 다 혼적이다. 생각 안에서 사는 사람이든 감정 안에서 사는 사람이든 의지 안에서 사는 사람이든 다 혼 안에서 사는 것이다. 생각으로 말미암아 살거나 감정으로 말미암아 살거나 의지로 말미암아 살거나 다 혼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이 혼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는 매우 쉽다. 우리는 단지 그가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지로 말미암아 행동하는지 아닌지, 그가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에서 사는지 아닌지를 알기만 하면 된다. 그가 이 셋 중 어느 하나로 말미암아 행동하는 한, 이 셋 중의 어느 하나 안에 사는 한, 그는 혼적인 사람이다.
혼적인 사람은 종종 「좋은 사람」이라 불리울 수 있다. 그는 흔히 사람의 눈에는 흠이 없다. 명석한 생각에 의해 행동하는 사람들은 항상 사람의 칭찬을 받고, 절제하는 감정 안에 사는 사람들은 사람의 인정을 받는다. 확고부동한 의지를 의존하는 사람들 또한 사람의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사람이 이렇게 살 때, 그는 죄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 안에서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비록 사람 앞에서는 죄 없고 흠 없게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그의 영은 마비되어 영적 이해가 둔감하다.
언젠가 어떤 곳에서 나는 한 동역자를 만났다. 그의 행위는 정말 선했지만 그는 너무 많이 생각(혹은 두뇌) 속에 살았다. 그러므로 그는 영적인 일을 이해하거나 깨닫기가 어려웠다. 내가 그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들에 관해 말할 때마다 나는 그가 두 눈을 굴릴까봐 몹시 두려웠다. 내가 말할 때, 그는 요지를 거의 파악할 때까지 듣고는 그의 두 눈을 굴리면서 다시 얼떨떨해지곤 했다. 그의 두 눈이 돌아가는 것은 그의 생각이 고려 중임을 의미했다. 그는 단지 그의 생각을 사용하여 고려할 뿐 하나님에 속한 것들을 느끼기 위해 그의 영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영적인 것들을 이해하고 느끼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다.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 생각은 종종 형제들에게 어려움과 장애물이 된다. 많은 형제들은 영적인 것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자주 생각을 사용한다. 그들은 그들의 생각을 발휘함으로써 영적인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혼의 부분인 생각이 영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다. 생각 안에 사는 사람은 혼 안에 살고, 영적인 것들을 이해하는 아무런 능력 없는 혼적인 사람이 된다.
생각이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 형제들의 어려움이듯이 감정은 번번히 자매들의 장애물이다. 많은 자매들이 영적인 것들을 깨닫거나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너무 많이 감정 안에 있기 때문이다. 각처의 교회들 중에서 나는 열심과 사랑이 있고 행동에 주의하고 행위가 건전한 많은 자매들을 보아 왔다. 그런데도 영적인 것들에 이를 때, 그들은 의식이 부족하고 그러한 것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그들이 너무 많이 그들의 감정 안에 살고 그들의 감정으로 말미암아 행동하기 때문이다. 외관상으로 감정은 죄는 아니지만, 감정은 그들이 영 안에 사는 것을 방해하고, 그들의 영으로 하나님에 속한 것들을 만지는 것을 방해하고, 모든 영적인 느낌을 가지지 못하게 하며, 영적인 것들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감정이 그들의 함정이다. 그것은 혼으로 말미암아 살고 혼적인 사람이 되도록 혼의 영역 내에 그들을 계속 붙들어 둔다.
많은 형제들에게 있어서 의지 또한 그들의 영적인 것들에 대한 이해에 관하여 어려움과 장애물이 된다. 몇몇 자매들까지도 이러한 문제를 갖고 있다. 그들은 너무 많이 그들의 의지대로 문제를 판단하고 결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영적인 것들에 대한 아무런 영적인 느낌이나 이해 없이 혼 안에 산다.
어떤 사람이 혼의 어느 부분 안에 있든지 그는 매우 쉽게 그 부분으로 말미암아 행동하고 그 부분 안에서 살 것이다. 생각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떠한 일을 당하기만 하면 자연히 그 문제를 통하여 거듭거듭 생각하고, 많은 각도에서 그것을 고려할 것이다. 감정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대하거나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무의식 중에 감정에 매우 많이 유의한다. 강한 의지의 사람은 확고한 결심과 바꿀 수 없는 결정을 하여 사람과 문제들을 다룰 때 매우 쉽게 그의 의지에 매달린다.
어떤 사람이 혼의 어느 부분 안에서 쉽사리 자연스럽게 산다면, 그는 확실히 그 부분에 속한 사람이다. 만일 당신이 자연스럽게 모든 문제들을 생각하고 고려하고 심사숙고하는 사람을 본다면 그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행동하는 자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생각 안에 있는 사람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을 당했을 때 쉽게 흥분되고 급히 웃고 급히 눈물을 흘리며, 한 순간 즐거워하고 그 다음에는 우울해한다면 틀림없이 그는 감정이 풍부하고 감정적인 사람이다. 당신이 일을 당할 때마다 아무 노력 없이 계획하고 결정하며 어떤 특별한 실행 없이 당신의 의지가 처리하고 작용하기 위해 나온다면, 의심할 바 없이 당신은 의지에 있어서 강한 의지 안에 있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 안에 혼의 어느 부분이 강하거나 풍부하면 그가 어떤 일을 당하여 그것을 처리할 때마다 최전선에 있는 것은 항상 그 부분이다. 사람의 혼의 어느 부분이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주도권을 취한다면 그것은 그가 바로 그 특정 부분 안에 있다는 증거이다. 또한 그것은 그가 혼적인 사람이라는 증거이다.
B. 영적인 사람
우리가 어떤 사람이 혼적인가를 알아 낼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이 영적인가를 알아 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혼적인 사람은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지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이므로 영적인 사람은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살지 않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혼적인 사람이 혼으로 말미암아 살고 영으로 말미암아 살지 않는 사람이라면 영적인 사람은 영 안에서 살고 혼 안에서 살지 않는 사람이다.
영적인 사람 역시 혼을 소유하고 그들의 혼 안에 있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평범한 혼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강하고 더 풍부하지만 그들은 이 혼적인 기관으로 말미암아 살지 않고, 혼적인 기관 안에 살지도 않는다. 그들은 영으로 말미암아 영 안에 살며, 영이 그들의 모든 행동과 행위의 주인과 근원이 되도록 한다. 그들 안에 있는 영은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며 영이 그들의 행동의 근원이고 그들의 활동의 출발점이다. 그들 안에 있는 혼은 복종의 위치에 있다. 그들의 혼 안에 있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도 기능을 발휘하지만 이들은 모두 영의 통제 아래 종속되어 있고 영의 지시를 받는다. 그들도 그들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사용하지만 그들은 혼의 이 기관들을 사용할 때 항상 영의 느낌을 따른다.
그들은 혼이 모든 것에서 주인이 되게 하고 혼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최전선에 서서 주도하고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는 혼적인 사람과 같지 않다. 그들은 혼의 탁월함을 부인하고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지의 주도를 거절한다. 그들은 영이 그들 안에 주인이 되도록 하며, 그들이 영의 느낌을 따르도록 영이 그의 전존재를 관리하게 한다.
그들은 어떤 일에 마주칠 때마다 그것을 접하고 처리하기 위해 혼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지를 먼저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먼저 영 안에서 이 문제에 대해 주님의 느낌을 구하며, 그것을 접하고 느끼기 위해 먼저 그들의 영을 사용한다. 그들은 그들의 영 안에서 주님의 느낌을 만진 후, 영 안에서 그 느낌을 이해하기 위해 혼 안의 생각을 사용하며,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혼 안의 감정을 사용하며, 혼 안의 의지를 사용하여 그것을 수행한다. 그들은 혼의 기관들을 사용하지만 혼적이지 않고 혼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살지 않는다. 그들은 영의 생명으로 살아 영적이며, 혼은 단지 그들이 부리는 하나의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
Ⅲ. 비정상적 상태
타락한 사람은 영이 죽어 있는 상태이므로 혼으로 말미암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그러나 구원받고 소생된 영을 소유한 우리는 영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다. 더우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으로 돌아와 영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구원하셨다.
사람의 타락은 사람을 영에서 혼으로 하락하게 했다. 그래서 사람은 더이상 영으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고 혼으로 말미암아 산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을 혼에서 영으로 구하여 사람이 혼으로 말미암아 살지 않고 영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이런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 영과 혼과 그 안에 내포된 문제들을 분별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더러는 혼 안에 머물러 혼으로 말미암아 산다. 더우기 그들은 하나님의 갈망이 그들이 혼에서 해방되어 영 안에 사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영이 소생된 것과 그 영이 그들의 혼과는 다르다는 것과 그들이 그들의 영 안에 살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그들은 혼 안에 머물러 혼으로 말미암아 산다. 이것은 그들이 영 아닌 혼으로 말미암아 사는 데 익숙해 있기 때문이며 영 안에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영과 혼을 분별하지 못하고 우리가 혼에서 해방되어 영 안에 살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갈망임을 모르는 사람들은 혼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합당하고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그들이 주의하여 실수가 없기만 하면 좋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이 너무나 가련한 것임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지 실수하는 데서 실수 없는 상태로 구해내기를 의도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를 더 나아가 혼에서 영으로 구해내려 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실수 없는 생활을 영위하기 원하실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영적인 삶, 영적으로 흠이 없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혼으로 말미암지 않고 영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생활을 하기 원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지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혼으로 말미암아 살며, 그들의 혼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사람들이 되고자 분투 노력한다. 그들의 영은 이미 소생되었지만, 그들은 그들이 그들의 영을 사용하여 그들의 영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혼만의 힘으로 만족한 생활을 살아 그들 스스로를 완전한 사람들로 만들고자 한다.
사물에 대한 그들의 견해와 판단, 사랑과 기호는 모두 영 안에 있지 않고 혼 안에 있다. 비록 그들이 잘 처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고 행동과 행실에 흠이 없지만 그들은 여전히 영 안이 아닌 혼 안에 살고 있다. 가령 그들의 생각이 깨끗하고 그들의 감정이 균형 잡혀 있고 그들의 결정이 정확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혼적일 뿐 영적이지 않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상태는 비 정상적이다. 그들은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성공할 수 있을지라도 그들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때때로 더러는 실제로 그들의 성공(그것은 정말 의심스러운 성공이다)에 만족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혼으로부터 해방되어 영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을 원하시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영과 혼의 분별에 대해 약간의 인식이 있고 하나님의 갈망이 우리가 혼으로부터 벗어나 영 안에 사는 것임을 아는 사람들도 여전히 혼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으며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영이 이미 소생되었음을 알지만 그래도 영으로 말미암아 살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혼으로부터 해방되어 영 안에 살기를 원하시는 줄을 알지만 그래도 여전히 혼 안에 머물러 혼으로 말미암아 산다. 그들은 사람이 영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것들을 만지기 위해 혼을 사용한다. 그들은 그들에게 영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영을 사용하지 않으며, 그들이 영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영 안에 살지 않는다. 그들은 혼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지를 사용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하고 영을 사용하는 데 익숙해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을 소홀히한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들은 항상 그것을 처리하기 위해 먼저 그들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지를 사용한다. 기껏해야 그들은 선하고 흠 없는 그리스도인들일 뿐 (사실상 이것도 의심스럽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일 수는 없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사람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 뿐 하나님의 칭찬은 받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구출-죄로부터의 구출이 아닌 혼으로부터의 구출, 사람에게 비난받는 부정한 육신으로부터의 구출이 아닌 사람에게 칭찬받는 깨끗한 혼으로부터의 구출-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에 대하여 여전히 문외한들이요 외인들인 것이다.
Ⅳ. 혼으로부터의 구출 방법
우리는 어떻게 혼으로부터 구출될 수 있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관점에서의 계시가 필요하다. 하나는 혼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혼이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있어서 무력하고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 하잘것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혼의 어느 부분이 아무리 우수하고 강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에 속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며 영적인 것들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의 생각이 아무리 깨끗하고, 우리의 감정이 아무리 균형 잡히고 우리의 의지가 아무리 합당하다 할지라도 이들은 결코 우리를 영적으로 만들지 못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혼과 그에 속한 모든 것들이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함께 못 박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했을 때, 그가 가리킨 「나」는 혼이다. 하나님의 평가로는, 혼은 죽어 마땅할 뿐이다. 또한 우리의 혼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에 의해 처리되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의 혼에 속한 것들에 가치를 두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혼이 죽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이 죽어 마땅하다는 것과 그것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뿐이다. 그러한 계시와 이상은 우리로 하여금 혼을 정죄할 수 있게 하며, 혼을 부인하고, 혼을 거절하고, 모든 일에서 혼이 주도하는 것을 금하게 할 수 있으며, 모든 것에서 결코 혼에게 양보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혼을 처형했다. 우리는 성령이 혼의 생명을 죽이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혼의 활동을 처리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혼이 얼마나 무력한지, 혼이 얼마나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또한 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와 그분이 혼을 어떻게 처리하시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혼을 부인하고 혼을 거절할 수 있으며 혼으로부터 구출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혼의 무력함을 보게 해 주시고 혼으로 인한 십자가의 다루심을 보게 해 주시기를 주님께 구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것에서 혼을 거절하고 혼으로 말미암아 살지 않기를 배울 것이다.
생각 안에 있는 사람은 모든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 그의 지식을 거절해야 한다. 그는 생각하고 숙고하는 그러한 기능을 완전히 제쳐두고, 영으로 돌이켜 영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의식을 느껴야 한다. 그는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거나 영적인 것들에 대해 말할 때 그가 생각하는 것, 상상하는 것, 이론을 세우는 것, 조사하는 것을 거절하고 오로지 그의 영 안에서의 느낌을 좇아 하나님의 교통 안에 움직여야 한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모든 것에 있어서 그의 감정을 거절해야 한다. 그는 그의 감정이 주도하고 지시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되며 성령이 그의 감정을 처리하시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그는 영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죄를 두려워하듯이 그의 감정을 두려워해야 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영 안에 살아야 하며, 감정의 지시를 받거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의지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있어서 그의 의지를 하나님의 원수로 보고 영의 대적자로 보아야 한다. 그럴 때 그는 그의 의지를 정죄하고 거절하고 부인할 것이다. 그는 그가 하나님 앞에 그의 견고하고 강한 의지로 말미암아 살지 않고 그의 영 안의 의식에 따라 살도록 성령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의 의지를 깨뜨리시도록 허락해야 한다.
우리가 혼의 어느 부분 안에 있든지 우리는 그것을 정죄하고 거절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생각이든 감정이든 의지이든, 그들 모두는 깨뜨려져야 하며 처리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에 있어서 우리는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지의 주도를 거절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영이 가장 먼저 점령하여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다스리고 감독하고 다스리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혼으로부터 구출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한편으로 우리의 영으로 말미암아 혼 안에 있는 모든 기관들을 다스리고, 다른 한편으로 혼으로 말미암아 살지 않음으로써 혼적이지 않고 영적일 것이다.
위트니스 리
[생명의 인식, "영과 혼의 분별",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