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누림을 함께 나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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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ug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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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적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의 영 안에 주님(그 영)이 계시기 때문에 그의 영을 사용한다면(이런 표현이 합당하다면) 그 안에 계신 연합된 그 영도 함께 해방될 수 있는 것이고, 한면에서 신언하는 자의 영이 신언자에게 제재를 받는 것이 신약의 원칙이기 때문에(고전14:32) 주님이 이러한 두 가지 방면에서 이 길을 축복하시는 면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겉사람과 속사람이 있는데 이 두가지는 깨어지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는 많은 경우 불일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체험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의 어떤 공급이 있을 때, 그리고 자신을 부인하고 영을 해방하기 위해 생각을 거절하고 영으로 돌이킬 때 일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그러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갓 믿는 사람도 여전히 영을 사용할 수 있고 영을 해방할 수 있는 방면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은 그가 절대적으로 겉사람이 깨어졌다는 표시도 아니고 다만 체험의 한 부분에 있어서, 주님의 은혜의 한 방면에 있어서의 일치에 불과할 뿐, 그의 앞에는 여전히 깨어짐과 (겉사람과 속사람의) 분리라는 멀고 험한 길이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체험이 아닌 실행의 방면으로 이러한 성취에 도달하려는 (자아에서 기인된) 유혹이 있을 수 있는데, 그 결과 그가 더 깊은 깨어짐이나 십자가의 길을 원하는 대신 생각을 영으로 돌이킴으로 영을 해방하려는 실행 방면에만 치우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결과 이러한 실행 자체는 성경적이고 실행의 한 방면으로서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속적인 자기 부인과 겉사람의 파쇄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러한 실행은 결국 많은 효과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자아가 강화되는 결과를 빚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러한 실행으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그런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다면 주님이 동의하지 않는, 흐름이 거의 없는 영의 해방(?)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길을 감으로써 우리가 주님께 굴복해야 되는 다른 방면이 있고 영의 해방은 결국 우리 편에서는 주님께 복종하는 것이고 주님 편에서는(그 영이신 주님이) 신언자에게 복종하는 문제이기 때문에(마치 권위의 기도와 같이), 실행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는 영의 해방이라는 진리(실행)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는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실행으로 대신하는 자아의 저항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행을 유달리 강조하는 사람들은 특히 십자가의 방면에 대해 체험이 없거나 약한데, 그렇지 않다면 그의 실행을 통해 영이 충분히 해방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 실행이기 보다는 그 실행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십자가 방면의 체험에 대한 부족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니 형제님이나 리 형제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실행 방면과 함께 겉사람의 파쇄, 십자가의 길을 함께 교통하셨으니까요. 다만 자아의 연유로 어느 부분만을 우리가 강조하거나 선별 수용함으로써 문제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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