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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ug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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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형제의 간증(5편 - 8편)
5. 뉴질랜드로..
뉴질랜드에 도착하고 몇 개월 후에 저희 가족은 식당을 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 바쁜 생활이 시작되었고 저의 머리가 아픈 것과 감정이 메마른 것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영에 속한 사람」의 3권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과 감정은 여전히 무언가를 배우고 느끼는 것에 있어서 연약한 상태라 특히 영어를 배우는 것에 있어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게 되었습니다.
뉴질랜드에서 3년 정도 가족과 함께 식당 일을 하면서 1995년 1월 1일 아침이 되었을 때 몸이 지쳐 있던 상태에서 조금 늦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불 속에서 눈을 뜨면서 새해가 되었는데 문득 주님을 위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면서 마음 속에 주님의 기름부음을 느끼게 되었는데 주님이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식당 일에 조금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저희 가족은 한 한인교회 예배당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 마음 속에서는 지방의 터에 대한 진리 인식이 있어서 교파 예배당에는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당시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었고 주님의 회복 안의 교회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임시적으로 나가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한 한인교회 예배당에 나가던 첫 날 제 마음 안에는 주님의 적셔짐이 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청년부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동안 존재 안에서 갇혀 있었고 식당 일에 매여 있던 상태에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생각이 충분히 강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러한 생각이 영과 연결이 되어서 기도를 하면 눈물이 나오고 찬송을 부를 때마다 마음에 적셔짐이 있는.. 처음 주님과의 사랑에 빠졌던 그 때의 그 생활보다 더 강한 주님의 기름부음 가운데..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청년부 회장이 되었고 주님의 사랑에 대해 다시 불이 붙은 저는 영어도 배우고 성경도 더 공부하고 싶어서 바이블 칼리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6년 말에는 뉴질랜드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한 선교단체가 있는데 그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그 선교단체에 새로운 목사님이 오시게 되었고 저는 순장들의 기도와 교통을 통해 총순장이 되었습니다.
6. 갈등이 시작되고..
당시 저의 영적인 상태는 생각은 그리 강하지 못했지만 직감 안의 주님이 주시는 느낌이 있을 때 이것을 생각 안에서는 오히려 분명하게 인식을 하고 강하게 붙잡을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 느낌을 저의 생각으로 속으로 정리를 한 다음 기도나 말로 표현을 하게 될 때 항상 말마다, 기도마다 강한 기름부음을 느낄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추구 과정에서 어느 정도 저의 오해가 있던 것이 주님은 합력하여 영 안에서 어떤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생각과 감정을 통해 표현을 할 수 있는 단계로 이끄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지금 돌이켜 보면 생각 안에서는 분명했지만 어느 정도 감정의 혼합이 있었고 그 면에서 간혹 감정에 빠지는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몇 번의 다루심과 메마름의 과정과 갇혀 있는 과정을 통과했다고 해도 순수하게 영의 느낌만을 흘려 보내는 통로로서는 여전히 부족한 면이 많이 있었습니다.
1997년 초 그 선교단체의 총순장이 된 이후에 새로 오신 목사님과 개인적으로 식사를 하며 대화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솔직하게 저의 신앙 배경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라는 것을 말씀드렸고 그 목사님도 몇 권의 책을 읽어 보셨다고 긍정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정도만으로도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997년 초에 그 선교단체는 모임 장소가 없어서 빈 강의실이나 근처 교회 예배당에서 모임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20-30여명 정도가 모였는데 비록 빈 강의실이나 근처 예배당에서 모였지만 모일 때마다 간절한 기도가 있었고 찬양과 말씀을 통해 누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오클랜드 대학 내의 서클 등록을 위해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학기 초가 되어 오클랜드 대학 내에 서클 등록이 되고 서클 룸을 정식으로 할당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인원수가 증가하여 1997년 말이 될 때는 100여명에 조금 못미치는 인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조금씩 목사님과 저 사이에 성경 해석에 대한 관점에 조금씩 차이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개혁 신학에 근거한 신학을 하셨고 저는 바이블 칼리지에 다니고 있는 상태였지만 저의 성경 해석과 신앙적인 배경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였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 차이점이 드러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견해 차이로 인해 그 해 말부터 제 안에는 갈등이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7. 다시 만날 날을 위하여..
1998년 초가 되자 이런 갈등으로 인해 제 안에 메마름이 있었고 무언가를 갈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희 집에 저희 아버지와의 사업 관계차 한 분이 오셨는데 식당을 할 때 저희에게 도움을 많이 주셨던 저도 잘 알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식당을 할 때 「열두 광주리 가득히」 책을 테이블 위에 놓아 두었었는데, 그 분이 그 책을 보시고, "오 주 예수님!"이라고 하셨던..
그 분과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저는 저의 현재 상태에 대해 메마른 느낌이 있는 것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뉴질랜드에도 주님의 회복 안의 교회가 있다고 하시며.. 한번 나와 보지 않겠느냐고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는 한 형제와 함께 뉴질랜드 내의 여러 교회 예배당을 전전하며 어느 곳에 주님의 인도가 있는지를 갈구하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인터넷으로 "Watchman Nee, Witness Lee" 등의 단어를 검색해 보면서.. 위트니스 리 형제님이 한 해 전에 주님 품으로 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무언가 안타까운 느낌이 들면서 "이제 너는 그 곳으로 가야 된다. 그리고 너는 고난을 받을 것이다"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형제와 함께 새로운 주님의 회복 안의 교회 생활이 시작 되었습니다. 교회 생활 안의 달콤한 신혼이 시작되었고 늘 집회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여전히 목요일에는 그 선교단체 모임에 나가고 화요일 및 금요일, 그리고 주일은 노스쇼어 교회 집회소에 나가는 생활이었습니다. 여전히 그 선교단체에서 맡고 있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함께 회복에 온 그 형제가 그 해 그 선교단체의 총순장이 되었기 때문에..
그러다가 1998년 말 뉴질랜드 해밀턴에서 컨퍼런스가 있었는데 그 선교단체에 나오는 한 자매가 함께 가게 되었고 그 일로 인해 저희가 소위 말하는 지방교회라는 곳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컨퍼런스 도중에 순복음 교회 예배당에 다니시는 어머니가 찾아 오셔서 집으로 돌아갔고 저희가 지방교회라는 곳에 다니고 있는 것에 대해 그 선교단체 내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순장들의 모임이 있었고 저희들은 여러 말로 해명을 했지만 어떤 교통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주권 가운데 저를 포함해서 8명의 청년들이 그 선교단체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주님의 주권 가운데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을 믿으며.. 주님의 생명과 진리 안에서..
8. 애정에 대한 처리
이 시점에서 잠시 삽입 부분으로 주님이 저의 애정을 단계적으로 처리해 가신 과정에 대해 교통을 드리는 것이 먼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첫사랑 이후로 저는 결혼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바울과 같이 결혼을 하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첫사랑에 대한 상실의 느낌이 너무나도 컸었기 때문에 그러한 대상을 놔 두고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쉽지 않았던 점도 내적으로는 있었을 것입니다. 한면에서는 주님의 사랑에 불타 올랐던 면도 있었지만..
그러다가 뉴질랜드에 와서 결혼에 대한 저의 관점과 인식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저는 저의 배우자에 대해 주님께 기도를 드리게 되었고 주님이 언젠가 이 문제에 대해 인도를 하신다는 기름부음을 통한 내적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확신 이후에 한 면에서는 안식을 했지만 또 한면에서 제가 동역을 해 드리는 면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제가 한인교회에 있을 때 한 자매를 마음으로만 좋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저의 이런 마음을 고백했을 때 그 자매는 저와 가장 친한 한 형제와 사귀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저는 그 당시 "그가 아닌 제가 고난을 당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라고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또 한 자매에게 마음이 있었을 때 그 자매와 바닷가에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매와 바닷가에서 함께 가지고 온 햄버거를 먹고 있을 때 주님이 제 안에서 그 자매가 저의 짝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셨습니다. 저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지만 그 느낌 이후로 그 자매에게 어색하게 대하게 되었고 그 자매는 저의 이런 태도에 제가 그의 짝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게 되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결국 그 자매와 헤어지게 되었고 그 자매는 자신이 저를 내려 놓은 것에 대해 미안해했지만 실상은 제 안에서 주님이 먼저 그 자매를 내려 놓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이제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주님께 어떤 인도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한 자매가 그 선교단체에 처음 오게 되었는데 당시 여러 순 모임이 있었고 저는 그 자매가 저의 짝이라면 저의 순 모임으로 오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자매가 저의 순 모임으로 왔고 저는 주님의 인도가 틀림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그 자매와 무언가 잘 맞지 않는 과정의 연속 속에 어느 날 그 자매도 제게 마음을 조금 열게 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어쩌면 또 다른 길을 갔을지도 모르는 그 시점에서.. 주님의 주권으로 배척을 받고 그 선교단체를 나오게 되었습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