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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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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와 몸과 지체 모두가 그리스도이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합일의 문제를 언급해 보겠다. 우리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이 이 땅에 나타나는 문제임을 본 적이 있다. 고린도인들에게 바울은,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인 것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고 말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도 그러하다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도 그러하다고 말하지도 않았으며, 다만 그리스도도 그러하다고 말했다. 바꾸어 말해서, 머리가 그리스도요 몸도 그리스도요 지체도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인 것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다고 말했다. 이 말씀은 머리와 몸의 지체 모두가 그리스도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을 보았을 때 주님은 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사울이 그분에게, 『뉘시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의 「나」는 하늘에 계신다. 땅에서 제사장의 공문을 가진 바울이 어떻게 하늘의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핍박할 수 있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의 합일임을 본다. 머리와 몸과 지체 모두가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사울이 땅에서 교회를 핍박할 때 주님은 그에게, 『네가 왜 내 교회를 핍박하느냐?』, 『네가 왜 내 백성을 핍박하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네가 이렇게 행하는 것은 곧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임을 말한다.
Ⅱ. 합일은 오늘날 이 땅 위에 있다
A. 그리스도의 몸은 이 땅 위에 있다
그리스도가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가 땅에 계심은 매우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은 이 땅 위에 있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말한,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의 이 몸은 이 땅 위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한, 지체가 많은 한 몸이 땅에 있는 이유는 이 몸이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울은 이 땅 위에 있는 몸을 핍박했지만 주님은 그분을 핍박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 몸이 이 땅 위에 있음을 말한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요 그리스도에게는 오직 한 몸밖에 없다. 그러므로 몸의 합일은 하늘에 올라가서야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몸의 합일은 이 땅 위에서 나타날 수 있다. 몸은 이 땅 위에서 하나될 수 있다. 고린도 전서 12장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보여 주는데 거기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고전 12:26).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이 이 땅 위에 있는 것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하늘에 있는 몸이 즐거워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지체가 하늘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는다. 이것은 분명히 땅에 있는 일이다. 오직 땅에서만이 한 지체가 고통을 받을 수 있고 땅에서만이 온 몸이 고통을 받고 핍박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는 장래 하늘에 있는 일이 아니라 오늘 이 땅 위에 있는 일이다.
B. 합일은 오늘 세상에 있다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주 예수님의 기도는 이 땅 위에서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 기도이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절)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같이」에서 「저희도... 우리 안에 있게 하사」에 괄호를 해놓으면 주님이 교회가 하나되기 바라시는 것은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임을 분명히 볼 수 있다. 만일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이라면 분명히 이 하나 또한 세상 사람 앞에 있는 것이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믿을 수 있기를 바라셨다. 이것 또한 이 하나가 오늘 세상에 있는 일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첫째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하나가 오늘 이 땅 위에 있고 세상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합일은 장래 하늘에 있는 일이 아니다. 장래 하늘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하나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하나는 장래 하늘에서 나타나고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땅 위에서 나타나고 실행되는 것이다. 형제들은 이것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교회를 위하여 교회가 하나인가 아닌가, 그리스도인이 하나인가 아닌가를 염려하지 말라. 언젠가는 하늘에서 하나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 앞에서의 일이다. 오늘날 주님의 요구는 이 땅 위에서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이다. 이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하늘에 올라가서야 우리가 하나된다고 말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의 하나는 오늘 이 땅 위에서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 첫째로 주의할 일이다.
Ⅲ. 합일의 범위는 몸보다 클 수 없다
A. 교회의 합일은 오직 몸을 범위로 한다
합일의 문제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든 아니든 생명이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든 아니든 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칭호만 있으면 그들과 우리가 하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준 하나는 몸의 하나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합일은 몸의 범위를 훨씬 뛰어 넘어서 죽은 시체나 몸 외의 것들도 포함시킨다. 이러한 합일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허락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몸의 합일만이 교회의 합일이라고 강하게 말하고 싶다. 교회의 합일은 오직 몸을 범위로 할 수 있을 뿐 그 범위가 몸 밖으로 확대될 수 없다. 기독교의 이름을 달고 있고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달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우리가 하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러한 규정이 없고 이렇게 말씀한 곳도 없다.
B. 밀과 가라지는 하나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마태복음 13장의 말씀을 즐겨 인용한다. 그들은 마태복음 13장의 두번째 비유에서 주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가 마치 잠들었을 때와 같아서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밀밭 사이에 뿌려놓고 갔다고 말한다. 또 싹이 나서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니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주여 우리가 가라지를 뽑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물으니 주인이 추수할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말했다. 그 때에 추수하는 사람들이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곳간에 넣었다.
많은 사람들은 합일을 밀과 가라지의 합일로 착각한다. 즉 합일이 밀의 합일일 뿐 아니라 가라지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은 합일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섞여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라,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를 죽이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로마 천주교는 가라지 곧 소위 이단자들을 다 뽑아버리려고 한다. 우리는 그들이 원칙에 있어서뿐 아니라 실지 상황에 있어서도 일을 잘못 처리하였음을 안다. 그들은 가라지를 뽑아버릴 뿐 아니라 밀까지도 뽑아버렸다. 그들이 기독교를 이단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원칙에 있어서 틀렸을 뿐 아니라 사실에 있어서도 틀린 것이다.
여기서 주님의 명령은 이 세상에서 가라지를 뽑으라는 말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구분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추수 때까지 두 가지를 자라게 한 것은 이 두 가지를 교회 안에서 자라게 한 것이 아니라 밭 곧 세상에서 자라게 하는 것을 뜻한다.(첫 비유에서 밭을 세상으로 설명한다). 바꾸어 말하면 유명 무실한 그리스도인을 세상에서 쫓아내거나 로마 천주교처럼 죽일 필요 없이 세상에 살아 있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합일이 가라지를 포함한다는 말이 아니다.
(1) 교회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오늘날 소위 기독교 단체들은 종교와 교파 안에 믿지 않는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은 교회 안에 가라지를 포함시키는 것이다. 주님은 가라지를 교회 안에 포함시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세상에 포함시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우리에게 지키라 하신 그리스도인의 하나는 세상에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지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로마 천주교 사람들과 같이 가라지가 세상에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땅에서 뽑아버리려고 한다. 이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또 하나의 극단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 안에 머물게 하는 단체와 같다. 만일 여러분이 국교회를 본다면 그 나라 국민이나 그 국민이 낳은 모든 자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을 교회 안으로 데려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은 다 그 나라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포함시킬 정도로 교회 문을 열어 놓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2) 교회가 포함하는 것이 너무 커서는 안 된다
웨슬레교의 헌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장래 진노를 피하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웨슬레 교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말이 너무 포괄적임을 기억하라. 물론 웨슬레는 하나님이 크게 쓰신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면에서 그보다 못하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배우지 못했고 그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형제여! 당신이 한 이 말이 포함한 것은 너무 크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다. 실지로 교회는 장래에 진노를 피하려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불교 신자들도 장래의 분노를 피하려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그리스도인의 하나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만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나는 형제들이 교회가 무엇인지를 보기 바란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사람들이다. 무엇이 교회인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하나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만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인의 하나는 유명무실한 사람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들이 아직 세상에 속하고 거듭나지 않았으며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교회 안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 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C. 절차와 원칙의 문제
교파에서 주님을 섬기던 주님의 한 종이 나에게,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물론이죠! 우리는 어떤 교회도 구원받은 사람을 거절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거절합니까, 안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나에게, 『당신들은 누가 구원받았고 구원받지 않았는가를 알 수 있다니 아주 놀랍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답변이 옳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또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누가 구원받았고 누가 구원받지 않았는지 아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누가 구원받지 않은 것을 알 때에 당신이 그를 포함시키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따지는 것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따지는 것은 누가 구원받지 않은 것을 알았을 때 당신은 그를 받는가 받지 않는가에 있습니다.』 그는 답하기를, 『만일 우리가 알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받을 것입니다.』
원칙상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사실에 대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 사실에 있어서는 사도행전의 베드로가 구원 받았는지 안 받았은지에 대해 우리는 모른다.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구원받았느냐고 물을 때 그가 구원받은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원칙이 아니다. 어떤 단체는 누가 믿고 구원 받았든 안 받았든간에 일률적으로 사람을 받고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데 이것이 원칙상의 문제이다.
오늘 나는 절차를 어떻게 밟아야 하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원칙을 정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가령 황제의 모든 자손은 중국인이 될 수 있다고 규정하는 것은 일종의 원칙이다. 만일 당신이 잘못 행하여 대화(大和) 민족(* 대화족(大和族) : 일본 민족의 자칭(自稱))을 수용한다면 이것은 절차상의 잘못이다. 만일 당신이 대화 민족도 중국인이 될 수 있다고 정한다면 이것은 원칙을 깨뜨리는 것이다. 역대로 이와같은 과실이 많았고 우리도 종종 틀린 일을 행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우리는 교만할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원칙에 있어서, 교회가 문을 열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받을 수 없음을 주께서 정하셨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어떤 단체를 만나든 그들이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다 들어오게 문을 열어 놓은 원칙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임을 보아야 한다. 밀도 있고 가라지도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교회 안에서는 전체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부르심받아 나온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다 들어 있는 것은 교회가 아니다.
D. 혼란된 단체를 떠나야 한다
만일 어느 단체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 다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크게 열어 놓았다면 그 단체는 그리스도인의 단체가 아니다. 이 합일은 그리스도인의 합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느 날 주님께서 당신의 눈을 열으사 당신에게 이런 단체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실 때 이렇게 떠날지라도 그리스도의 하나를 떠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라. 왜냐하면 이 단체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합일이 아니고 그 속에 혼란과 혼잡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떠났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의 합일을 떠난 것이 아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포함하고,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포함하여 두 가지가 섞여진 단체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그들 가운데서 나오라는 것이다!
(1)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
고린도 후서 6장 14절-16절 :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떤 우상과도 관계를 갖지 말아야 한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여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여러분은 하나님이 내주하시고 여러분 가운데 왕래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하나님이고 여러분은 그분의 백성이다.
(2) 믿지 않는 자 중에서 나오라
그러면 결과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명령은 이렇다.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기독교 단체든 그 단체가 기독교의 이름만 가졌을 뿐 그속에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않는 자도 있다면 우리는 그들 중에서 나와야 함을 본다. 그들의 명칭이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섞여 있다면 우리는 그들 중에서 나와야 한다.
E. 원칙이 틀려서는 안 된다
원칙상 믿지 않는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한번은 어느 형제가 나에게, 『당신들은 사람을 잘못 받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잘못받지 않았다고 느꼈으므로, 『그런 적이 있었을지 모르나 상당히 적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그러면 당신과 우리는 무엇이 다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우리 가운데 믿지 않는 사람이 들어온 것은 담을 넘어서 들어온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들 가운데서는 믿지 않는 자들을 정오 12시에 들어오도록 대문을 열어놓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우리도 틀릴 수 있기 때문에 결코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우리가 침례를 잘못 주거나 사람을 잘못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우리가 원칙적으로 그렇게 규정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몰래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 소위 기독교 단체 안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이름만 가지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해가 중천에 뜬 12시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절차에 있어서 조금도 틀린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잘못 행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 고의적으로 잘못 행하거나 원칙이 잘못된 것은 교회가 아니다.
(1) 그리스도인의 하나 아닌 것을 지킬 필요는 없다
만일 어떤 단체가 믿지 않는 사람임을 알고도 사람을 임의로 들어오게 한다면 그것은 분명 교회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단체에 대하여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를 지킬 필요가 없다. 그 하나가 그리스도인의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지킬 필요가 없다. 우리는 밀의 하나를 지킬 필요가 있을 뿐 밀과 가라지의 하나를 지킬 필요가 없다.
오늘날 이 땅 위에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않는 자도 들어 있는 자칭 교회 단체들이 많다. 그들은 외적인 하나를 지키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하나를 지킬 필요가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이런 하나는 도리어 참된 하나를 뒤집을 것이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하나에서 우리는 오히려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 들어갈 때 오히려 하나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Ⅳ. 합일의 범위는 몸보다 적을 수 없다
또 한가지 매우 중요한 일은 그리스도인의 하나에 일정한 범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하나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인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만큼 크다. 그리스도인의 교통은 그리스도의 몸의 크기만큼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크기만큼 그리스도의 교회도 그러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매우 분명하다. 앞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확대한 것, 즉 거짓된 것이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다른 한가지 어려움, 즉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이 지키고 있는 하나가 그리스도인의 하나가 아니라는 점을 보아야 한다.
A. 그리스도인의 하나는 성령 안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하나되기를 원할 뿐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특별히 주의하기 바란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하나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어떠한 종류, 어떠한 모양의 하나든 다 좋다고 하지 않으시고 성령 안의 하나를 원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를 그리스도인의 하나라고 부르겠다. 이러한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이다. 그리스도인의 하나를 지키려면 그리스도 안에서와 몸 안에서와 성령 안에서의 하나를 지켜야 한다. 이 하나는 몸의 크기만큼의 범위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하나가 그리스도의 몸을 범위로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B. 몸보다 적은 합일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다만 우리와 하나되기를 원하신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만일 그 합일의 범위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합일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의 몸보다 적은 어떤 합일의 범위를 가진 하나를 지키려고 한다면 당신은 바로 성경에서 말한 분열의 무리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 안의 합일을 지키기를 원하신다. 이 합일의 범위는 그리스도의 몸만큼 크다. 그리스도의 몸이 바로 합일의 범위이다.
가령 어떤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사람이 물속에서 침례받아야 하는 것을 믿는다 하자. 이것은 조금도 틀리지 않은 성경의 교리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그분의 자녀들 중 물속에서 침례 받지 않은 자들을 거절하는 원칙을 세웠다면 그들은 이런 교리를 하나의 근거로 삼을 것이다. 이것은 성령 안에서의 하나가 아니요 몸보다 적은 단체이다.
가령 어느 형제가 이들과 같이 있으면서 아주 좋은 영적 교제를 갖고 영적인 도움을 많이 얻고 있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보이심으로 그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단체가 교회가 아님을 보았다 하자.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침례받은 사람들과만 같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침례받지 않은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빛을 본 이 형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들을 떠나버린다. 이 형제가 떠나게 된 것은 주님의 비췸을 받았기 때문이다.
얼마 후 어느 형제가 그에게 권하기를, 『우리도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형제들입니다. 또 성경에서 하나님은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했기 때문에 당신은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떠나면 그리스도인의 하나를 범한 것이요 분열이요 분파요 종파입니다.』라고 말한다 하자. 만일 이 형제가 이런 말을 듣고 성경을 또 여러 번 읽어보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 되어야 함을 보고서 그들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여기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여기의 잘못은 매우 현저하다.
(1) 몸보다 적은 단체를 떠나는 것은 하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분열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먼저 분열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분열이란 바로 몸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이다. 고린도 전서 12장은 몸 안에 있는 분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 있지 않는 단체들의 분열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말한 그리스도인의 합일은 그리스도의 몸의 크기만큼의 하나이다. 우리는 이런 하나를 범하지 말아야 하고 거기서 나오지 말아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보다 더 작고 비좁은 단체의 하나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하나가 아니요 성령 안의 하나도 아니다. 왜 그리스도인의 하나가 아닌가? 그것은 그 합일이 몸만큼 큰 합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몸만큼 크지 않은 범위와 단체와 조직을 떠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를 범하거나 파괴한 것이 아님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에 미치지 못하는 범위나 단체를 결코 지킬 수 없다. 여러분은 반드시 그런 합일에서 나와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보다 더 작은 합일을 지키는 하나님의 자녀는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합일을 범하는 사람이다.
C. 분열에 관하여
고린도 교회 안에 분쟁이 있었는데 그들은,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말을 가장 반대한 사람은 바울이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느냐?』라고 말했다. 바울은 그들이 이렇게 행하는 것은 당을 짓는 것이요 육체의 행위(고전 1:11-13, 3:3-4)라고 말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분열이다.
(1) 누가 분열의 사람인가
가령 그들 가운데 마가라는 사람과 스데반이라는 사람과 빌레몬이라는 사람이 바울에 속한 자라고 말했다 하자. 어느 날 그들 가운데 어느 형제가, 스데반이든 빌레몬이든,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하자. 『우리는 함께 모이면서 아주 좋은 교통을 가져 왔습니다. 하나님의 종 바울은 특별히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그의 가르침을 주의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그의 메시지를 듣고 그의 서신을 읽음으로써 그와 매우 좋은 교제를 갖고 많은 도움을 받아 왔습니다. 또한 우리가 다 주 안에서 매우 친밀한 교통을 갖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최근 저는 우리가 잘못 되었다고 느낍니다. 오늘 고린도에는 수백명의 믿는이들이 있지만 우리는 열 명밖에 안되니 그들과 좋은 교통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다른 형제들은 일어나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죄를 범했습니다! 주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우리로 하나되게 하시기를 아버지께 기도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은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는 것을 보고서도 오늘 우리 가운데서 나가 다른 길을 가려고 하니 우리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당신은 주님을 영화롭게 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우리와 하나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하나를 보고 주님을 믿게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죄를 범하였으므로 우리 가운데서 나가야 합니다. 당신은 분열의 사람입니다.』
(2) 분열 안에 있는 사람이 나간 사람을 분열이라고 정죄함
형제들이여! 이것을 보았는가?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형제들에 대하여 하는 말이다. 그들이 먼저 분열 안에서, 『나는 게바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바울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라고 말했으므로 그들 가운데 먼저 많은 분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누가 나가려고 할 때 그들은 오히려 그에게 그리스도인의 하나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만큼 크지 않다. 그 하나는 바울에게 속한만큼 클 뿐이다. 그리스도의 몸보다 작은 하나를 지키는 것이 바로 분열이다. 나는 바울에게 속하였다고 말하는 것까지도 분열이다. 그들이 몸에서 분리되어 있고 자신이 분열의 사람임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들 가운데서 누가 나갈 때 그들은 그런 사람을 분열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형제 자매들이여! 이것이 오늘날 많은 기독교 단체의 문제이다.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는 많은 사람들, (나는 그들에게 득죄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의 영은 옳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이것이 우리가 기뻐할 일이 아니라 마음 아파해야 할 일임을 알아야 한다. 그럴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갈 길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수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몸으로부터 분리되고도 많은 형제 자매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오히려 이들(나온 사람들)을 분열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분열의 단체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분열의 단체에서 나오지 않는 그들 자신이 분열의 사람인 것을 깨닫지 못한다!
(3) 종파의 합일을 깨뜨리는 것은 옳은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어 우리에게 종파는 분열이고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임을 보여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1934년만 해도 세계적으로 천 오백 개의 큰 종파가 있었다. 이 많은 종파들이 자칭 교회라 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범위를 축소시켰다. 어떤이는 발이라하고 어떤이는 손이라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켰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어떤 형제 자매들이 몸의 범위로 돌아가서 몸의 교통을 갖고자 할 때 그들은 하나를 깨뜨렸다고 말한다.
만일 누가 당신에게 하나를 깨뜨렸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나는 분열의 하나를 깨뜨렸을 뿐 몸의 하나를 깨뜨리지 않았다.』라고 답변할 수 있다. 당신이 종파의 합일을 깨뜨렸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 만일 당신이 작은 합일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결코 큰 합일 안에 들어갈 수 없다.
(4) 작은 합일에서 나와서 큰 합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합일은 다만 몸의 크기만할 뿐이다. 몸 외의 것들을 가지고 들어올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합일은 몸만큼 커야 한다. 소위 하나라 하는 모든 것들 중 몸보다 작은 것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라고 할 수 없다. 소위 하나라 하는 것을 지키면 지킬수록 파벌이 있는 사람이 된다. 그 안에서 당신이 어떤 형제들과 매우 좋다고 생각할수록 당신은 종파 안에 있는 사람이요 분열 안에 있는 사람이다.
당신이 작은 합일들에서 나와야만 큰 합일 안에 들어갈 수 있다. 당신이 큰 합일 안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작은 합일을 버려야 한다. 합일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떤 합일인가를 보아야 한다. 어떠한 합일이든 다 가한 것이 아니라 오직 몸의 합일만이 가한 것이다. 몸의 합일보다 작은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받지 말아야 한다. 어떤 합일도 몸보다 작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몸보다 작은 합일은 모두 파벌이요,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바가 아니다.
D. 분열이란 무엇인가
분열이라는 단어인 헬라어 「Hairesis」는 성경에서 아홉 번 사용되었다. 여섯 번은 사도행전에서 사용되었는데 거의가 「당파」라고 번역되었다. 예를 들면 사두개인의 「당파」, 바리새인의 「당파」, 나사렛 「당파」와 같다(중국어 성경 참조). 세 번은 서신서에서 사용되었는데 이 부분들을 아래에서 보기로 하자.
(1) 교회 안에서만 분쟁이 있을 수 있다
고린도 전서 11장 18절 :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여기에서는 고린도인들이 모일 때에 분쟁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분쟁은 오직 교회 안에서만 가능하다. 고린도는 하나의 교회이고 그들은 모두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은 바울에게 속했다고 말하고 어떤이는 게바에게, 어떤이는 아볼로에게, 어떤이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말하였다. 그들의 어조가 틀렸을 뿐 아니라 영적인 태도도 좋지 않다. 다툼과 시기가 있을 뿐 그리스도의 사랑은 없다. 그들은 바울에게 속했다고 말하는 무리와 아볼로에게 속했다고 말하는 무리가 따로 모였다. 이것이 바로 분쟁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누가 분쟁을 일으켰다고 참소했다면 그런 참소는 오직 교회 안에서만이 가능하다. 교회 밖에서는 이런 참소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만 분쟁의 죄를 범할 수 있다. 사람은 합법적인 정부를 향해서만 반란죄를 범할 수 있을 뿐 불법적인 정부를 향하여는 반란죄를 범할 수 없다. 사람이 합법적인 정부와 함께 있을 때에는 반란이지만 불법적인 정부와 함께 있을 때에는 반란이 아니다. 그러므로 분쟁은 교회 안에 있는 일이다. 또한 분쟁은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는 일이다.
(2) 분쟁은 육체의 일이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20절 :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Hairesis)...와 같은 것들이라』. 육체의 일 중에 분열(원문 참조)이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 성경에서는 「이단」이라고 번역했다. 이 단어는 헬라어에서 「분쟁」, 혹은 「종파」와 같은 단어이다. 여기서 당신은 분쟁이 무엇인지 보았는가? 분쟁은 육체의 일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과 고린도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분쟁이 육체에 속한 것이요 영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육체의 모든 행위에 대한 목록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 분냄과 시기 등을 언급했을 뿐 아니라 분쟁을 언급했다.
1. 음행과 우상 숭배와같이 정죄받음
만일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그리스도인이 간음을 범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분명히 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또 그에게 그리스도인이 우상을 숭배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분명히 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에게 그리스도인이 분쟁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겉으로는 나눠질 수 있어도 마음 속으로는 그런 나눔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말은 많은 우상숭배자들이 겉으로 숭배할 뿐 마음 속으로는 숭배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핑계할 수 없는 일이고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정죄받는 일이다.
2. 육체의 행위 안에서 선택을 가질 수 없음
나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종파 안에 계속 머무를 수 있다는 책을 쓴 것에 대해 이상하다고 느낀다. 만일 오늘 하나님의 어떤 종이 그리스도인은 우상을 숭배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일 하나님의 어느 종이 그리스도인이 음행을 할 수 있고 호색하며 분낼 수 있고 원수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당신은 그를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종파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소책자를 복사해도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주님의 정죄하는 바임을 보지 못한다! 여러분은 결코 육체의 행위 안에서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종파는 우상숭배와 음행과 분냄과 술수와 똑같은 육체의 행위로서, 같이 정죄받는 목록에 올라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유혹되어 종파로 돌아가지 않도록 책임을 다해야 한다.
3. 종파를 이단으로 번역하게 된 배경
종파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것이 고린도 전서 11장에서는 분쟁으로 번역되었고 갈라디아서 5장 21절에서는 이단으로 번역되었지만 영어를 아는 사람은 다 알듯이 사실 이 두 가지는 동일한 단어이다. 그러면 왜 이 단어를 이단으로 번역했는가?
헬라어의 「Hairesis」라는 단어를 영어에서는 그 뜻을 완전히 번역하지 않고 「Heresy」라고 번역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국교회이기 때문에 성경의 이 부분을 번역할 때 어려움을 당하여 이상한 단어를 집어넣은 것이다. 그것이 틀린 단어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인쇄해 버렸다. 우리 성경에서도 「천주」라고도 하고 「하나님」이라고도 인쇄되었다. 「천주」라 인쇄한 것이 틀린 줄을 알면서도 각 교파(중국에서의 기독교의 상태-역자 주)가 그런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냥 인쇄한 것이다. 두 방면을 다 만족시키기 위하여 두 종류로 인쇄하였다.
또 세례같은 경우, 정확하게는 수침(受浸)이라고 해야 하는데 나라 전체가 세례를 받으니 수침이라고 인쇄하면 문제가 생긴다. 헬라어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Baptisma」라는 단어가 물 속에 잠긴다는 뜻임을 알고 있다. 그들은 감히 이렇게 번역하지 못하고 어미 부분을 다르게 고쳐서 영어로 「Baptize」라고 썼다. 이 단어는 근본적으로 외래어이기 때문에 이 단어가 무엇을 말하는지, 무언지를 모르게 하고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의미를 생각하게 한 것이다. 이와같이, 종파라는 단어를 인쇄하여 종파나 분쟁이 육체의 행위라고 말한다면 즉시 문제가 생기므로 혼동케 하도록 성경 안에 「Heresy」라는 단어를 집어넣었다. 사실상 이 단어는 영어가 아니다. 대체 이 단어는 무슨 뜻인가?
이 단어를 아는 영국인은 없다. 복음서원에 성경을 번역하는 두 형제는 수침을 「Baptisia」라고 번역했다. 내가 말하지만 중국 전역에 「뱁티시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물 속에 잠기는 것인지 머리에 물을 뿌리는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물에 잠기는 것을 찬성하는 사람이나 머리에 물을 뿌리는 것을 찬성하는 사람이나 모두 크게 기뻐할 따름이다. 이것은 사람의 충성되지 못함을 말한다. 여러분이 헬라어 참고서 몇 권을 참고해 보기만 하면 「Hairesis」라는 단어가 영어의 「sect」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경 번역자들이 많은 고려를 하여 이 단어를 「Heresy」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중국어 성경을 번역할 때 「이단」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하여 헬라어에서의 「Heiresis」라는 단어가 영어에서 「Heresy」로 변해버렸다. 이것은 음을 똑같이 하여 만든 단어에 불과하다.
1611년부터 영어로 번역된 이래 오늘날까지 삼백 년 동안 이 단어가 사용되어 왔다. 중국어에 와서는 「이단」으로 변했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영어에서 많은 단어들이 이러하다.
4. 종파 안에서의 하나를 지킬 수 없다
하나님은 이단 곧 종파를 육체의 일로 여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파 안에서의 하나를 지키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를 지킬 뿐 종파 안에서의 하나를 지키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종파의 하나를 지킬 때 곧 그리스도인의 하나를 파괴하게 된다.
(3) 종파는 사람을 멸망케 한다
베드로 후서 2장 1절 :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선지자)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종파)을 가만히 끌어들여』. 종파는 사람을 멸망케 하고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들어온 것들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하나를 하나님 앞에서 지키기를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하나보다 더 작은 하나를 유지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V. 합일은 연합이 아니다
A. 하나님의 자녀들은 보편적으로 하나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종파가 사람을 멸망케 하고 하나님이 정죄하는 것임을 본 후에 비로소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하나의 필요성을 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종파를 갖고 분쟁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마땅히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통을 갖되 이 교통이 몸만큼 커야 한다는 것을 인식 한다.
나는 최근 십여 년 이래로 최소한 중국에서 이러한 깨달음이 상당히 보편화됐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나는 어떤 사람에게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비록 우리는 종파를 반대하는 메시지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리스도인의 하나는 타당한 것이라고 느낍니다.』 이것은 한 기독교 지도자가 쓴 말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지도자들도 종파의 하나를 주의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하나를 주의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B. 연합된 합일은 도중의 정자(亭子)이다
나는 최근 십여 년 이래 합일을 주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몸의 합일로 돌아오지 않고 연합된 합일을 만들어 낸 이러한 종류의 합일은 사람의 산물로서 이것은 오늘날의 소위 연합 운동이나 초교파 운동이다. 이러한 연합은 종파를 구분하지 않은 연합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어느 쪽도 아닌, 도중(道中)의 정자(亭子)라고 느낀다.
(1) 그리스도인은 일을 철저하게 처리해야 한다
내가 솔직한 말을 하거니와, 만일 종파가 옳은 것이라면 당신은 종파를 유지해야하고 틀린 것이라면 마땅히 던져 버려야 한다. 그러나 오늘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사람들이 종파가 옳다고 말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틀렸다고 말하는 종파를 남겨둔다. 한면으로는 종파를 꺼려하면서도 종파를 고수하고 두 가지를 다 남겨 두면서 양면의 교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태도이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몸의 교통을 갖게 하는 것이 주님의 원함이라면 우리는 다른 모든 교통을 던져 버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만을 가져야 한다. 내가 이런 사람들에게 권하거니와, 종파가 보존될 필요가 있다고 느끼면 힘을 다하여 종파를 유지하라.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행위는 틀렸지만 그 마음가짐은 옳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두 마음을 품고 일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고 충성스럽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 만일 종파가 옳은 것이라면 철저하게 지켜야 하고 틀린 것이라면 철저하게 반대해야 한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도중에 있는 정자와 같이 한면으로는 종파가 틀린 것을 인정하면서 또 한면으로는 바로 잡히는 것을 꺼려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한면으로 교파를 시인하면서 다른 면으로는 연합 교회를 조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위치에 서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두 마음을 품고 일을 처리할 수 없다. 옳은 것에 대하여는 옳은 방안을 가져야 하고 옳지 않은 것에 대하여는 옳지 않은 방안을 가져야 한다. 타협이나 절충은 옳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철저해야 한다. 종파가 옳은 것이면 옳은 것이고 틀리면 틀린 것이어야 한다. 결코 절충하거나 타협하는 방안이 있어서는 안 된다.
C. 연합 교회의 범위는 몸이지만 그 속에는 종파가 있다
앞에서 말한 두 번째 종류의 합일은 가라지까지도 포함시켰기 때문에 그 합일의 범위가 몸보다 훨씬 큰 것이다. 세번째 종류의 합일은 몸보다 훨씬 적은 단체요 하나의 종파이다. 네번째 종류는 어떤 것인가? 그 범위는 그리스도의 몸만큼 크나 그 속에 장기판같이 나뉘어진 많은 칸이 있다. 즉 몸과 같이 큰 범위를 가졌으나 그 속에는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하고 나는 나의 일을 하는 종파가 있다. 이것은 연합 교회이지 참 연합이 아니다. 또 이것은 합해진 교회이지 참 하나가 아니다. 비록 교통하는 범위가 몸만큼 클지라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여전히 많은 파벌이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1930년의 통계에 의하면 현재 최소한 천 오백 개 이상의 나뉘어진 칸이 있다.
만일 교회 안에 파벌이 있어야 했다면 분명 하나님은 성경 안에서 이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회를 몸이라고 알려주셨다. 몸은 하나요 모든 지체들은 이 몸에 연결되어 있다. 심지어 기계 한 대나 자동차 한 대도 이렇게 되어 있다. 그렇다. 오늘날 수많은 종파들이 연합하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연합의 범위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를 지적하고 싶다.
D. 몸은 단체를 단위로 할 수 없다
성경 안에서는 몸을 거처로 나누었기 때문에 지체가 몸의 단위이다. 몸의 단위는 바로 거처이다. 오늘 연합 교회를 조직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보았지만 몸의 교통을 받아들이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기를 꺼린다. 그들도 그리스도의 몸을 주의하지만 그들이 말한 몸은 지체를 단위로 한 것이 아니라 단체를 단위로 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교통의 단위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연합하여 몸을 이룬다. 그러나 오늘날 연합 교회는 어떠한 회(會)를 단위로 삼는다. 바꾸어 말해서 가령 오늘 세계적으로 오천 개의 교파가 있다면 그들은 몸에 오천 개의 단위가 있음을 시인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이러한 상황이 단체적인 교통으로 변했다.
성경 안에서의 교통은 개개인 그리스도인을 단위로 한다. 당신도 믿는이요 나도 믿는이이기 때문에 서로 교통을 갖는 것이다. 그도 믿는이요 당신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서로 교통을 갖는다. 이 교통은 일대 일의 교통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은 믿는이들을 연합하여 어떤 회를 이루고 또 이 많은 회들을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 이것은 몸의 교통 외에 추가된 어떤 것이다.
E. 연합 교회는 육을 위한 여지를 남겨 두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함으로써 이 땅 위에 그분의 몸을 표현해낸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은 의견과 신앙이 같고 관점이 같거나 존경하는 것이 같은 사람들을 연합하여 먼저 어떤 회를 형성하고 그런 다음 다시 이 회들을 연합시킨다. 이렇게 하는 것은 먼저 사람의 뜻에 따라 나눈 다음 다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양쪽을 다 만족시킨다! 즉 육적인 종파가 존재하게 하고 그리스도인의 하나에도 이르게 한다. 이것이 연합 교회임을 보았는가? 내가 다시 강하게 말하거니와, 이렇게 하는 것은 육(肉)을 위한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종파가 육체의 행위임을 보여 주셨다.
형제 자매들이여! 굳이 종파로 가서 찾지 않아도 종파는 육의 행위이다. 당신과 나에게서 종파가 육의 행위라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서만 육의 행위를 찾아낸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가? 사람은 누구나 남과 다른 파벌을 갖기를 좋아하고 자기 뜻만 좇고 다른 형제 자매들과 합하지 못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면으로는 종파로 나누려고 하면서 또 한면으로는 같이 연합하려고 한다. 이것은 완전히 모순이다! 그들은 종파를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종파를 보존하려고 한다. 그러나 종파를 보존할 때 그들 양심에 평강이 없으므로 연합 교회를 갖는 것이다. 이것은 먼저 몸을 나눈 다음에 다시 그것을 연합시키는 것이다.
F. 연합 교회는 불안한 양심에서 나온 산물이다
몸을 먼저 종파로 나눈 다음 종파를 다시 합하는 것은 더이상 몸이 아니다! 나누고나서 다시 합하는 것은 연합 교회이지 몸이 아니다. 결코 사람을 몇 토막으로 나눈 다음 다시 합하면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생명을 잃었기 때문에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수 백개의 종파로 나눈 다음 종파들을 다시 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연합 교회의 연합일 뿐 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수많은 종파로 나누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합할 때 몸이요, 나뉘어질 때 지체이고, 지체와 몸 사이에 중간 조직이 없다는 것밖에 모른다. 많은 지체들을 여러 단체로 나눈 다음 그 여러 단체를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다! 오늘날 이런 연합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사람의 조직이요 불안한 양심에서 나온 산물이다.
Ⅵ. 하나를 지키는 길
그러면 대체 이 하나를 어떻게 지키는가? 가령 오늘 복주에 있는 교회 안에 믿지 않는 사람들도 포함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파벌이라 부른다. 당신은 거기를 떠나야 한다. 어떤 단체는 다 믿는 사람들이지만 거기에도 파벌이 있다면 당신은 거기에서도 떠나야 한다. 이 외에 또 어떤 사람들은 종파들을 연합하여 연합 교회를 이룬다. 당신은 이것이 육의 행위인 것을 알기 때문에 거기서 떠나야 한다.
A. 그리스도의 몸의 위치에 서 있어야 한다
오늘 복주에 교회가 있으려면 그 교회의 범위는 그리스도의 몸만큼 커야 한다. 사람들이 이것을 원하든 원치 않든 그것은 사람의 문제이다. 사람들이 이 길을 가든 안가든 그것도 역시 사람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충성을 다하여 종파가 없는 위치에 굳게 서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불신자를 포함시키지 않고 연합 교회로 몸을 대신하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서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의 범위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길이다. 또한 이것이 각처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유일한 길이다.
여러분은 자신들이 어떤 위치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여러분은 종파를 가질 수 없고 파벌도 가질 수 없으며 믿지 않는 자들과 섞여져 있을 수도 없으며 연합 교회로 그리스도의 몸을 대신할 수도 없다. 연합 교회의 위치는 우리에게 비춤만 있고 순종할 능력이 없는 것을 보여 준다. 연합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연합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어도 그것을 지키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합 교회는 도중의 정자를 대표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른 위치에 두셨는데 이 위치는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이 마땅히 함께 모여야 할 위치이다. 그런데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위치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B.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집임을 시인한다
우리는 종파나 국교회나 연합교회 안에도 우리 형제 자매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만일 그들이 충성스럽다면 그들은 집으로 돌아와서 우리와 함께 몸의 위치에 서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그들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 놓지만 우리 자신들이 우리의 위치에 서 있지 않아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상황은 어떤가? 마치 한 가정의 어린 두 동생이 밖으로 뛰쳐나가 유괴범에게 유괴당한 것과 같다. 당신은 어린 동생들이 유괴되었다고 해서 이 가정을 해산시키자고 말할 수 없다. 이 가정에는 부모가 있고 형들과 언니들이 있기 때문에 해산될 수 없다. 그러나 어린 동생들이 유괴됨으로써 집안 전체가 불안하게 될 것이다.
유괴범에게 유괴당한 동생들이 밖에 있을 때 집안에서 형뻘 되는 사람들은 마음이 넓어야 한다. 그들이 유괴되었다 해서 그들을 집안에 못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향해 마음과 문을 열어놓기를 배워야 한다. 언제든지 그들이 돌아올 때에는 집에 들어오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자. 오늘날에는 일시적으로 집에 돌아오는 것이지만 장래에는 영원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유리하는 생활이 이미 오래 되었을지라도 우리는 이것이 가정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집을 나갔다 해서, 문을 걸어 잠그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파일에 유의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교회의 문이 닫혔고 교회가 해산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해산될 수 없고 문을 걸어 잠글 수 없다. 오늘날 우리들은 최선을 다해 이 간증을 지켜야 한다. 우리 아버지와 우리의 주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면 충분하다! 두세 형제나 너댓 형제들이 있어도 충분하다. 이보다 수(數)가 훨씬 많은 지방에서야 말해 무엇하랴!
C. 겸손하고, 교만한 마음을 갖지 않기를 배움
그러나 우리에게 집이 있다고 해서 결코 어떤 형제 자매들을 그냥 밖에 내버려 두겠다고 교만하게 말하지 말라. 만일 우리에게 이 집의 몇몇을 잃었다는 느낌이 없다면 우리가 소유한 집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일 한 형제나 자매라도 교파 안에서 유리하고 있다면 이것은 마음 아픈 일이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한면으로 우리의 위치를 보존하고 지키면서도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어찌하든지 우리는 그 위치에 서 있고 그 위치에서 계속 나아가야 하지만, 우리가 곧 집이라는 것으로 만족하여 교만한 마음으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이 집의 많은 사람들이 밖에 유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겸손하여 그들을 위해 간구하기를 배워야 한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그들을 향하여 문을 항상 열어 놓아야 한다. 그들이 영원히 돌아오든 잠시 돌아오든 다 좋게 보아야 하고 우리는 다만 그 집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오늘날에는 교회가 없다는 착각에 결코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그럴 수 없다!
Ⅶ. 합일의 근거는 심판에 있다
마지막으로, 몸의 합일은 단지 그리스도인의 합일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하나이자 하나님의 임재임을 기억하라.
A.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온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는 곧 심판의 임재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그분이 임재하지 않으면 심판이 발생하지 않지만 그분이 임재하실 때 곧 심판이 발생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의 하나를 지키려면 하나님의 임재를 지켜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가 곧 심판이자 율법이다. 잘못된 것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으시면 그냥 넘어가실 것이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죄를 조금도 용납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죄가 있는데 교회가 죄를 포용한다면 결코 하나를 지킬 수 없다.
B. 죄악을 버리는 것이 합일의 근거이다
나는 형제 자매들이 합일의 근거가 무엇인지 보기 원한다. 이것은 매우 간단하다. 합일의 근거는 바로 죄악을 떠나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누어진 이유는 많은 죄의 문제에 있음을 기억하라. 항상 죄악의 문제가 있다. 그들 가운데 죄가 있기 때문에 분열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이 인내와 포용을 합일의 근거라고 생각하는 기본적인 오해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성경은 인내나 포용을 합일의 근거로 삼은 적이 없음을 기억하라. 성경은 죄악을 버리는 것을 합일의 근거로 삼는다.
오늘 누구든지 하나님과 교통을 가지려면 빛 가운데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빛 가운데 있다면 서로 교통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교통은 합일의 근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교통의 근거는 죄를 처리하고 죄를 제하는 데 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 있다면 서로 교통을 갖게 된다. 빛 가운데 있지 않으면 우리는 교통할 길이 없다.
고린도 후서 6장은 우리가 저들 가운데서 나오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나님이 우리와 교통하시는 것은 우리가 저들 가운데에서 나오는 것에 근거한다. 당신은 결코 안정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실패이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될 수 있는가? 자신을 깨끗케 하고 천한 일들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다. 사람이 천한 일들에서 벗어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될 수 있다. 무릇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불의를 떠나야 하고 불의를 떠난 사람만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만일 사람이 자신을 깨끗케 할 수 있다면 그는 귀히 쓰는 그릇이 될 수 있다. 귀히 쓰는 그릇이 된 사람만이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을 수 있다. 오직 칼을 뽑아서 하나님 편에 서서 자기 형제를 죽이기로 결심한 사람만이 레위인이 될 수 있다.
C. 하나를 지키는 데에는 대가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합일의 범위가 지켜진다. 결코 사랑이 크고 관용함이 있으면 하나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렇지 않다. 합일의 근거는 죄를 제하는 것이다. 무릇 그리스도인의 하나를 범하는 것은 다 제해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될 수 없는 것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죄를 충분히 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내와 사랑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아무 소용 없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눈이 열려서 몸과 교회의 범위와 그리스도인의 하나를 보았는데 이들은 조금도 사람의 감정이나 사람의 참음에 갇히지 않고 계속 주를 좇아 전진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전진하지 못할 때에는 나온 사람들을 나무라지 말고 당신의 눈이 밝지 못하고 순수하지 못함을 나무라야 한다. 누구든지 기꺼이 죄악에서 벗어나 불의를 버리고 천한 것들을 버리며 형제의 인정을 저버리고 즐겨 몸의 위치에 서기를 원한다면 그는 보게 될 것이다.
오늘날 중요한 것은 누가 인정으로 당신을 감싸거나 합일을 당신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대가를 지불하여 불의를 떠나 그리스도의 몸을 보고 기꺼이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럴 때 당신은 그들과 하나될 수 있다. 이 하나의 근거는 불의를 버리는 데 있다. 이 하나의 근거는 불의를 포용하고 너그럽게 봐 주는 데 있지 않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많은 불의와 죄를 범하고 많은 거스림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충성스럽고 기꺼이 순종한다면 몸을 본 사람과 하나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다른 종류의 하나를 지키려 한다면 그 죄에 더럽혀지고 불의에 참여하게 되고 자동적으로 그들과 하나될 것이다.
D. 모두가 일어나서 죄를 심판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 된다
많은 사람들은 나간 사람들에게 포용심과 사랑과 인내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아니다. 사실은 나간 사람에게 인내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순종이 부족한 것이다. 나간 사람에게 사랑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얻은 비춤이 부족한 것이다. 나간 사람들의 마음이 강팍한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이지 못한 것이다.
만일 모든 형제 자매들이 다 일어나서 죄를 심판한다면 그리스도인의 교통은 하나일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일어나 죄를 심판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하나가 있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당신은 몸의 하나를 보게 될 것이다. 육체와 종파와 분쟁이 자동적으로 제거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될 것이다.
합일의 근거는 죄를 용납하는 데 있지 않고 죄를 심판하는 데 있다. 죄를 심판하는 사람과 심판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되기는 불가능하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되기를 구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죄를 심판해야 한다. 그들은 죄를 심판하는데 당신은 심판하지 않는다면 어찌 하나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간 사람이 틀린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사람이 틀린 것이다. 죄를 심판한 사람이 옳다. 죄를 심판한 사람은 세상에서 죄를 심판한 모든 사람들과 하나인 것이다. 죄를 심판하지 않는 사람이 일어나서 죄를 심판하도록 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있기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모든 조직과 방법과 단체와 종파 밖에서만 하나될 수 있음을 보아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몸만이 하나님의 자녀의 합일의 범위인 것이다.
워치만 니
[그리스도인의 50 필수과정, "합일",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