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말씀을 누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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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옛 역사는 십자가에서 끝났고 우리의 새 역사는 부활로부터 시작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십자가는 첫번째 창조를 끝냈고 죽음에서 나온 것은 그리스도 안의 새 창조인 둘째 사람이다. 만일 우리가 아담 안에 있다면 아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전해진다. 이것은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아담 안에 있는 것을 소유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성질을 내거나 다른 죄를 범하는 데는 결심할 필요가 없이 저절로 우리에게서 나오고 우리의 원함의 여부를 묻지 않는 것과 같다. 같은 원칙으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 안의 모든 것도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고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이 다만 믿으면 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졌다는 말은 참되지만 좀 실제적이지 못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실제가 되는가? 어떻게 해야 우리의 체험에서 참이 될 수 있는가?

 

로마서 6, 7, 8장을 읽을 때, 우리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네 가지 조건을 발견할 것이다. (1)앎 (2)여김 (3)자신을 하나님께 드림 (4)영 안에서 행함이다. 이것이 네 가지 조건의 정확한 배열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생활을 하려면 이 네 가지 절차를 완전히 취해야 한다. 한 가지나 두 세 가지가 아니라 네 가지를 모두 취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모든 절차를 자세히 보기로 하자.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의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혀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도움을 얻기 위해 첫 단계를 보기로 하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제 우리 앞에 로마서 6장 1절부터 11절의 말씀이 있다. 이 말씀들은 주 예수님의 죽음이 대표적이고 포괄적인 것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그분의 죽음 안에서 우리도 죽었다. 이 점을 보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진보를 갖지 못한다. 십자가 상에서 그분이 우리 죄를 짊어졌다는 것을 보지 못한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이 만일 십자가 상에서 그분이 우리를 짊어진 것을 보지 못했다면 우린 결코 거룩케 될 수 없다. 우리의 죄가 그분에게 돌아갔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그분 안으로 넣어졌다.

 

당신은 어떻게 죄 사함을 얻었는가? 주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당신의 죄를 감당하시고 당신의 대치물이 되셨으며 당신의 더러움을 씻기 위해 피흘리신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닌가? 당신의 죄가 십자가로 가져가졌다는 것을 보았다면 또 무엇을 하겠는가? 당신은 『주 예수님, 내 죄를 위해 죽어주십시오.』라고 말하겠는가? 아니다. 당신은 기도할 필요가 없다. 주님께 감사하기만 하면 된다. 그분이 이미 당신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께 당신을 위해 죽어달라고 구할 필요가 없다.

 

죄 사함을 어떻게 받았으면 해방도 그러하다. 모든 역사가 이미 완성되었다.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지 않고 다만 찬미하면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십자가 상에 못 박히실 때 우리도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여, 나는 매우 사악한 사람이오니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주소서.』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구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당신의 죄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면 왜 또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기도하는가? 당신의 죄가 이미 그분의 피로 처리되었고 당신 자신도 이미 그분의 십자가로 처리되었다. 이것은 이미 완성된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 당신도 죽었고, 그분 안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만 주님을 찬양하면 된다. 이 일을 인하여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의 빛 안에 살아야 한다.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시 106:12).

 

당신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는가? 물론 당신은 믿을 것이다. 성경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다고 말한다.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롬 6:6). 이것은 첫번째 설명으로서 매우 분명하다. 성경은 또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롬 6:6),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롬 6:8)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우리 옛사람이 어느 날 못 박혔는가? 어제인가, 오늘인가? 아니면 내일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바울의 말을 거꾸로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옛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 모임에 참석할 때 나는 여러분이 둘씩 둘씩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여러분이 같이 왔다면 『나의 친구가 나와 함께 왔다.』고도 말할 수 있고 또는 『내가 내 친구와 함께 왔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만일 여러분 중 한 사람은 삼 일 전에 오고 다른 한 사람은 오늘 왔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만일 여러분이 함께 왔다면 어떻게 말해도 옳다. 이는 두 가지 말이 모두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사실로 말한다면, 우리는 공경하는 말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저도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혹은 『제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리스도도 함께 못 박히셨습니다.』

 

이 두 가지 표현은 모두 정확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두 가지의 역사적 사실이 아닌 한 가지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주: 로마서 6장 6절의 「예수와 함께」라는 어구에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교리적인 의미도 있다.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말씀은 순서를 거꾸로 하여 인용할 수 있다.)고 말할 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적이 있는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어찌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을 수 있는가? 그분이 약 이천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내가 그분과 함께 죽었다면, 나는 내일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이 과거의 사건이라면 내가 지금이나 장래에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는가?

 

주님을 찬미하자.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그분과 함께 죽었다. 십자가 상에서의 그분의 죽음은 나를 대신한 죽음만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죽음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죽었고 나도 죽은 것이다. 내가 주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믿었다면, 나는 그분의 죽으신 것의 귀함을 믿는 것같이 내 자신도 죽었다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

 

당신은 왜 주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가? 당신이 믿는 근거는 무엇인가? 당신은 그분이 죽은 것을 느낄 수 있는가? 당신이 느껴보았으리라고 믿지 않는다. 당신이 주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해주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두 강도가 동시에 함께 못 박혔다. 성경이 이것을 분명히 말해주기 때문에 당신은 그들이 함께 못 박힌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당신이 주 예수님의 죽으신 것을 믿고 두 강도가 동시에 못 박힌 것을 믿었다면, 당신 자신이 죽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어떠한가? 당신이 함께 못박힌 사실은 두 강도가 동시에 못 박힌 것보다 더욱 친밀하다. 그들은 주님과 동시에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다른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나 당신은 주님과 함께 동일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는 그분이 죽으실 때 당신이 그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당신은 이 사실을 알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느낌과 관계 없다. 당신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을 느끼든 느끼지 않든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은 사실이다. 같은 원칙으로 당신이 이미 죽은 것을 느끼든 느끼지 않든 당신이 죽은 것도 확실하다. 이것들은 거룩한 사실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사실이고 두 강도가 죽은 것도 사실이며 당신이 죽은 것도 사실이다. 내가 말하지만 당신은 이미 죽었다! 당신은 이미 제거되었다! 당신은 이미 버린 바 되었다. 당신이 싫어하는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위에 있다.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났다』(롬 6:7).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위한 복음이다.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서 결코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효능있게 할 수 없다. 오직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을 받아들일 때만이 유효하다. 우리 눈이 열려서 갈보리에서 주님이 완성하신 일들을 보아야 한다. 구원받기 전 어떤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구원해 보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예배당에 가고 구제한다. 그러나 어느 날 당신의 눈이 열려서 십자가 상에서 주님이 당신을 위해 예비하신 완전한 구속을 보고 그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럴 때 평강과 기쁨이 당신 마음에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구속이 성화와 동일한 기초 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죄에서 해방받는 길과 죄사함을 얻는 길은 똑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방법은 사람의 방법과 완전히 다르다. 사람의 방법은 죄를 이김으로써 죄를 억누르는 것이나 하나님의 방법은 죄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약함을 인해 비통해하고 그들이 조금 더 강하면 모든 게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이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약하고 무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므로 자신에게 더 많은 요구를 한다. 이것은 잘못된 관념이다. 만일 우리가 죄의 능력과 우리의 무력함을 이기려 한다면, 우리에게 이미 선입관이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죄를 이기기 위해 더 많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종종 『내가 조금 더 강하면 내 거친 성질을 극복할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강건케 하시어 더 자제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점점 강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죄로부터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점점 약하게 하심으로써 구출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이 기이한 승리의 방법이라고 말하겠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이렇다. 하나님이 죄의 억압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은 우리 옛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을 못 박는 것이다. 옛사람을 도와서 무엇을 하지 않고 도리어 옛사람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구출하신다.

 

어쩌면 수년 동안 당신은 자신을 제어하려고 시도했으나 아무런 결과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당신은 이런 노력 안에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진리를 보았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하든지 자신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을 시인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이미 당신을 완전히 한쪽에 제쳐 놓으시고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으셨다. 이런 계시는 사람의 노력을 멈추게 한다.


제 일보 : 「앎」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확실한 앎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은 진리에 관한 것을 알거나 중요한 교리를 깨닫는 것만이 아니다. 이 확실한 앎은 학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마음 눈이 밝아짐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보는 것이다.

 

당신의 죄가 사함받은 것을 어떻게 아는가? 전도사가 이것을 당신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당신은 그냥 당신의 죄가 사함받은 것을 알 뿐이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그냥 알게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 곧 주님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다. 물론 죄 사함을 받는 이 일은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쓰여진 그분의 말씀이 그분께서 당신에게 하신 말씀이 되게 하려고 당신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신다(엡 1:17).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지혜와 계시의 영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되 항상 이런 자세를 갖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렇게 한다면 마음 속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질 때가 바로 영 안에서 무언가를 볼 때이다. 빛이 당신의 마음을 비출 때 당신은 완전히 믿게 된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죄 사함과 원칙상 완전히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빛이 당신의 마음에 비췰 때, 당신은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누가 그것을 당신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나 로마서 6장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그분의 영으로 당신에게 계시해주었기 때문이다. 혹 당신이 그 일에 대해 아무 느낌이 없고 이해가 안 될지라도 당신은 이미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안다. 일단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보았다면 어떤 일도 축복을 받은 사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요동케 하지 못한다.

 

만일 당신이 이미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들어선 성도에게 어떻게 그런 체험에 들어 갔느냐고 묻는다면, 이 사람은 이렇게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할 것이다. 사람마다 다 자기의 특이한 방법을 강조하고 또한 자기의 체험을 옹호할 성경 말씀을 인용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자기의 특별한 체험과 성경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그리스도인은 더 깊은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 각기 다른 방법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강조하는 체험 혹은 진리가 서로 상충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서로 보완된다고 말해야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가치가 있는 체험은 주 예수의 인격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결정적이고도 안전한 시험인 것이다.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에서 바울은 모든 일을 다음의 발견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즉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앎의 요건인 하나님의 계시

 

그러므로 첫 단계로, 우리는 계시에서 비롯된 앎을 하나님에게서 구해야 한다. 이 계시는 우리 자신에 대한 계시가 아니라 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신 역사에 관한 것이다. 내지 선교회의 발기인인 허드슨 테일러 형제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들어설 때 이런 것을 체험했다. 여러분은 그가 항상 한 가지 문제 즉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어떻게 포도나무로부터 진액을 흡수하느냐 하는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당했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는 그의 안에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이 얻었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필요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1896년, 그는 진강(鎭江)에서 누님에게 편지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있기만 하면 모든 것이 좋아지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이 그 안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드디어 어느 날 빛과 계시가 그에게 임하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나는 비결이 여기 있다고 느꼈습니다! 즉 내가 포도나무로부터 진액을 내 안으로 흡수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다만 주 예수님이 포도나무이심을 기억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뿌리요 줄기요 작은 가지이며, 잎사귀요 꽃이요 과실이며 모든 것 되십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그를 도와 주었던 한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는 내 자신을 지체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주 예수님은 내가 가지이고 그분의 한 부분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믿고 그대로 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오래 전부터 제가 그것을 읽었었지만 지금에서야 이것이 살아 있는 실제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래부터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개인에게 이것은 새로운 노정에서 참된 체험이 되었다. 다시 그는 누님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내가 얼마나 그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별 신기하거나 특이 한 것은 아니나 지금 나에게는 모두 새로운 것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전에 나는 눈 먼 자였으나 이제는 친히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고-또한 그와 함께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도 이렇게 나 자신을 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분이 나를 제일 잘 아십니다. 아, 이 진리를 보는 것이 어떠한 기쁨인지!-주님이 누님의 마음 눈을 밝히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값없이 얻는 풍성을 얻고 누리기를 구합니다.』

 

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생각해 보라. 만일 당신이 이미 방 안에 있는데 방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주님께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넣어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그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더 많은 계시를 얻었다면 간구 대신 찬미를 더 많이 할 것이다. 우리가 많은 간구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미 완성하신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상해에 있을 때 어느 날 자기의 영적 상태에 대해 어려움을 겪는 한 형제와 대화를 가진 적이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성도의 생활을 하기 원하는데 나는 정말 부끄럽기만 합니다. 나는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조금도 그리스도인답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이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과 이 부활의 생명을 알고자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이것을 알지 못하고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그 때 어떤 형제가 우리와 자리를 같이 했다. 우리 둘이서 거의 두 시간 가량을 소비하여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간구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에게, 『그리스도께서 이미 모든 것을 주셨는데 어찌 달라고 간구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그분이 아직 저에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는 제가 아직도 화를 내고 끊임없이 화를 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더 많이 간구해야 합니다.』라고 답변했다. 우리는 묻기를, 『당신이 구한 것 중 얻은 것이 있습니까?』라고 했다. 그는 답변하기를, 『저는 참 괴롭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저는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때 우리는 칭의에 있어서 그가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 것처럼 성화에 있어서도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바로 그때 주님께 크게 쓰임받는 한 형제가 들어와 우리의 대화에 참예했다. 상 위에 보온병이 있었는데, 이 형제가 그 병을 들더니 그에게,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보온병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 보온병이 기도할 줄 알아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주여, 내게 은혜를 주사 나로 보온병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이런 기도를 들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의 친구가 답하기를, 『제 생각에 보온병은 결코 그렇게 어리석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보온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보온병과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찌기 당신을 그리스도 안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셨을 때 당신도 죽었고 그분이 죽음에서 부활하셨을 때 당신도 부활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나는 죽어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부활 생명을 소유해야 한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이미 죽었고 이미 새 생명을 소유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모든 간구는 마치 보온병의 기도처럼 우습습니다. 당신은 주님께 무엇을 구할 필요 없이 다만 눈을 떠서 그분께서 이미 이루신 모든 것을 보면 됩니다.』

 

관건은 바로 여기에 있다. 원래 우리는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죽을 방법을 생각해낼 필요가 없고 죽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우리는 주님이 이미 이루신 일들을 알고 그분을 찬미하기만 하면 된다. 주님은 어두움을 드러내는 빛과 같이 이 말로 그의 눈을 열어주셨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주여, 당신을 찬미합니다. 당신이 이미 나를 그리스도 안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분의 모든 것은 나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계시를 얻고 확신을 갖게 되었다. 오, 만일 이후로 그 형제를 만나볼 수 있다면 당신은 그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발견했을 것이다.


우리 문제의 근원을 만진 십자가

 

나는 당신에게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들의 기본 성질을 일깨워 주겠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지나치게 말했다고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보아야만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의 예를 들겠다. 가령 우리 정부가 술 문제를 엄격히 처리하기 위해 전국에 금주령을 내렸다 하자. 내가 묻겠는데 이런 결정을 어떻게 집행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각지로 가서 점포마다 수색하여 술병을 발견하는 즉시 깨뜨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비록 이렇게 하는 것이 각지에 있는 술병 속의 술을 다 제거할 수 있지만 그 술병 뒤에는 술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있는 것이다. 만일 술병만 처리하고 술공장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술이 계속 생산되기 때문에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만일 술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려면 전국에 있는 술공장의 문을 닫아야 한다.

 

비유로 말한다면, 우리는 공장이고 우리의 행위는 생산품이다. 주 예수님의 피는 생산품의 문제 곧 우리의 범죄를 처리한다. 그리하여 우리 행함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나님이 여기서 멈추시겠는가? 우리의 어떠함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의 죄의 행위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죄들은 이미 처리되었지만 우리 자신은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가? 당신은 주님이 우리의 모든 범죄를 깨끗이 씻으셨는데 우리 스스로 범죄의 공장을 제거하라고 하신다고 믿는가? 그분이 산출된 생산품만 가져가시고 우리 스스로 생산품의 근원을 처리하라고 하시겠는가?

 

이런 질문은 이 문제에 대해 자동적으로 답이 되는 것 같다. 주님은 결코 일을 절반만 하시고 나머지를 남겨두지 않으신다. 그분은 생산품들을 제거하셨고 또한 생산품을 산출하는 공장도 깨끗이 청산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신 역사는 실로 우리 문제의 근원을 만지고 처리하셨다. 하나님은 결코 일을 절반만 하지 않으신다.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고 말한다. 이것은 알아야 하는 사실이나, 당신은 알고 있는가? 만일 당신이 그래도 모른다면 『알지 못하느냐?』(롬 6:3)는 말씀을 주의하라. 우리의 눈이 열리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워치만 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성장하는 길-앎",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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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합일 청지기 12.05.03.11:48 4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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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예수의 인성의 풍성한 공급 청지기 12.05.03.10:38 3050
159 소제의 향료들 청지기 12.05.03.10:32 3371
158 하나님의 요구들과 하나님의 양식 청지기 12.05.02.13:49 2658
157 회막과 모든 제물들 청지기 12.05.02.13:37 3206
156 생명의 성장이란 무엇인가 청지기 12.05.02.13:34 2948
155 세 가지 생명과 네 가지 법 청지기 12.05.02.13:28 3036
154 영과 혼의 분별 청지기 12.05.02.13:19 4606
153 부모 청지기 12.04.30.18:32 3690
152 부부 청지기 12.04.30.18:21 3273
151 청지기 12.04.30.18:12 2628
150 금욕주의 2 청지기 12.04.30.18:04 2879
149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목적을 이루는 집회 청지기 12.04.24.11:01 2325
148 그리스도의 승리로 그분을 전람하는 집회 청지기 12.04.24.10:54 2281
147 영의 정상적인 상태 청지기 12.04.24.10:37 2609
146 생각으로 영을 보조하는 원칙 청지기 12.04.24.10:29 2022
145 영의 법칙들 청지기 12.04.23.19:55 2563
144 영적 노정의 위험 청지기 12.04.23.18:43 1822
143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성장하는 길-여김 청지기 12.04.23.18:26 2059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성장하는 길-앎 청지기 12.04.21.14:31 2105
141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그리스도의 십자가 청지기 12.04.21.14:26 2110
140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그리스도의 피 청지기 12.04.21.14:19 1959
139 속 부분과 감추인 부분을 파 내기 청지기 12.04.20.14:10 1280
138 혼의 처리 청지기 12.04.20.14:06 1201
137 마음과 영의 처리 청지기 12.04.20.13:57 1156
136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 청지기 12.04.20.13:53 1236
135 애정(affection) 청지기 12.04.20.13:50 994
134 부활 후의 십자가의 부르심(2) 청지기 12.04.20.13:45 1023
133 부활 후의 십자가의 부르심(1) 청지기 12.04.20.13:37 975
132 깊은 곳과 깊은 곳이 서로 부름 청지기 12.04.20.11:21 1065
131 신언하기를 실행함 청지기 12.04.20.11:13 10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