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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우리는 계속해서 어떻게 소그룹집회를 실행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자. 새 길의 유기적인 실행에 따르면, 소그룹집회는 유기적이어야 한다. 무엇이 유기적인 것인가를 보이기 위하여, 나는 먼저 여러분에게 유기적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청사진을 보여주겠다.
유기적이 아닌 방법은 예배하는 방법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틀에 박힌 종교적인 일련의 형식은 좋지 않다. 기독교의 집회, 특히 주일날 예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리 정해진 순서와 프로그램에 따른다. 집회 전에 미리 준비해 둔 인쇄된 프로그램을 모든 참석자들에게 나누어준다. 그 안에는 찬송을 인도하는 사람과 기도하는 사람과 성경을 읽는 사람과 설교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 모든 활동은 훈련된 전문가들에 의해서 실행된다. 청중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그들은 다만 거기에 앉아 있다. 수고할 필요가 없으므로 모든 사람의 어려움이 덜어진다. 이러한 예배는 빛 비춤이나 공급을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세움이나 온전케 함을 줄 수 없다. 하물며 교회 건축은 있을 수도 없다. 이것은 헛된 예배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신약 경륜을 해친다.
그러면 예배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 유기적이 되는 것은 예배와 반대된다. 소그룹집회는 유기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예배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늘까지 적어도 절반 이상의 소그룹이 여전히 유기적인 방법보다는 예배하는 방법 안에 있다.
대부분의 소그룹집회에는 정해진 시작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와서 앉는다. 그들은 시계와 인도하는 형제를 쳐다본다. 잠시 후에 어떤 형제가 찬송을 선택한다. 그리고서 몇몇이 기도한다. 기도 후에 모든 사람이 다시 서로 기다린다. 조금 있다가 어떤 사람이 마지 못해 말하기 시작한다. 어느 시점에서 한 형제가 이제부터는 교통할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때서야 모든 사람이 조금씩 교제한다.
결국 모든 집회가 같은 형태를 따른다. 비록 순서는 정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모든 것에 대한 프로그램이 있다. 차이점은 다만 인쇄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비록 기도와 교통과 서로 돌봄과 진리를 배움과 생명 안의 비춤이 있지만, 그 방법은 여전히 예배하는 방법이다. 거기에 유기적인 맛이 결여되었다. 유기적인 맛이 있다 해도 매우 약하다.
예배를 거절하고 모든 사람이 기능을 발휘함
참된 소그룹은 유기적인 것이다. 그것은 예배가 아니다. 유기적으로 말해서, 소그룹집회는 적어도 우리의 집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집에서부터 우리는 기도하기 시작한다. 오는 길에서 우리는 기뻐하고 찬양한다. 이것은 마치 시편 기자가, 사람들이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기뻐했다고 말한 것과 같다(시122:1).
우리가 집회 장소에 도착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이미 왔는가를 관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순히 기도하고 찬양하기 시작한다. 다른 형제 자매가 들어오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동참한다. 또 어떤 사람은 간증을 하거나 진리에 관한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교통 안에 서로 중재하거나 돌보는 가운데 내어놓을 문제를 가지고 올 수도 있다.
이러한 집회는 정해진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모든 것이 유기적이다. 이 집회에서는 어떠한 질문도 할 수 있다. 대답은 어떤 전문가가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참석자가 배우는 사람이며 동시에 모든 참석자가 또한 선생이다. 말하는 분량은 그가 가진 분량에 달려 있다. 그러나 모두가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그가 가진 조그만 분량을 내어놓아야 한다. 자신의 분량을 내놓을 때 누구도 긴 이야기를 하거나 너무 많은 시간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 어떤 질문이 생겼을 때 칠팔 명이 대답하고 마지막에 무게 있고 체험 있는 말씀이 있다면, 전체 소요 시간은 약 십 분 정도일 것이며, 그 질문은 완벽하게 다루어질 것이다. 만일 그 질문이 진리에 관한 것이라면, 모든 사람이 무언가를 배웠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생명에 관한 것이라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추구하도록 자극을 받을 것이다. 새 사람이 이러한 집회를 십 회 이상 참석한다면, 그 또한 적어도 삼 개월 내에 유기적이 될 것이다.
이러한 소그룹집회 안에서는 모든 참석자가 살아 있다.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 될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고 새 사람이 산출되고 질문들이 답해지고 진리가 가르쳐지고 상호 교통과 돌봄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한 소그룹집회 안에 모든 것이 있다. 그 내용은 만유를 포함한 것이다. 이 때문에 소그룹집회는 적어도 한 시간 반 이상이 소요되어야 한다. 만일 더 짧다면 그것은 좋은 집회가 아닐 것이다. 나는 소그룹집회가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약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일상 생활의 그림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결코 특이한 것이 아니다.
오늘 나는 주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삼 년 반 동안 사역하셨지만 한 번도 예배에 참석하신 일이 없다는 것을 크게 외치고 선포해야겠다. 그분은 결코 집회를 소집하지 않으셨다. 그보다 그분은 유기적인 방법으로 소그룹을 실행하셨다. 이 소그룹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포함한 열 두 사도로 구성되었다. 그분에게는 정해진 집회 날짜나 정해진 집회 시간이나 장소가 없었다.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길에서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셨다. 만일 당신이 유기적인 소그룹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주 예수님이 삼 년 반 동안 제자들과 함께 무엇을 하셨는가 보라. 그러면 당신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편의를 위해서, 우리의 집회는 합당한 날과 시각과 장소를 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의 요소를 가져와서는 안 된다. 예배를 하기 위하여 모이지 말고, 동시에 당신의 생활을 잊어버리라. 우리는 예배를 위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보려는 의도가 없이, 정해진 순서가 없이 함께 모일 때, 참석한 모든 형제 자매들은 그들 안에 있는 영적기능을 개발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매 집회마다 우리는 좋은 온전케 함을 받게 되고 은사를 개발하게 될 것이다(엡4:11-12). 마침내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과거에 낡은 집회 방식은 성령으로 하여금 성도들 안에 있는 은사들을 개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시게 했다. 동시에 그것은 성도들의 영적 기능을 말살했다. 그것은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집회 내내 입을 다물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앉아 있는 채 그들의 영적 은사를 개발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했다.
이제 우리는 새 길의 유기적인 실행을 하고 있다. 모든 기회가 모든 사람 앞에 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다. 모든 사람 안에는 무언가가 있다. 그들이 집회마다 말하는 한 조만간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다. 매번 우리는 이러한 유기적인 소그룹집회를 갖고, 모든 사람이 배우며 모든 사람이 가르친다. 당신이 나를 온전케 하고 내가 당신을 온전케 할 것이다. 마침내 모든 사람이 입을 열고, 모든 사람이 유용하게 될 것이다.
위트니스 리
[새 길의 유기적인 실행, p.42-46,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