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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 결과는 항상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냐에 달려 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어떤 것을 당신이 할 수 있지만 당신이 그것을 할 때 그것은 다르게 나타난다. 중국에 이러한 속담이 있다. 『어떤 일의 결과는 그것을 하는 사람에 달려 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방법을 모든 일에 대한 열쇠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사람이 방법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방법은 죽은 것이지만 사람은 살아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다만 어떤 특별한 방법만을 구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외에 어떤 특별한 사람이 필요하다.
영적인 일들에 있어서는 거의 「사람」이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이 바르지 않다면 방법이 아무리 옳을지라도 그것은 무익하다. 왜냐하면 영적인 일들이란 생명의 문제이며, 생명은 방법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은 다만 그 본질에 따라 그 자체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영적인 일들에 관한 한 사람은 방법에 해당된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봉사의 방법들을 가르치신 적은 드물다. 오히려 그분은 사람 그 자체를 다루셨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 하나님의 가장 큰 종이었던 모세를 생각해 보자. 그를 부르실 때나 그를 부르시기 이전에도 하나님이 그에게 봉사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말씀하셨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은 팔십 년 동안 모세의 존재를 다루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접촉하는 일에 있어서 사람이 방법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어떤 기도가 참인가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몇몇 기도의 원칙들을 말했다 하더라도 우리 「사람」이 잘못되었다면 우리는 다만 그 원칙들에 따라 기도하려고 할 뿐, 그 원칙들은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기를 배우기 원한다면 어떤 종류의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그처럼 방대한 제목이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몇 가지 중요한 원칙들만을 언급할 수 있다.
Ⅰ.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어야 함
어떤 사람이 그 사람 자신과 그의 갈망만을 찾을 줄 안다면, 그는 기도는 할지 모르지만 기도의 사람은 아니다. 기도의 사람이라면 온 우주 가운데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뜻만을 주의하고 이 외에 다른 갈망을 일체 갖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주 예수님이 지상에서 한 사람으로 사셨을 때 그분 안에서 이러한 특징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분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고 계셨을 때 그분의 죽음에 관해 하나님과 교통하시면서,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때 그분은 또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하나님께 세 번, 아버지의 뜻을 원하고 자신의 뜻을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흔히 우리는 어떤 사람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실 것을 부탁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한 갈망이 있다면, 그는 그의 갈망을 따라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그것을 이루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겟세마네에서 우리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한 분을 본다. 실제로 주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기도하고 있지만 나는 당신께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성취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우주 가운데 나 자신을 위해 아무 것도 찾지 않습니다. 나의 유일한 갈망은 당신이 번영하는 것이고 당신의 뜻이 수행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오직 당신과 당신의 뜻만을 원하는 그러한 사람입니다.』
또다시 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하기를 가르쳤던, 본이 되는 기도를 살펴보자. 그것은 동일한 원칙에 따른 것이다. 처음부터 그분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옵시고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게 하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마 6:9-10)라고 말씀하셨다. 이 기도의 말씀들은 그분의 내적 갈망이 무엇이었는가를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준다.
형제들이여, 우리가 다만 우리 자신의 생활과 사업과 가족만을 위해 기도할 줄 안다면 우리의 기도는 실로 부족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단순하고 순수하지 않으며 여전히 속에서 복잡하고 섞여 있다는 것, 즉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갈망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때로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까지 우리는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탐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갈망만을 원할 정도로 우리의 영과 우리의 마음이 아직 순수하게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기도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존재에 관한 한 우리는 기도의 사람이 아니다.
기도의 사람이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갈망을 위하여, 즉 하나님이 번영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번영이나 증가나 누림이나 성취를 찾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이다. 그는 하나님이 나아갈 길을 얻으시고, 그분의 뜻을 성취하시는 한 만족한다. 형제 자매들이여, 오직 그러한 사람만이 기도의 사람이다.
이러한 말이 새 신자들에게 다소 시기가 이르고 높은 것 같지만, 당신과 나는 처음부터 믿음을 갖고 새 신자들이 합당하게 기도의 훈련을 받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아침 식사 기도를 할 때에도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고 당신은 그들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오 하나님, 우리는 당신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라고 기도하지만, 우리의 기도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을 위해 살기 때문에 먹고 마십니다. 우리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을 위해 기도할 때에도,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당신을 위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누림과 번영을 원하지 않고, 오직 당신과 당신의 뜻을 원합니다.』
사업을 할 때와 가르칠 때와 다른 일들을 할 때에도 원칙은 동일하다. 당신은 하나님께 『오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이 사업을 축복하소서. 우리는 여기에서 이 사업이 번창하고 이익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왕국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원칙은 또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관리하고, 건축하는 데에도 적용된다. 어떤 사람은 때로 일할 때 어떤 타격을 겪고 나서 하나님 앞에서 슬픔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이러한 슬픔은 반드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며,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누구를 위해서 너는 슬프게 느끼느냐? 또한 누구를 위해서 너는 눈물을 흘리느냐?』라고 물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의 내적 동기가 순수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당신에게 여전히 자신의 갈망과 기대와 목표가 있음을 보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든지 우리는 하나님께 『오 하나님, 나는 이 문제를 당신을 위해서 또한 당신의 왕국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직 당신과 당신의 뜻을 주의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기도의 사람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시험을 치러야 하며 다루어져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 우리는 다만 어떤 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 통과되기를 그분께 부탁하고 있지만, 우리의 기도가 시험을 치르는 것이고,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깨닫는가?
우리는 우주 가운데 실제로 무엇을 구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하는가? 우리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익을 구하는가? 우리는 자신을 위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갈망을 성취하시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그분의 갈망을 성취하시기를 원하는가? 조만간에 우리는 각자가 우리의 기도 가운데 시험을 치러야 한다. 어떤 사람이 그러한 순수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많은 기도를 할지 모르지만, 그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별 가치가 없으며, 그는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하나님과 협력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으로 여겨질 수 없다.
Ⅱ. 하나님 안에 살고 항상 하나님과 교통을 갖는 사람이어야 함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스도인은 또한 하나님 안에서 살기를 배워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우리는 자주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물론 이러한 가르침은 아주 좋은 것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서 사람이 다만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또한 하나님 「안에서」사는 것이 필요함을 기억하기 바란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주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기도의 사람은 그분 안에 거하는 사람이어야 함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주님 앞에 사는 것은 분명히 좋은 것이지만, 당신과 주님이 여전히 둘일 수가 있다. 즉 주님은 주님이고 당신은 당신인 것이다. 당신이 주님 안에 살 때만이 당신은 그분과 하나 될 수 있다. 그때 당신은 주님께 『주여, 내가 여기에서 혼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나, 나와 주님이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만 내가 주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일 뿐 아니라, 훨씬 그 이상으로 내가 주님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과 연합된 사람이며, 주님과 하나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안에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당신은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이고, 주님의 일부분이 된 사람이다. 즉 당신과 주님이 하나 되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자주 예증을 사용한다. 가령 나에게 은행에 예금된 돈이 있어서 수표를 끊어서 그 수표에 내 이름을 서명하고 은행에서 돈을 찾으라고 어떤 형제에게 그 수표를 준다 하자. 그가 돈을 찾으러 갈 때, 그는 그 자신이 아닌 나를 대표한다. 은행의 출납계원이 돈을 지출할 때 그는 그 형제의 이름이 아닌 내 이름에 따라 돈을 지출한다. 그때 그 형제는 바로 나이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때,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그러므로 기도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 안에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요한복음 14장에서부터 16장에서 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분의 이름으로(안에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석 장에서 적어도 예닐곱 번 주님은 『내 이름으로(안에서)』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그분이 『내 안에 거하라』, 또한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주님 안에서 구하는 것은 그분의 이름으로(안에서)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것은 주님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것이며, 우리가 그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즉 주님과 우리가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주님과 연합된 사람들이고, 그분과 하나 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와같이 주님 안에 거하기 원한다면, 주님과의 교통이 끊어지는 순간이 없을 것이다. 전류의 흐름은 성경에서 언급된 교통을 예시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성경적인 교통이란 영 안에서의 흐름, 즉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 우리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서로 교통을 갖는 것이다. 합당한 기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은 항상 상호 교통, 상호 흐름을 갖는다. 즉 두 영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기도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하나님, 여기에 당신 안에 살고 영 안에서 당신과 함께 교통을 갖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크게 기도하든 소리를 내지 않고 기도하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있어야 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우리이지만, 우리 안에 움직이고 있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다. 그러한 사람이 주님과 교통을 갖는 사람이며, 기도의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고난들이 우리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형제 자매들이여, 당신이 기도하도록 재촉하는 고난들을 기다려야 한다면, 당신은 기도의 사람이 아니다. 합당한 기도의 사람은 고난이 올 때까지 기도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매일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과 끊임없는 교통을 갖기를 배운다. 이렇게 하여 그는 자연스럽게 속에서 기도의 영을 갖게 된다. 성령은 사람에게 하나님께 간구하게 하는 은혜를 주는 영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 안에 있는 그분은 분명히 사람으로 기도하게 하실 것이다.
주님과의 교통은 당신과 주님 사이에 어떤 장벽도 허용하지 않는다. 당신 속에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기를 꺼려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용서하기를 꺼려하는 이 생각이 당신과 주님 사이에 장벽이 될 것이다. 남아 있도록 허용된 장벽은 당신으로 하나님과 더욱 멀리 떨어져 있게 한다. 이 때문에 주님은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당신이 어떤 사람과도 문제가 있어서는 안 됨을 의미한다. 당신이 사람과 어떤 문제를 갖게 되면,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장벽이 생기고, 당신은 하나님 안에 거하고 그분과 교통을 갖는 사람이 될 수 없다.
나는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체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때로 그것은 반드시 큰 죄는 아니겠지만 우리가 처리하지 않으려는 어떤 죄 때문일 수도 있고, 우리가 끊으려고 하지 않는 어떤 선호나 매임 때문일 수도 있다. 이것은 즉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장벽들이 된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 빠지게 되면, 우리의 기도의 영은 식어진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고, 우리와 주님 사이의 교통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기도의 생명이 끊어졌을 때, 당신이 아무리 기도를 지어내려고 생각을 사용하고, 기도를 짜내려고 의지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은 소용 없는 일이다.
우리가 단지 세상을 조금만 사랑하고 세상과 은밀히 연합되기만 해도, 이것까지도 우리로 기도할 수 없게 할 것이다. 때로 우리 안에 교만과 자랑함과 과시함이 조금 있기 때문에 장벽이 생기게 된다. 혹은 순수하거나 단순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어떤 것을 갈망하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기도의 영을 죽이는, 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요인들이다.
당신이 기꺼이 죄들을 철저히 처리하고, 자신을 완전히 세상과 분별하고, 주님 앞에서 단순함을 추구하고, 주님의 영이 당신을 순수하게 하시도록 허락하고, 십자가가 당신 안에서 주님이 정죄하시는 모든 것을 죽이도록 허용한다면, 당신은 즉시 당신 안에 있는 기도의 영이 소생됨을 볼 것이다. 당신은 분명히 기도하는 것을 누릴 것이고, 기도하는 입맛을 가질 것이고, 힘 있게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순간 당신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과 교통을 갖는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기도의 생명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당신이 나에게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첫번째 기능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기능은 우리를 기도 안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당신이 성령에게 어떤 기회를 양보하고 그분께 조금이라도 순종할 때마다 필연적인 결과는 그분이 당신을 기도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반대로 당신이 조금이라도 그 영을 불순종하거나 소멸시킬 때마다 당신 안에 있는 기도는 즉시 그칠 것이고, 기도의 영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들이여, 당신이 기도의 사람이 되기 원한다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영이 안에서 기회를 갖는 사람이어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영 안에 있어야 하고 그분과 계속적인 교통을 가져야 한다. 즉 두 영이 서로 통해 흘러야 한다. 흐름이 클수록 당신에게 더 많은 기도가 있다. 당신이 방에서 기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신 안에 있는 영은 차 안에서나 길에서나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기도할 수 있을 정도로 흐름이 흐를 수 있다. 당신이 일어서서 말씀을 전할 때라도 말씀을 전하면서 동시에 기도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접하고 이야기할 때에도 그들을 대하면서 동시에 속으로 기도할 수 있다.
기도의 영은 기도의 법이다. 그것은 마치 위장에서 일어나는 소화 운동이 하나의 법인 것과 같다. 내가 말하고 있는 동안 내 위가 소화를 하고 있고, 내가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소화를 하고 있고, 내가 걷고 있는 동안에도 소화를 하고 있다. 내 위장에 문제가 없다면, 소화 운동은 위 안에서 법에 따라 계속될 것이다. 같은 원칙으로 우리의 영 안에도 기도의 법이 있다. 우리가 영 안에 살 때마다, 그 영이 우리 안에 지위를 가질 때마다, 우리는 영 안에 있는 기도의 법에 따라 기도를 계속할 것이다. 이러한 때 우리의 기도는 아주 자연스러울 것이다.
방문을 닫고 자신이 기도에 전념할 때만 그것을 기도로 여길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나는 이것이 필요함을 인정하지만, 기도의 사람에 관해 그 강조점은 그가 전적으로 자신을 기도에 바쳐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영이 그 사람 안에 기회를 갖도록 허락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의 영이 지위를 가질 때 그로 하여금 언제라도 기도하게 하는, 영 안에 기도의 법이 있다. 그가 겉으로 기도하고 있지 않을 때라도 그는 여전히 기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말씀을 공급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한 가지, 곧 한면으로 말씀을 공급하고 다른 한면으로 기도하는 것을 실행하기 바란다. 죄의 정욕이 있거나 우리 존재 안에 세상을 위해 보류된 것이 있다면, 밖으로 말씀을 공급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속에는 막는 것이 있다. 이러한 때에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즉시 우리의 말이 표면적이고, 공허하고, 죽어 있고, 신선하지 않음을 분간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말에 영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리가 밖으로 말하고 있는 동안 속에서 기도하고 영 안에서 교통을 갖고 있다면 전과 같은 말일지라도 전달될 때 사람들은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말하는 사람이 살아 있고 속에서 그 영을 접촉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가 말하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그가 밖으로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속에서 기도하고 있고, 하나님을 접촉하고 있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Ⅲ.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이어야 함
기도의 사람은 또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고 그분 앞에 전심으로 기다리는 사람이다. 기도의 공과를 잘 배운 사람은 누구든지 항상 먼저 하나님 앞에서 기다린 다음 서서히 기도 안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것은 시편에서 자주 언급된다. 『하나님을 기다리라.』 당신은 기도하러 올 때 성급하게 입을 열고 생각을 표현하고 느낌을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당신은 멈추고 당신의 생각과 느낌을 제쳐둠으로써 당신의 온 존재가 하나님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구약에 그러한 예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은 특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대접을 받으셨다. 그때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섬겼으며 그분께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떡과 송아지 요리를 잡수신 후 사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다. 그분이 떠나시려 할 때 아브라함은 전송하러 얼마쯤 그분과 함께 갔다. 하나님은 길을 멈추시고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고 말씀하셨다(창 18:17).
그때 하나님은 소돔을 심판하기 위해 땅에 오셔야 함을 밝히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즉시 하나님의 갈망을 이해했으며 소돔에 있지만 하나님께 속한 롯을 관심하심을 알았다. 그때 아브라함은 즉시 하나님의 관심을 따라 기도했다. 이것은 그가 실로 하나님 앞에서 기다린 사람이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우리가 방문을 닫고 하루종일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 생활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는 상당한 부분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가볍게 우리의 입을 열지 않고, 하나님께 어떤 것을 부주의하게 구하지 않는다. 그보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의 느낌을 느끼게 하는 기회를 그분께 드리고, 그분이 자신의 갈망을 우리 영 안에서 표현하시도록 허락하는 영과 의도와 태도와 상태를 유지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갈망을 접촉하고, 그분의 느낌을 느낄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 기도해야 한다. 그때 이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것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나는 성경에서 최초의 좋은 기도의 예는 창세기 18장에 있는 아브라함의 기도라고 말하고 싶다. 몇 가지 아주 중요한 원칙들이 그 기도에 포함되어 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을 버렸을 때, 하나님을 원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아브라함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하나님 안에 살지 않은 것 같지만, 실제로 그는 하나님과 교통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분 앞에서 기다린 사람이었다.
그가 하나님을 보았을 때 즉시 『여호와께서 여기 계십니다. 하늘의 천사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원하고 저것을 원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기다렸다. 그는 장막 밖에서 기다렸고 하늘의 방문객들을 전송하러 그들과 함께 얼마쯤 간 후 여전히 서서 하나님 앞에서 기다렸다. 하나님이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고 말씀하실 기회를 가지신 것은 바로 이러한 기다림 안에서였다. 그후 그분은 더 전진하여 아브라함에게 그분의 의도를 계시하셨다.
그 특별한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평범한 말씀이 아닌 풀기 어려운 말씀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한 아브라함의 기도도 분명한 말이 아닌 풀기 어려운 말로 하였다. 소돔을 언급할 때 하나님의 의도는 롯에게 집중되었다. 하나님은 롯을 구원하실 기회를 가질 목적으로 그를 위해 기도할 어떤 사람을 원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고 하나님이 소돔을 언급하시는 것을 들었을 때, 즉시 소돔 안으로 떨어진 롯을 기억했으며 하나님 앞에서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것은 하나님도 아브라함도 롯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아브라함이 롯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음을 아는가? 다음 장인 19장 후반 몇 구절은 하나님이 소돔의 모든 들과 성읍을 멸하실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셨고 그 성읍에서 롯을 구원하셨다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 아브라함의 기도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부담을 갖게 하신 간구는 롯에게 집중되었음을 안다. 하나님도 아브라함도 롯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마음과 아브라함의 마음은 롯에게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기다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만진 기도를 할 수 있었다. 그에게 여러 가지 의견과 간구와 요청과 제의가 없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활동을 중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기다렸으며, 하나님께 말씀하실 기회를 드렸으며, 그런 다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따라 기도했다.
그러므로 기도의 사람은 명확히 하나님 앞에서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은 우리가 철저히 배워야 할 아주 깊은 공과이다. 기도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가는 사람은 그의 존재를 정지시켜야 한다. 즉 그의 감정과 생각과 의지가 상당한 정도로 중단되어야 한다. 오직 자신의 존재의 활동을 멈추는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서 기다릴 수 있다.
Ⅳ. 자신에 속한 모든 것, 특히 자신의 능력과 의견을 제쳐놓는 사람이어야 함
기도하기를 배우는 사람은 자신을 제쳐놓고, 자신의 존재를 정지시키는 엄격한 공과를 배워야 한다. 여기에서 자아는 특히 자신의 의견과 천연적인 능력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베드로였다. 그 당시 그는 이미 오순절을 경험했고 상당한 정도의 영적인 체험이 있었지만, 그의 기도는 그가 여전히 자신의 의견을 제쳐놓을 수 없었음을 보여 준다. 그는 기도하기 위해 지붕에 올라갔지만 여전히 그곳에서 하나님과 다투었고 하나님이 그에게 다시 한 번 이상을 주시게 했다.
그는 큰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고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내가 결코 먹은 일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행 10:13-14). 이것은 그의 의견이었다. 하나님은 즉시 그에게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게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다(행 10:15). 여기에서 베드로의 의견이 하나님의 뜻과 상치되었다. 따라서 그의 기도는 통과될 수 없었다.
기도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베드로보다 하나님과 상반되는 것이 더 적다고 생각지 말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 때 아주 많은 의견들이 있다. 성경에 있는 많은 기도들을 읽어보기 바란다. 당신은 그 기도들 가운데 아주 여러 번 사람의 천연적인 능력뿐 아니라 사람의 의견들을 볼 수 있다. 구약에서 요나가 좋은 예이다. 그는 기도하고 있었을 때, 자신의 의견을 제쳐놓을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과 상치되는 그의 의견을 기도했다.
다시 한 번 베드로를 보기로 하자. 주 예수님이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베드로는 주님께 『모든 사람이 실족할지라도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실족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베드로가 그의 천연적인 능력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없었다. 그의 기도는 사실 『다른 사람들이 실족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주님이 나를 견고하게 세워주시기를 구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당신은 그가 설 수 있기를 바랬다고 믿어야 한다. 그 바램은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갈망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너는 분명히 넘어질 것이다. 나는 너의 천연적인 능력에 성공을 가져다 주기 위해 너의 기도에 응답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넘어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예증이 얍복 시내에서 있었던 야곱의 체험이다. 그때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기도는 실로 그의 천연적인 힘으로 충만했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이 다른 대책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의 환도뼈를 칠 정도로 하나님과 씨름을 했다. 그 결과 야곱은 다리를 저는 사람이 되었다. 성경에서 그러한 예들이 많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가서 그들의 천연적인 힘과 그들 자신의 의견에 따라 기도했다. 이 두 가지는 기도에 가장 큰 장애물들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도의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넘어지는 사람이고 그의 천연적인 능력뿐 아니라 의견들과 관점들이 하나님에 의해 부서진 사람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을 만질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천연적인 힘이 무너지고 자신의 관점들이 제쳐 놓아진 사람들이었다.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넘어진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그의 능력도 그의 관점들도 없었다. 시편에서 다윗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모든 합당한 기도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주 부드러웠다. 그들은 자아를 제쳐 놓았으며, 하나님 앞에서 넘어졌고, 부서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주장이 없었고, 천연적인 힘이 없었고, 의도와 의견이 없었다. 오직 그러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보좌와 하나님의 뜻을 만질 수 있다. 오직 그러한 사람들만이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다.
Ⅴ.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 굴복하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이어야 함
기도의 사람에 대한 또 다른 요구는 그가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 굴복하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당신이 교통 안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당신이 하나님을 만날 때마다 그분은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신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형제 자매들이여,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이다.
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어떤 형제 자매들에게 결코 인식된 적이 없는 것을 염려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급하신다는 것은 부인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공급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모든 공급이 이미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벗기시는 것이다. 십자가는 더하기 기호(+)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빼기 기호이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우리에게 물건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너무 많은 물건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실 때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제할 것을 요구하신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어보기 바란다. 하나님이 그를 만나신 때부터 그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알게 될 때까지,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벗기지 않으신 때가 한 번도 없었다. 맨처음 하나님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말씀하셨고, 두번째 그분은 『너의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창 12:1). 첫번째 그에게서 그의 고향을 벗기셨고, 두번째 그의 아버지를 벗기셨다. 또 다른 때에 롯을 벗기셨다.
아브라함은 떼놓았어야 할 롯을 데리고 그의 길을 갔다. 롯은 아브라함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 다음 15장에서 그가 결국 롯과 헤어졌을 때, 다메섹 엘리에셀을 의지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 『주 하나님이여...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말했다(창 15:2).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창 15:4). 이 사람까지도 떨쳐야 했다.
그후 16장에서 그는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았다. 점점 더 많은 것이 그에게 더해졌지만 이 얻어진 것들은 애굽에 의해서 그에게 주어진 것이지, 십자가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17장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오시어 『너는 할례를 받아야 하고 어떤 것을 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네 안에 너무 많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감소하는 언약이었고 증가하는 언약이 아니었다.
그 다음 21장에서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마지막 남았던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인 이삭까지도 드려져야 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그가 하나님에게서 무엇인가를 받았다는 것을 거의 보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가 거듭거듭 보는 것은 하나님의 벗기심이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하심이다.
내가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 하나님이 오늘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시지 않았다면 당신은 오늘 그분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만날 때마다 그분은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실 것이다. 당신의 기도가 하나님을 만난다면 당신은 어떤 요구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육신으로 난 것이 제거되어야 할 뿐 아니라 은혜를 통해 얻어진 것이라도 벗겨져야 한다. 이스마엘은 쫓겨나야 하고, 이삭은 드려져야 한다. 모든 참된 기도는 당신으로 하나님을 만지게 할 것이고, 하나님을 만지는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요구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사람은 단호히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문제는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과도하게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결핍에 있지 않고, 우리의 풍족함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지실 때마다 없어져야 할 것들을 우리 안에 너무 많이 갖고 있다. 하나님은 매번 요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매번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하나님은 요구하시는데 당신이 그 요구를 이루는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그분을 만족시켜 드리지 않으려 한다면 당신과 그분 사이에 자유롭고, 흐르는 교통을 유지하기가 아주 어려울 것이며, 기도의 영 안에 살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여전히 기도할 수 있지만, 기도의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든, 당신은 『하나님, 주님의 은혜로 내가 기꺼이 이 대가를 지불하겠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이삭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갈망하신다면 기꺼이 그를 제단으로 보내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갈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이 바로 기도의 사람이다.
Ⅵ. 생활이 기도와 일치하는 사람이어야 함
기도의 사람으로서 당신의 생활은 당신이 기도하는 것과 일치되어야 하며 혹은 부합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교회의 부흥이나 한 죄인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 구할 수 있지만, 그의 생활은 완전히 그의 기도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교회의 부흥에 기여하는 생활을 하지 않거나 죄인들을 구원에 이끄는 데 도움이 되는 상태로 살지 않는다. 그는 기도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기도의 사람이 아니다.
기도의 사람은 실지로 기도할 뿐 아니라, 기도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즉 그의 생활이 기도이다. 많은 때 우리는 여러 가지 것들을 위해 기도하지만, 기도한 후 그러한 것들이 요구하는 생활의 표준에 따라 생활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의 동작을 경험하지만 기도의 사람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내적으로 말해서 기도는 우리의 생명이지만, 외적으로 말해서 기도는 우리의 생활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기도란 어떤 사물도 아니고 일도 아니다. 물론 어느 의미에서 기도는 하나의 일이지만, 당신의 존재가 그 기도 안에 있어야 하며 심지어 그 기도가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가 교회의 부흥을 위해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를 할 수 있다. 그가 교회의 부흥을 위해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 동안 그의 말은 아주 진지했다. 그는 눈물을 흘렸고 그와 함께 기도하는 당신도 그의 진지함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었고, 그에게 완전한 부담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가 기도한 후 일어나서 영화 구경을 하러 갔다. 당신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도한 후 우리는 모두 겉으로 우울하고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금식 기도를 할 때도 여전히 머리에 기름을 발라야 한다. 겉으로 외식하는 것은 무익하다.
요점은 이것이다. 즉 진정한 기도에는 어떤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참된 기도를 하기 원한다면 당신의 생활이 그 기도와 일치해야 한다. 당신이 기도를 마치자마자 영화 구경하러 갈 수 있다면, 당신의 마음이 진정으로 교회의 부담을 지고 있음을 아무도 믿을 길이 없다. 당신의 생활이 당신의 기도와 일치하지 않는다. 당신이 기도의 사람이라면, 당신의 생활이 절대적으로 당신의 기도와 하나일 것이다. 당신의 생활이 당신의 기도이다. 안의 생명이 기도의 생명이고, 밖의 생활이 기도의 생활이다. 그때 당신은 기도의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에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믿음이란 단지 당신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으로 말해서 믿음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발산되는 기능이다. 당신이 하나님 안에 거하고, 그분 안에 살고, 그분이 당신 안에서 지위를 갖도록 허락하는 사람이라면,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이 믿음이라는 기능을 생기게 하신다. 믿음은 당신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능력이 하나님 자신이듯이, 믿음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거의 말할 수 있다. 사람이 오직 하나님으로 충만할 때만이 능력으로 충만된다.
이와같이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만이 믿음으로 충만하다. 그러므로 단지 사람들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권면하는 것은 무익하다. 내가 당신에게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백 번 메시지를 전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믿음이 없을 것이다. 당신이 진정으로 믿음을 갖기 원한다면 당신은 하나님 안에 살고, 하나님에 의해 처리를 받고 있고, 그분의 요구에 기꺼이 굴복하고, 그분의 벗기심을 허락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분이 이렇게 당신 안에서 지위를 가지실 때, 그분이 곧 당신 안에서의 믿음이다. 그분이 당신을 그분 자신으로 채우실 때, 당신은 믿음으로 충만케 된다.
당신은 믿으려고 애쓰거나 자신을 억지로 믿게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분명히 믿을 수 있다. 당신 안에 당신이 기도하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당신을 채우시고, 당신으로 기도하게 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당신의 믿음이 된다.
이제 당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고, 그분께 속하고, 그분을 접촉하고 있으므로 그분이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을 수 없음을 당신이 확실히 알고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당신의 원함에 따라 오지 않는다. 그보다 믿음은 당신이 믿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채우는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이다. 형제 자매들이 기도하기를 배울 뿐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원한다.
위트니스 리
[기도, "기도의 사람",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