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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이 공허하고 자신이 부서지기 쉬움을 볼 때 우리는 자연히 주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이런 이유로 창세기 4장 26절은,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말했다. 인류의 제 삼대인 에노스의 때에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과 깨지기 쉬움과 죽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히브리어로 「주」라는 단어는 여호와이다(창 4:26, 출 3:14 참조).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주로 창세기 1장에서 그분의 창조와 관련되어 사용된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주로 창세기 2장에서 사람과 관련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여호와는 사람과 친근한 관계가 되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따라서 창세기 4장 26절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을 부르지 않고, 그들과 심히 친근하신 분, 그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분을 불렀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그분은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고 미래에도 영원토록 계신다. 그분은 영존하시는 분이다. 부서지기 쉽고 죽어야 할 운명임을 깨달을 때 사람들은 영존하시는 분인 여호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주의 이름을 부름이다. 심지어 이 부름은 인류의 제 삼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할 때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고 그분의 길 안에서 그분을 경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가 부서지기 쉬우며 죽어야 할 운명이고 우리의 인생이 공허할 뿐임을 깨달을 때, 자연히 우리는 깊은 속으로부터 기도할 뿐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주의 이름을 부르는 가장 중요한 씨로 간주해야 한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일이다.
(1) 주의 이름을 부름의 정의(定義)
먼저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름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분께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전에는 나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주님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단지 그분께 기도하는 것과는 다름을 보여 주셨다. 그렇다. 부르는 것은 기도의 일부이기 때문에 기도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부름은 단지 기도만이 아니다. 「부르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외치다」 또는 「호소하다」, 즉 「부르짖다」를 뜻한다. 헬라어로는 「사람을 불러 일으키다」, 「사람의 이름을 부르다」를 뜻한다. 바꿔 말해서 부르는 것은 그가 들을 수 있도록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기도는 속으로 할 수 있지만 부르는 것은 들리게 해야 한다.
주님을 부르는 것은 그분께 부르짖는 것이며 영적인 호흡을 체험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호흡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우지 마옵소서』(애 3:55-56).
이 구절들은 부름이 또한 부르짖음과 호흡임을 나타낸다. 부르짖음은 가장 좋은 호흡이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부르짖음은 가장 좋은 실행이다. 부르짖을 때마다 당신은 자연스럽게, 깊이 호흡하게 된다. 부르짖고 호흡함으로써 우리는 내쉬고 들이마신다. 들이마심은 항상 내쉰 다음에 있다. 내쉼으로써 우리는 모든 소극적인 것들을 내뿜는다. 소극적인 것들을 내뿜을 때마다 주님의 적극적인 것들이 당신을 채울 것이다.
화 내는 것을 예로 들어 보자. 화가 나오려고 할 때 당신은 억누르려고 노력하지 말고 다만, 『오, 주 예수여!』라고 부르라. 그런 다음, 『주 예수여, 나는 지금 화를 내겠습니다.』라고 짧게 기도하라. 이렇게 한 후에도 여전히 화를 낼 수 있는지를 보라.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당신은 화를 내쉬고 주 예수를 들이마신다. 당신은 화를 내쉬고 주님을 들이마시게 될 것이다.
당신은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는가? 거룩하게 되는 길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당신은 죄 있고 악하고 더러운 모든 것들을 내쉬고 적극적인 모든 것들-주님의 풍성-을 당신 안에 들이마시게 될 것이다.
심프슨(A.B. Simpson)은 주님을 호흡함에 대한 찬송을 썼다. 그 중의 일부를 읽어 보자.
주여 내게 성령 부어 마시게 가르치며
주의 품에 죄와 자아 쏟게 도와주소서
나의 슬픔 뿜어내고 죄악 내쉬고
나는 깊이 들이마셔 주의 풍성을
자아 생명 뿜어내야 당신으로 충만돼
나의 약함 거절하고 주의 은혜 마시리
1963년에 나는 이 찬송을 미국에 있는 몇몇 성도들에게 소개했다. 어느 날 이 찬송을 부른 후에 어떤 성도가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찬송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들이마셔, 들이마셔, 뭘 들이마신다는 것입니까?』 그는 약간 마음이 상했다. 몇 년 후 우리가 찬송가를 출판한 다음에 바로 그 성도가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형제님, 찬송가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은 주님을 호흡함에 대한 그 찬송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호흡하는가? 우리는 자신을 주님께 열고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 호흡한다. 예레미야가 말했듯이, 주님을 부르는 것은 그분께 부르짖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외쳐야 할 뿐 아니라 부르짖기까지 해야 한다. 그는 깊은 구덩이에서 부르짖었다. 우리가 낮아질 때마다. 곧 우리가 「구덩이」 아래에 있을 때마다 이러한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주님을 더 영접할 수 있도록 주님께 부르짖음으로 그분을 불러야 한다.
이사야도 또한 우리가 주님을 부르는 것이 그분께 부르짖는 것이라고 말한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시온의 거민아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사 12:2-6).
이 구절에서 이사야는 감사하고 찬송하고 부르짖고 외치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들은 4절에 언급된 부름과 어울린다. 2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시며 힘이시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시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면 된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의 우물들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을 수 있는가? 그 길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고 찬송하는 것이며 소리를 높여 외치는 것이다. 우리는 4절에서 찬양과 부름이 함께 있는 것을 보며, 6절에서는 소리를 높임과 부르짖음이 함께 있는 것을 본다. 이것은 주님을 부르는 것이 부르짖고 외치는 것임을 증명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외쳐 본 적이 없다. 만일 당신이 주님 앞에서 외쳐본 적이 없다면 나는 당신이 풍성하게 주님을 누릴 수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그분 앞에서 외쳐 보라. 만일 당신이 주님의 어떠하심에 대해 외쳐본 적이 없다면 시도해 보기를 권한다. 『오, 주 예수여! 당신은 너무나 좋습니다.』라고 외치면 외칠수록 당신은 자신에게서 해방되고 주님으로 채워 질 것이다. 당신은 삼층천에 있게 될 것이다. 이사야는 구약 시대에도 사람들에게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짖고 외치라고 말했다.
주님을 부르는 것에 관해 내 자신의 간증을 하겠다. 나는 남침례교회에서 자랐다. 구원받은 후 말씀을 추구하기 위해 나는 엄격한 형제회 모임에 수년 동안 머물렀다. 그들은 항상 침묵했다. 그들은 심지어 집회 중에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훈련받았다. 나는 형제회 교사들의 가르침을 들으며 그들의 발 밑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이것을 인해 주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주님과 말씀을 사랑했지만 생명의 합당한 도움을 받지 못했다. 내가 받은 유일한 도움은 성경의 흑백 문자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1931년 8월의 어느 날, 내가 길을 걷고 있을 때 그 영이 내 안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 자신을 보라. 너에게는 많은 지식이 있다. 너는 예언과 예표들은 알지만 네가 얼마나 죽어 있는가 보라.』 즉시 깊은 속에서부터 나는 목마름과 배고픔을 의식했다.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터져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내 종교적인 배경으로 인해 나는 길에서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주님 앞에서 자신을 해방할 수 있는 다음날 아침을 기다리며 그날 오후와 저녁과 밤 시간을 고통 중에서 자신을 억제하며 보냈다.
우리 집은 작은 산기슭에 있었다. 아침이 되자 나는 그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내 마음에 있는 것을 해방했다. 나는 외치려고 하지 않았지만 속에서부터 『오, 주 예수여!』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자연스럽게 나는 주님을 보았다. 아무도 주님을 부르라고 내게 가르치지 않았고, 성경에서 그것에 관해 읽은 적도 없었다. 나는 자연히 그렇게 행동했다. 나는 「주님을 누림」이나 「영을 해방함」과 같은 단어를 몰랐지만 내게는 그 둘 다의 실제가 있었다. 나는 내 영을 사용했고 해방했으며 분명히 주님을 누렸다. 그 후 나는 거의 매일 아침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주님을 불렀다. 주님을 부름으로써 나는 주님으로 채워졌다. 아침마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 나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나는 하늘에 있었으며 온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내 발 아래 있었다.
그러나 나의 배경으로 인해 나는 이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을 실행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십 이 년 후인 1943년에 나는 중국에 침략한 일본군에 의해 투옥되었다. 어느 날 그들은 나를 핍박하며 때렸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자연히 나는, 『오, 주 예수여!』라고 불렀으며 그들은 때리기를 멈췄다. 그러나 나의 종교적인 배경으로 인해 나는 여전히 이것을 매일 실행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이것을 일상 생활에서 실행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이십 사 년 후인 1967년에 주님을 부르는 이 문제가 로스앤젤리스에 나타났다. 그 당시에 나는 말씀 연구를 통해 이 문제를 확증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주님을 부름에 관한 말씀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결과 나는 그것이 고대의 성도들의 실행이었음을 발견했다. 이것은 수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 성경 색인(Concordance)을 통하여 나는 주님을 부름에 관한 수많은 구절을 발견했고 주님을 부르는 다양한 방면들을 알았다. 그 당시에 나는 주님을 부르기를 실행할 뿐 아니라 그분을 부르도록 남을 가르치고 돕는 데 있어서 견고해졌고 강화되었다.
1967년부터, 주님을 부르는 것은 주의 회복의 한 항목이 되었다. 그것이 주님을 접촉하는 가장 좋은 길임을 알게 되었다. 같은 해에 나는 극동 지방을 방문하여 이것을 성도들에게 가져갔다. 나는 수천 명의 성도들이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해방되었고 풍성해졌음을 간증할 수 있다.
(2) 주님을 부른 역사
우리가 주님을 부르는 것을 발명했다고 생각지 말라. 이것은 새로운 발명이 아니다. 기껏해야 그것은 새로운 발견이거나 주의 회복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보았듯이 주님을 부르는 것은 인류의 제 삼대부터 시작되었다. 셋의 아들인 에노스는 제 삼대였다. 하와는 둘째 아들에게, 「공허함」을 뜻하는 아벨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런 다음 아벨의 동생인 셋은, 인생이 약하고 부서지기 쉽고 죽을 운명임을 깨닫고 그의 아들에게 에노스라는 이름을 주었다. 셋은 그의 아들을 에노스라고 부를 때마다 자신이 약하고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말했을지도 모른다. 에노스는 인생의 부서지기 쉬움을 깨달은 후부터 영존하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고 약하고 부서지기 쉬움을 깨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다만 『오, 주 예수여!』라고 불러야 한다.
주의 이름을 부른 역사는 성경 전체를 통해 계속되며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른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할 수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창 12:8), 이삭(창 26:25), 모세(신 4:7, 원문 참조). 욥(12:4, 원문 참조), 야베스(대상 4:10, 원문 참조), 삼손(삿 16:28), 사무엘(삼상 12:10), 다윗(삼하 22:4, 원문 참조), 요나(욘 1:6, 원문 참조), 엘리야(왕상 18:24), 엘리사(왕하 5:11), 예레미야(애 3:55)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주님을 불렀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의 이름을 부르리라는 것까지 예언했다(욜 2:32, 습 3:9, 슥 13:9). 성령에 관한 요엘의 예언에 익숙한 사람은 많지만 성령의 부어주심을 받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주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면으로 요엘은 하나님이 그분의 영을 부어주시리라는 것을 예언했다. 다른 면으로 그는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를 것을 예언했다. 하나님의 부어주심에는 그분을 부르는 우리의 동역이 필요하다. 요엘의 예언은 오순절날 성취되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또한 신약의 성도들의 실행이었다. 그것은 오순절날 시작되었다(행 2:21). 오순절날 하나님은 그분의 영을 부어주셨으며 초기의 성도들은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 영을 받았다. 그들이 부른 것은 하나님이 영을 부어주심에 대한 반응이었다. 스데반도 또한 주의 이름을 불렀다. 돌에 맞아 죽을 때 그는 주의 이름을 불렀다(행 7:59). 그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죽었다. 만일 주님이 늦게 오심으로 우리가 죽는다면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죽고 싶다.
신약의 모든 믿는이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을 실행했다(행 9:14, 22:16, 고전 1:2, 딤후 2:22). 다소의 사울이었을 때 바울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을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다(행 9:14). 이것은 초기의 모든 성도들이 예수를 부르는 자들이었음을 의미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요 중거였다. 따라서 다소와 사울은 다메섹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로 그들을 식별하기가 쉬울 것이라고 느꼈다. 그들은 주님께 기도했을 뿐 아니라 그분을 불렀다.
오늘날 매일 주님께 기도하는 많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그들의 이웃과 친구들과 학교의 동급생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임을 모른다. 우리는 그들을 「침묵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이 부름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가 될 것이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의 길은 이런 길이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결박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사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그는 주님께 사로잡혀서 눈이 멀었다. 주님은 아나니아라는 작은 제자를 사울에게 보내어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했다. 아나니아의 말을 들어보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침례를 받고 주의 이름을 불러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 22:16, 원문 참조).
영어의 문법에 의하면 「불러」는 「씻다」를 수식한다. 사울은 어떤 죄를 씻어야 했는가? 그것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결박한 죄였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했으며 의도적으로 다메섹에서 이렇게 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울을 매우 악한 자로 알고 있었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사울은 성도들을 핍박하고 예수를 부르는 자들을 결박하는 죄를 범했다. 그러므로 그의 죄를 씻는 가장 좋은 길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가 진정으로 돌이 켰다는 것이 모든 믿는이들에게 분명해질 것이다. 전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결박했던 사람이 지금은 그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행전 22장 16절을 잘못 해석한다. 그들은 「너의 죄를 씻으라」가 「침례를 받고」를 수식한다고 생각한다. 문법에 의하면 그런 뜻이 될 수 없다. 이 구절에는 두 항목, 곧 「침례를 받고」와 「너의 죄를 씻으라」가 언급된다. 헬라어 단어 「카이(kai)」는 영어에서 「그리고(and)」로 번역되어 둘을 연결한다.
그러므로 침례 받는 것과 죄를 씻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사울은 침례를 받았으며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의 좌를 씻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핍박했던 다소의 사울은 주님께 사로잡혔다. 그럴 때 주님이 보내신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침례받고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의 죄를 씻으라고 말했다.
만일 사울이 침례만 받았다면 많은 신자들은 그가 참으로 돌이 켰는지를 의심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아나니아여, 당신은 그렇게 잠잠한 신자에게 침례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침례를 주려고 할 때 이렇게 말한 것 같다. 『형제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당신의 죄를 씻으십시오. 사울 형제님, 당신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했습니다. 성도들은 당신을 악하게 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예수를 부르는 모든 사람들을 결박하려고 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눈에서 당신의 죄를 씻는 가장 좋은 길은 「오, 주 예수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울이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자가 자기 형제들 중 한 명이 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주님을 부름은 그가 돌이 켰다는 증거였다.
바울은 로마서를 쓸 때 「부르는 것」을 강조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2-13)고 말한다.
로마서 10장 12절에서 바울은, 주님이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고 말하고 13절에서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한 요엘의 예언을 인용했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 전서에서도 주님을 부름에 대해 말한다.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 또한 디모데 후서에서 그는 디모데에게,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영적인 것들을 좇으라고 말했다(딤후 2:22).
이 모든 구절에 의해 우리는 일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널리 실행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초기 시대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성도들은 주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이것이 오랫 동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무시되어 온 것은 얼마나 유감인가! 나는 오늘날 주님이 이것을 회복하기 원하시며 우리로 그분의 생명의 풍성을 누릴 수 있도록 이것을 실행케 하셨음을 믿는다.
(3) 주님을 부르는 목적
(a)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는 왜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가? 사람은 구원받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롬 10:13). 가령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기 시작한다 하자. 당신은 그가 아주 조용하게 주님께 기도함으로써 구원받도록 그를 도울 수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구원받은 것을 보았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기도하도록 그를 도울 뿐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도록 돕는다면 그의 구원의 체험은 훨씬 더 강할 것이다. 조용하게 기도하도록 돕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 받게 하지만 그렇게 풍성하지는 않다. 큰 소리로 부르는 길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 풍성하고 더 철저하게 구원받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자신을 열고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도록 격려해야 한다.
(b) 근심, 환난, 슬픔, 아픔에서 구출받기 위해서
주님을 부르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근심에서 구출받고(시 18;6, 118:5) 환난에서 구출받고(시 50:15, 86:7, 81:7) 슬픔과 아픔에서 구출받기 위함이다(시 116:3-4). 주님을 부르는 것에 대해 논쟁하는 사람들도 어떤 환난이나 질병을 만날 때에는 자신이 주님을 부르고 있음을 발견한다. 생활에 환난이 없을 때 우리는 주님을 부르는 것에 대해 논쟁할 것이다. 그러나 환난이 닥칠 때 아무도 당신에게 주님을 부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자연히 부를 것이다.
주님을 부름은 우리를 구출하고 해방한다. 우리는 근심과 환난 중에 있을 때 주님을 불러야 한다. 더우기 시편 116편 3절-4절은, 주의 이름을 부름이 우리를 고통, 슬픔, 사망, 음부와 같은 소극적인 것들로부터 구출한다고 말한다. 그런 것들로부터 해방 받기 원한다면 당신은 주님을 불러야 한다.
(c) 주님의 긍휼에 참여하기 위해서
시편 86편 5절은, 주는 선하시고 사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분을 부르는 자에게 긍흘이 풍성하시다고 말한다. 우리가 주님의 풍성한 긍휼에 참여하는 길은 그분을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부를수록 긍휼을 더 누리게 된다.
(d) 주님의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서
또한 시편 116편은, 우리가 주님을 부름으로써 그분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13절). 이 한 편의 시에서 주님을 부르는 것이 네 번 언급된다(2,4,13,17절). 여기서 부르는 목적은 주님의 구원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다. 전에 언급했듯이 우리가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긷는 길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사 12:2-4).
(e) 영을 받기 위해
주님을 부르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영을 받기 위한 것이다(행 2:17, 21), 성령으로 채워지는 가장 좋고 쉬운 길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영은 이미 부어졌다. 우리는 다만 주님을 부름으로써 그분을 영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언제든지 이렇게 할 수 있다. 대여섯 번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은 영으로 채워질 것이다.
(f) 만족함을 위해 영적인 물을 마시고 영적인 음식을 먹기 위해서
이사야서 55장 1절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주님을 먹고 마시는 길은 무엇인가? 이사야는 6절에서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 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그러므로 만족함을 위해 영적인 물을 마시고 영적인 음식을 먹는 길은 주님을 찾아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g) 주님의 풍성을 누리기 위해서
로마서 10장 12절은, 주님을 부르는 모든 자들 위에 그분이 부요하시다고 말한다. 주님의 풍성을 누리는 길은 그분을 부르는 것이다. 주님은 풍성할 뿐 아니라 생명 주는 영이기 때문에 가까이 계시며 유용하시다(8절). 영이신 그분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을 부를 때 그분은 영으로 우리에게 오시며 우리는 그분의 풍성을 누린다. 당신이 예수를 부를 때 그 영이 온다.
고린도 전서는 그리스도의 누림에 관한 책이다. 12장에서 바울은 그분을 어떻게 누리는가에 대해 말한다. 주님을 누리는 길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12:3, 1:2). 「주 예수여」라고 말할 때마다 우리는 생명 주는 영이신 그분을 마신다(13절). 15장 45절은 주님이 지금 생명 주는 영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주 예수여」라고 부를 때마다 그분은 영으로 오신다.
내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만일 그가 참되고 살아 있고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내게 올 것이다. 주 예수님은 참되고 살아 있고 존재하신다. 그분은 항상 유용하시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그분은 오신다. 심지어 구약 시대에도 모세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를 부를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하심과 같이 가까이 함을 얻은 위대한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7, 히브리어 참조).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분은 가까이 하신다(시 145:18). 당신은 그분의 모든 풍성과 함께 주님의 임재를 누리기 원하는가? 그분의 모든 풍성과 함께 그분의 임재를 체험하는 최상의 길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고속도로를 운전할 때나 일을 할 때 그분을 부르라.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부를 때 그분은 당신을 가까이하시며 당신에게 부요하시다.
(h) 스스로 분발하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분발할 수 있다. 이사야 64장 7절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우리는 실망하거나 침체되어 있을 때 주 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향상되고 분발할 수 있다.
(4) 주님을 어떻게 부르는가
이제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먼저,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불러야 한다(딤후 2:22). 근원이 되는 우리의 마음은 주님 자신만을 추구하는 순수한 마음이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순수한 입술로 불러야 한다(습 3:9, 히브리어 참조). 느슨한 말보다 더 우리의 입술을 더럽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만일 느슨한 말로 인해 우리의 입술이 순수하지 않다면 주님을 부르기 어려울 것이다.
순수한 마음과 순수한 입술에 더하여 우리에게는 열린 입이 필요하다(시 81:10, 7절 참조). 우리는 입을 크게 벌려서 주님을 불러야 한다. 더우기 우리는 단체적으로 주님을 불러야 한다. 디모데 후서 2장 22절은 이렇게 말한다.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순수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함께 모일 필요가 있다.
시편 88편 9절은,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매일 매시간 실행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호흡을 멈추면 안 된다. 우리 모두는 호흡이 멈출 때 어떻게 되는지를 안다.
더우기 시편 116편 2절은, 『내가 평생에 그분을 부르리로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나는 더많은 주님의 백성들, 특히 새로운 사람들이 주님을 부르는 이 실행을 시작하기 바란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은 그것이 주님의 풍성을 누리는 최상의 길임을 보게 될 것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주의 회복의 한 항목이 된 이후로 어떤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질책했다.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왜 당신은 주님을 부를 때 주님이 당신에게 가깝다고 말합니까?』
주님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분을 부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다. 당신 안에 숨(호흡)이 없는가? 당신 안에 이미 숨이 있는데 왜 여전히 호흡하는가? 이 질문의 논리는 주님이 이미 우리 안에 계시는데 주님을 불러야 하는 것과 일치된다. 주님은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분을 부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건전한 논리일지 모르나 그것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아무도 호흡에 대해서는 이렇게 실행하지 않는다. 숨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더이상 호흡할 필요가 없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계속 호흡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불러야 하며 그분을 더욱더 들이마셔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왜 당신은 그렇게 큰 소리로 부릅니까? 우리 하나님이 귀머거리입니까? 그분이 우리의 조용한 기도를 들으실 수 없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들은, 주님이 귀머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분을 크게 불러서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논쟁한다. 그러나 히브리서 5장 7절에서 주님이 어떻게 기도하셨는지를 보라.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을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이 구절에 있는 「심한 통곡」은 분명히 조용한 기도가 아니다. 만일 당신이 주님을 큰 소리로 부르는 자들에 대해 불평한다면 당신은 왜 주 예수님이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셨는지 그분께 물어 보아야 한다. 아버지 하나님이 귀머거리가 아닌데 왜 주님은 그렇게 기도하셨는가? 더우기 요한복음에서 최소한 두 번 그분은, 흔자 계시지 않고 항상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셨다(16:32, 8:29). 아버지께서 계속 그분과 함께 계셨는데 왜 그분은 아버지께 심한 통곡으로 기도할 필요가 있었는가?
더우기 시편에서는 여러 번, 주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하라고 말한다(66:1, 81:1, 95:1,2, 98:4,6, 100:1). 즐거운 목소리가 아니라 즐거운 소리임을 주목하라. 우리 모두는 목소리와 소리의 차이점을 알고 있다. 주님이 그런 소리를 듣기 좋아하시므로 우리는 주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말을 들으시는가 안 들으시는가가 아니다. 요점은 우리의 영과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을 해방하기 위해 우리의 영을 사용함으로써 생명 주는 영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것은 들을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누리는 문제이며 그분의 모든 풍성에 참여하는 문제이다.
이 메시지에서 내 부담과 의도는 주님을 부르는 것에 관한 성경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주님을 부름에 대한 성경 말씀을 연구해 본다면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최근의 발명이 아님을 확신할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있는 거룩한 것들 중 하나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창세기 4장 26절에서 보았듯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수천 년 전에, 심지어 인류의 제 삼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위트니스 리
[창세기 라이프 스타디Ⅰ, "사람의 두 번째 타락(3)",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