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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은혜 시대의 끝무렵에 있다. 시계 바늘은 이미 열 두 시를 가리키고 있다. 지금은 바로 깊은 밤이며 어둠의 시간이다. 이 극한 어려움이 지나면 날은 곧 밝아진다. 교회는 점점 더 배도의 상태로 떨어져 가고 있고 갈수록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다. 전쟁은 세상을 분란케 했고 교회를 마비시켰다. 흑암의 권세가 이미 만연하여져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 없이 그 악영향을 받고 있다. 유럽의 전쟁은 교회가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들을 남겨주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현재 흑암 가운데 큰 빛을 발하고 있다.
죄는 우리로 길을 잃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구속되고 하나님께 드려졌다. 베드로 전서 3장 18절을 보자.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속죄와 대신 죽으심의 참된 진리에서 벗어남으로 죄에 대한 풍부한 지각을 상실했다. 오직 십자가로 가는 사람만이 죄악의 깊음과 고통을 깨닫는다.
골고다는 사람이 하나님의 권능에 싫증이 났음을 말해 준다. 이 싫증은 극히 어두운 죄된 행실 가운데 나타나 있다. 사람은 십자가를 「믿음의 표준」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참으로 복된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사람의 참된 본성을 드러내므로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는 표준이기도 하다. 교회가 죄의 사악함을 보지 못하는 것은 십자가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미 죄악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빛에서 이탈되었다. 교회는 이미 사람들에 의해 이간되어 『내가 내 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라고 외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근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바로 교회의 죄이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하고도 그것을 제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정말 사악한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심중의 죄이든 생각 속에 범한 죄이든 연단에서 범한 죄이든 예배당에 앉아서 범한 죄이든-를 범할지라도 그들에게는 골고다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골고다로 돌아가 죄인의 위치에 서서 십자가로 죄를 위해 애통의 눈물을 흘리고 당신의 강퍅한 마음을 녹이게 하라!
하나님과 화목하는 장소
죄의 결과는 분리됨이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하나님의 법칙이다. 이것을 이상(理想)적으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 공과를 온전히 배우게 하는 유일한 장소이다. 그리스도께서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이것은 그분이 당한 육신의 고통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그분의 영성이 하나님과 분리됨으로 나온 부르짖음이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아버지와 분리된 적이 없었다. 셀 수 없는 영원의 시대를 거치고도 그들은 한 몸이었다. 이 복된 한 몸은 이 세상에 계실 때의 그분의 생명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분으로 하여금 죄인의 대적함을 넉넉히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하나님의 화목을 위해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이 사악한 흑암의 분리함에 들어가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영의 분리됨을 견디시고 화목의 참 의의를 이루셨으며 그분의 죽으심을 놀라운 것으로 만드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흑암에 버려지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이것을 잊어버린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정신(精神)을 상실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정신이 우리를 적시고 골고다의 원리가 우리 생명 안에 세워지기까지 주 예수의 죽음의 이 방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화목을 위해 십자가로 나아가야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하나님과 격리되지 않기 위해 주 예수님의 속죄하는 죽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주 신학적 용어로 냉담하게 「은혜」를 논하지만 주 예수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교통에 들어갈 때 비로소 은혜는 우리에게 사랑스러운 것으로 변하여 우리로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유일한 방법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리가 십자가를 떠나고 나서야 부활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질 수 있는가?』를 물어왔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우리는 우리 생명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더해져야 한다고 할 때 그들은, 『그러나 우리는 부활한 그리스도 안에 거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이지 죽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는 주로 우리가 이 복된 진리에 대한 영적 의미보다 의문을 더욱 중요시한 데서 기인한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 그리스도의 영은 골고다의 영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죽으심이 그리스도의 생명의 최고의 표시이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의 못박힌 영은 우리 생명의 근본으로 변한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더 깊은 연합을 구할 때 십자가를 떠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부활하신 주님과 더 깊은 하나를 갖고자 할수록 주님의 죽으심에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빌 3:10 참조).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것과 그분 안에 산다는 것은 모두 당신이 주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승리하는 조건은 바로 주님과 하나되는 것이다. 죄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주 예수와 하나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우리 주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믿는이들이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공과 중에 하나가 바로 범사에 온전히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들은 주님이 없으면 그들에게 어떤 도움도 없는 것같이 느낀다. 주님이 죄인에게 주신 메시지는 『내게로 오라』이고, 믿는이들에게 주신 메시지는 『내 안에 거하라』이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
그러나 이 연합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그리스도 안으로 믿는다는 뜻이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고 주님 안에 닻을 던지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믿는이는 주님과 완전한 접촉을 갖게 된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3장에서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거듭남 혹은 새 생명에 관한 가르침을 깨닫는다. 첫째는, 거듭남의 필요성(3절)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그 다음은 거듭남의 성질-영적인 성질 혹은 영적인 출생(5, 6절)-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는 거듭나는 길은 곧 주님을 믿는 것(14, 16절)임을 보여 준다. 사실 「믿음」이라는 단어 앞에는 「안으로」가 있어서 「안으로 믿음」이 되어야 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절).
죄인에게는 아직 구주가 없기 때문에 그에게 골고다는 필수적인 것이다. 못박힌 이 구주께서는 모든 사람을 그분 자신께로 이끄신다. 요한복음 12장 32절과 33절을 보자. 『내가 땅에서 들이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사탄의 갈망은 믿는이가 십자가를 멀리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믿는이로 하여금 십자가를 떠나 부활하신 주님과 하나 된 생명을 추구하지 못하게 했다면 그는 성공한 것이다. 사탄은 십자가를 떠나서는 결코 참된 하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믿는이들에게 거짓된 체험을 갖게 한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하고 살아 있는 믿음으로 주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마땅히 그분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그는 또한 주님과 더 깊이 하나되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의 더 깊은 연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빌립보서 3장 10절을 보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우리는 이것이 어떤 이론이나 사상이 아닌 실제적인 체험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실제적인 체험의 결과는 능력 있는 생명, 곧 죄와 사탄과 질병과 사망과 세상을 이기는 생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십자가로 돌아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피를 우리 생명에 적용할 수 없다면 이것은 그분의 죽으심의 의미를 깊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 주님의 피는 이미 십자가 위에서 흘려졌으므로 우리가 언제든지 온전히 속죄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죽으심의 완전한 역사가 아니다. 거기에 지속적인 죄의 씻음이 필요하다.
한번은 한 성도가 다음과 같은 난처한 질문을 해왔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죄를 자백한 때가 언제입니까?』 그때 나는 그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께 물었다. 나는 과거에 보혈을 의지하여 내 죄를 자백한 일이 잘못 행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과거에 내가 범하는 죄의 진상을 잊어 버렸다!
나 또한 오늘 여러분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지겠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죄를 자백한 때가 언제인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저지하는 것은 바로 죄악과 혈기의 생명의 활동이다. 이것들은 계속적으로 우리를 성령에서 떠나게 하고 우리로 성령 안에 행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우리의 영은 항상 이 악한 능력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힘을 다해 대적한다 해도 우리의 영을 다스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고요함 속에 행하지 못한다.
못박히지 않은 이 악한 본성은 또한 사탄과 그의 악한 영이 일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로서 이것으로 불쏘시개가 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흑암의 권세와 자주 사우는 원인이며, 또한 그들은 계속하여 우리의 「거점」을 공격할 것이다. 비록 우리가 보혈로써 그들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배웠을지라도 그들에게 「여지」를 남겨 둔다면 그들은 언젠가 기회를 잡아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십자가가 바로 구원의 치료제이다. 주님께 속한 사람은 누구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갈 5:24).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땅히 죄와 육체의 생명을 온전히 주님의 죽으심에 복종시켜야 하고 항상 주 안에 거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럴 때 그분의 죽으심의 유익을 함께 누리게 되고 그 결과로서 죄와 악한 본성의 권세로부터 해방을 받고 새 생명 안의 가장 뛰어남 안에서 행하게 될 것이다.
로마서 8장 초반부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2절)이라는 말씀이 있다. 주님과 온전히 연합되는 것 외에는 영적 생명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다. 이 연합은 죽음과 삶의 연합이다. 영적 생명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십자가를 멀리한다면 결과는 언제나 실패나 거짓된 것뿐이다.
성령은 바로 십자가의 영이다. 십자가는 성령의 최고의 표시이다. 「영원한 영」으로 말미암아 주님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다(히 9:14).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씻음
죽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 씻음의 중요성을 모른다면 이것은 크나큰 위험이다. 씻음은 하나님과의 동행에 관련된다. 죄는 범죄의 근원일 뿐 아니라 더러움이기도 하다.
우리는 먼저 주의 죽으심과의 연합의 기초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씻음을 구한다 하더라도 악한 본성은 여전히 우리를 더럽힐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오직 씻음이 가져다 주는 축복만을 알 뿐 그 씻음을 오랫동안 지속시키지 못한다. 이는 그들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는 하나님의 기초를 의지하기보다는 그들의 체험을 더욱 의지하기 때문이다. 오직 주님의 죽으심만이 악한 본성의 활동을 저지시킬 수 있다. 믿는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 거할 때만이 주님의 죽으심은 죄의 종 노릇으로부터 그를 자유케 한다.
그러나 여기서 발생되는 한 가지 문제는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죄에 대하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겼는데 또 무슨 씻음이 필요하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믿음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당신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거나 깨어 있지 못함으로 당신의 악한 본성에 순종하여 더럽혀졌다면 당신에게는 씻음이 필요하다. 어떤 종류의 더러움이든 그것은 당신을 주님의 임재에서 떠나게 할 수 있다. 단지 마음속으로 『나는 주님의 죽으심 안에 거하기 때문에 난 자유자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죄를 범했다면 반드시 주님께 그 죄를 자백하고 주님의 보혈의 씻음을 구해야 한다. 주님의 죽으심은 단번에 이루어졌지만 이 보혈의 효능은 영원하다. 이것은 구약에서 붉은 암송아지로 예표되었다(민 19:2-22). 붉은 암송아지는 죽임당하여 더러움이 있을 때 사용하도록 재만 남기게 되어 있다. 세상 죄인은 속죄를 위한 희생이 필요할 뿐 아니라 또한 마땅히 이 희생의 「재」를 사용해야 한다. 주님의 희생도 이와 같다.
어떤 장소에서는 죄를 자백할 필요도 보혈의 씻음을 구할 필요도 없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러움은 안에서 올 수 있는가 하면 밖에서 올 수도 있다. 우리는 세상과의 접촉으로 더럽혀질 수 있다. 우리가 들이마신 도덕적인 공기로도 우리는 오염될 수 있다.
생명의 정결케 하심은 하나님과 왕래하고 교통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항목이다. 우리는 시편 24편 3절과 4절에서 이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혼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원문참조).
「손이 깨끗하며」는 우리가 만지는 사물을 가리킨다. 민수기 19장은 의도적으로든 부주의로든 무의식중에든 사람의 시체를 만지는 사람은 외면상 부정하게 되므로 구속받고 경배하는 무리와 끊어짐을 보여 준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보다 더 깊은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의 생명을 위해 열심을 내신다는 것과 사람이 죄를 만지면(사상이든 사물이든) 하나님과의 교통을 상실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가운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를 더럽힌 사물을 만진 적이 없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므로 피뿌림은 필수적인 것이다.
「청결한 마음」은 생명의 근원을 가리킨다(잠 4:23, 마 15:18-19). 우리에게 있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은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이다. 오직 신성 안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다. 이 신성이 마땅히 우리를 다스려야 하는데 신성은 믿는이가 믿음을 사용하여 옛 성품을 십자가에 넘길 때만이 다스릴 수 있다.
우리의 악한 본성은 보혈과 무관하며 오직 못박혀야만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롬 6:6).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 씻음은 끊어진 교통을 제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악한 본성의 활동으로 생긴 더러움에 머물지 못하게 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혼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혼은 자애(自愛)의 중추-교만, 곧 사람에게 드러나고 알려지며 높임받기를 좋아하는 「나」-이다. 이것은 바로 흔히 『나는 그들과 같지 않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하는 영성의 교만이다. 이 영성의 교만의 소유자는 가장 영적인 믿는 이의 마음 속에 몰래 들어와서 그들을 더럽히고, 다른 사람과 끊어지게 하고, 남의 일을 교정해 주기를 좋아하며, 남의 흠을 잡기를 좋아하는 영으로 성도를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주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그들도 빛 가운데 거한다면 그들은 서로 교통이 있게 된다. 즉 그들이 성도들과 교통을 나눌 때 주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들의 죄를 깨끗게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요일 1:8). 스스로 의롭다 하는 성품은 우리를 정죄하지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이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짓는 성품이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씻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구원받은 죄인이 주님 앞에서 취할 자세는 바로 『내 죄를 시인합니다.』이다. 보혈을 믿는 믿음이 그를 위해 변호한 결과 그는 성도들과의 교통을 갖게 된다.
사탄을 이기는 장소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속량하셨을 뿐 아니라 더욱 우리의 영적 원수인 사탄을 패배시키셨다. 이것은 골고다에서 그분이 성취하신 가장 중요한 항목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내적으로 죄의 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 사탄이 그의 주인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의 이 방면에서의 역사를 모른다면 죄와 싸우는 지위가 약화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골고다의 승리 안에서만 사탄의 권세의 더욱 심한 현재의 활동을 대적할 수 있다. 사탄은 하늘로 향한 교회의 길에 이미 그 권력을 확장하였다. 이것은 주님이 이 땅에서 왕 노릇하기 위해 다시 오실 시기를 지연시켰다. 이 권력은 영에 속한 것이고 죄스런 것이므로 오직 영적인 병기라야 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마귀가 교회를 실패하게 할 수는 있어도 『마귀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저지할 수 있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이기는 믿는이들은 그분과 함께 권세를 잡고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오늘날 이 땅에서 주님과의 연합을 통해 승리를 배우고 영 안에서 권세를 잡고 다스리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속된 일로 점유되어 있어 영적 세계에 속한 것들에 대한 인식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상당한 영적인 두되를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자주 실패한다. 이는 그들이 아직도 죄악의 권세를 대적할 전신갑주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귀가 그들의 일을 공격하고 그들을 일 가운데 혼미케 할 때 그들은 여전히 그 공격의 근원을 모르기 때문에 항복하고 실패하게 된다. 원수는 그들의 일을 방해할 뿐 아니라 그들의 생명까지도 미워한다. 원수는 언제나 그들이 좌절하는 분위기에 떨어지기가지 그들의 가정에 혼란과 분쟁과 오해가 끊이지 않게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것들이 그들의 체험에서 사실임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들을 피동적으로 따라가는가? 이것들을 이기는가? 우리가 그들을 대적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공격의 참 근원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사탄을 잊어버렸다. 그가 우리를 괴롭히는(소리 없이 교활하게) 근원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열려 이 원수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우리 개개인이 흑암 권세와 영적 전쟁을 하도록 부르심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더 큰 안목으로 죄가 사람을 다스리는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사탄은 교회를 반대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자이다. 우리는 또한 이것들(앞에서 언급한 가정의 혼란 등)이 예사롭지 않은 사탄에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연합을 통해서만이 그것들을 대적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해야 마귀와 그의 군병들을 이길 수 있는가? 오직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과 영 안에서 골고다가 사탄이 완전히 패배한 곳임을 앎으로서이다. 원수는 얼마나 이 교리를 봉쇄하려고 하는지 모른다! 그는 교활하여 얼마나 우리를 수치와 실패 가운데 떨어지게 하려는지 모른다. 요한복음 12장 31절과 32절은 들리워진 그리스도가 바로 사탄을 패배시킨 분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그분은 어디에서 들리우셨는가? 보좌 위에서인가? 아니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들리우셨다. 33절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골로새서 2장 15절을 읽어 보자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로새서에서의 바울의 모든 이론은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승리하셨는데 우리가 그들(원수)의 권세에 순종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과연 그럴 필요가 있는가? 주님의 죽으심은 사탄과 그의 군병들을 완전히 진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 속에 이러한 승리가 이루어지려면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로 돌아가 흑암의 권세, 곧 교활한 음모로 이 세상 권세를 잡은 사탄의 악한 영들을 대적하도록 십자가를 붙들기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승리 가운데 서 있을 때 악한 영들이 이루고자 하는 일들은 저지당하고 만다.
이것을 깨달은 성도는 그의 개인적인 전쟁이 전체 전쟁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 마귀는 그의 워털루(Waterloo)에 가까이 왔다!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하늘의 갑옷을 입으라. 입기를 배우라. 주님의 진영에 무능한 자가 되지 말고 노련한 정병이 되자.
거짓 전쟁의 날은 이미 지나갔고 참된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신의 원수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당신 안에 계신 주님은 그들보다 더욱 강하시다. 그들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 예수님의 상처받은 얼굴을 바라보라! 주님은 곧 영광 가운데서 가련하고 분란한 이 세상에서 다스리실 것이고 당신은 해와 같이 빛나는 주님의 얼굴을 보리라.
워치만 니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영적 전쟁, "십자가로 돌아가라",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