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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는 시대에서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 있다
주님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징계하신다고 말한다(히 12:6). 인간은 누구를 사랑할 때 눈이 멀지만, 하나님은 사랑하실 때 그를 징계하신다. 사람은 누구를 사랑하면 느슨하게 행동하지만, 하나님은 사랑하실 때 진지하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그분은 그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면 그분은 결코 우리를 징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징계하는 사랑은 그분이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심으로 구속을 이루신 그 사랑과 동일하다. 그분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이 있고 그분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징계와 하나님의 은혜가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낸다. 일단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다시 멸망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징계가 이생에만 있는지 아니면 내세에도 있는지에 있다. 아마 어떤 사람은 이 문제에 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점을 자세히 보기로 하자.
성경은 하나님의 징계가 이생에만 있지 않고 내세에도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이생에만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우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의하면 내세에도 징계받을 가능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꼭 이생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을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헌신의 생활을 하지 않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자기 뜻대로 살며 많은 불순종의 일을 행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외적으로 주님을 위해 열심을 내고 일을 하며 심지어 기적과 기사를 행했으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뜻을 쫓아 그것들을 행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현저한 죄와 특별한 과실을 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당신은 하나님의 징계를 발견할 수 없고 도리어 그들은 일생 순조롭고 또 안연히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장래 왕국 안에서 상급을 잃게 될 뿐 아니라 또한 징계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러한 사람들에게서 적극적인 역사를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체험에 의하면, 만일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정욕을 좇아 행하고 세상을 사랑하며 자기 뜻대로 행했다면, 이러한 사람은 내세에 징계를 받게 된다. 이것에 대해 성경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징계의 목적은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징계는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은 더럽기 때문에 정결케 될 필요가 있다. 성경에는 한 종류의 정결케 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첫번째 종류의 정결케 함은 피의 정결케 함으로써 주 예수님의 보혈에 의해 정결케 되는 것이다. 성경은 피의 정결케함에 관하여 삼백여 번이나 언급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두 구절만 언급하겠다.
히브리서 9장 22절 :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여기서는 피로 정결케 되는 것을 말한다. 히브리서 1장 3절 하반절 : 『(그가)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주 예수님이 그분의 피로 우리를 정결케 하심이 있음을 본다. 주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죄를 정결케 하신 후에 높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이것이 성경에서의 첫번째 정결케 하심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님의 피에의해 정결케 하심을 얻었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여전히 많은 더러운 사상들과 세상에 의한 더렵혀짐과 육체의 죄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또다른 방법으로 정결케 하신다. 이러한 정결케 하는 방법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징계와 질책이다.
요한복음 15장 2절에서 주님은,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말한다. 가지로 더 많은 과실을 맺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열매 맺는 데 있어서 중요하지 않고 쓸모없고 장애되는 것들을 제해버리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징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우리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영광을 얻고 거룩케 되고 우리 앞에 놓인 의를 얻기에 합당하게 되도록 우리를 온전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두 노선 곧 두 종류의 정결케 하심을 본다. 첫번째 종류는 주 예수의 피의 정결케 하심이고, 두번째 종류는 환경과 가정과 건강과 사업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정결케 하심이다. 만일 당신이 합당치 않은 것을 행하고 끊어버려야 할 것을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당신의 몸과 환경에 하나님의 징계의 손이 임할 것이다.
내세에서의 정결케 하심
이제 문제는 하나님의 이러한 정결케 하시기 위한 징계가 이생에만 있는 것인지 또는 내세에도 있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성경을 읽는다면, 죽음이 결코 사람을 바꿀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성경 전체에서 죽음이 우리를 바꾼다고 말한 곳을 볼 수 없다.
우리는 장래에 우리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것임을 안다. 영원 안에서 주와 같이 될 것이다. 우리는 주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케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우리가 주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영원 안에서 주와 함께 거하기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주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정결케 하고 우리의 범죄가 정결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우리의 체험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가? 우리는 부활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살아 나타나시도록 했는가? 오늘날 우리의 생활과 영원 안에서의 생활은 완전히 다르고 거리가 먼 것일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거룩과 공의와 영광에 너무나 합당치 않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더러움으로 가득하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게 된다. 즉 오늘 우리가 좋지 않다면 어찌 내세에 좋을 수가 있으며, 이생에 완전하지 않다면 어찌 내세에 완전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변화는 대체 어디에서 일어나게 되는가?
당신에게는 변화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 당신이 완전하지 않고 그날에 가서 완전하게 된다면, 그러한 변화는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영원 안에 들어갈 때 당신은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및 어린양과 함께 있게 되는데, 그 때 당신은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빛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언제 이루어지는가?
사람들의 사상은 죽은 후에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는 육신의 죽음이 우리를 거룩케 한다는 것을 볼 수 없다. 오륙백 년 전에 이러한 교리를 전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성경에는 죽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말이 없다. 만일 죽음이 그리스도인을 변화되게 할 수 있다면, 그 죽음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도 변화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은 결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게으른 종은 부활할 때에도 여전히 게으르고, 미련한 처녀는 깨어날 때에도 여전히 미련한 것이다. 그들의 깨어남은 그들의 게으름과 미련함을 변케할 수 없었다(마 25:1-30). 사람이 이생에서 변화되지 못하고, 죽음도 사람을 변케 하지 못하는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바뀌어질 수 있다면, 그 변화는 어느 때 발생하는가? 성경은 내세에 또 한 가지 징계가 있는데, 그 징계가 우리를 정결케 되도록 씻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종들 중에 내세에 질책받을 사람이 있다
내세의 징계에 관하여 우리는 누가복음 12장 45절부터 48절을 보기로 하자.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않은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예비치 않은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한 가지 분명히 해 놓아야 할 사실은, 여기서 말하는 종이 주님께 속한 자이고 그리스도인이며 구원받은 사람인가의 여부이다. 여기의 종은 분명히 구원받은 사람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첫째로, 신약에서 하나님은 그분께 속하지 않은 사람을 그분의 종으로 삼지 않으셨다. 구약에서는 사람들이 먼저 종이 되고 그 다음에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구약에는 구원받지 않은 종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순서가 뒤바뀌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자는 결코 하나님의 종 될 자격이 없다. 신약에서는 모든 종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종은 분명 구원받은 자이다.
둘째로, 윗 문장의 42절은 45절부터 48절에서 말한 종이 구원받은 사람임을 증명한다. 42절부터 46절은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않은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43절과 44절에서 말한 종과 45절과 46절에서 말한 종은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여러분은 같은 분류임을 볼 것이다. 43절, 44절의 종이 바로 45절의 종이다. 동일한 사람이 착한 종이 될 수도 있고 악한 종이 될 수도 있다. 이 종은 두 가지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만일 그 종이 주인이 맡기신 것에 대해 신실하고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줄 안다면, 주인이 오실 때 그에게 상을 주시고 모든 것을 맡기며 관리하게 할 것이다.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이르기를, 『주인이 더디 올 것이니 나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면서 노비를 때린다면, 주인이 오셔서 그의 죄를 심판하실 것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이 착한 종이 될 수도 있고 악한 종이 될 수도 있음을 증명한다.
만일 구원받은 사람이 불행하게도 악한 종이 되었다면, 그의 종말은 어떻게 되겠는가? 46절 :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않은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이 질책은 이생의 것인가, 내생의 것인가? 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은 언제를 가리켜 말한 것인가? 주인이 올 때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것은 장래의 일이다. 주 예수님은 종 된 자가 충성스러울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신다. 충성스럽지 못한 종에 대해서는 주인이 오셔서 그에게 상을 주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의 죄를 심판하시고 또한 엄한 질책을 하시게 된다.
47절, 48절의 말씀은 46절에 근거한 것이다. 주님께 속하고 주님의 일을 하는 우리가 장차 당하게 될 일들은 무엇인가?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알지 못한 사람은 매를 맞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고 적게 맞는다고 말했다. 어쨌든 매는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분은 알지 못한 사람을 용서하실 수 없다.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알지 못한 사람이 매를 맞을 일을 행한다면, 그는 매를 맞기는 맞아도 남보다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고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이 장래 질책하시는 원칙이다. 누가복음 12장 47절 48절은 장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받을 질책을 결정해 준다.
나는 여기서 은혜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사람이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 이것은 누구도 전복시킬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 우리의 행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치 않다면, 장래 우리는 질책을 받게 된다. 나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성경에서 말한 것을 전파할 뿐 성경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장래에 질책을 받게 되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나는 모른다. 주님께 가서 물어보라. 나는 다만 성경이 말한 것을 말할 뿐이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다.
또한 골로새서 3장 23절-25절을 보기로 하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이 부분의 문맥은 여기서 언급된 사람이 불신자가 아닌 그리스도인임을 분명히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 구절들 앞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아내 또는 남편이 되고, 부모와 자녀가 되며, 주인과 종이 되는가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것을 말한 후 바울은 행위가 의롭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불의에 대한 보응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 이 부분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보응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있을 것임을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준다. 만일 오늘 우리가 불의를 행한다면, 그날 우리는 불의의 보응을 받게 된다. 만일 오늘 우리가 의를 행한다면 또한 의의 보응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당신은 장래 그리스도인이 어떤 처벌과 질책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장래 우리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보응을 받게 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고린도 후서 5장 10절을 보기로 하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받으려 함이라』.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공중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다 휴거된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이 휴거되는가? 성경에서 볼 때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휴거되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는 휴거되지 않는다. 구원받지 않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은 이러한 심판을 받을 자격이 없다. 이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의 심판이다.
이 구절은 장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게 될 것인가를 말해 준다. 그분은 각 사람의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그들에게 보응하실 것이다. 각 사람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선악간에 보응을 받게 된다. 만일 당신이 몸으로 선을 행하면 선한 보응을 받게 되고 몸으로 악을 행하면 악한 보응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행함이 합당한 사람은 심판대 앞에서 상급을 얻게 되고 합당치 않은 사람은 상급을 잃게 되며 또한 악한 보응을 받게 됨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장래 심판이 있기 때문에 성경에는 사람들이 장래 긍휼하심을 얻을 수 있도록 사도가 기도한 것이 있다. 디모데 후서 1장 18절 :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오네시보로라는 사람이 그 날에 긍휼을 얻기 원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이 심판대 앞에 설 때 기껏해야 상급을 얻지 못할 뿐이고 형벌과 징계는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 듯하다. 『나는 오네시보로가 주님의 심판을 받을 때 긍휼하심을 얻기 원한다. 저가 얼마큼 나를 섬겼고 나와 함께 복음에 참여하였는지... 그 날 심판대 앞에서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면 주께서 저를 긍휼히 여기시기 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현재 사함을 받는 것이 다 필요할 뿐 아니라 천년왕국의 시작 곧 심판의 때에도 하나님의 질책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것이 필요함을 보아야 한다.
4장에서 또 한 구절을 보자.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5절에서 바울은 그가 아시아에 있을 때에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버렸다고 말한다. 그가 왕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그를 피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이렇게 자기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장래 하나님이 우리 허물을 심판하실 것임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했다. 성경의 충분한 빛은 우리에게, 구원받은 후에 이생에서 징계를 받아도 돌아서지 않거나 이생에서 제멋대로 행해도 징계를 받지 않은 사람은 장래 심판대에서 상급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확실히 질책을 받게 됨을 보여준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주 예수님은 성령을 훼방한 일에 대해 말한다. 주님은 인자에게 범한 모든 죄는 사함을 받지만 성령을 훼방한 죄는 결코 사함받지 못한다고 하셨다. 이러한 죄는 현세에서 사함받지 못할 뿐 아니라 내세에서도 사함받지 못한다(32절).
성경에서 내세는 왕국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원문에서 내세의 「세(관)」자는 코스모스(cosmos)가 아니라 아이온(aion)이다. 만일 코스모스(cosmos)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면, 이것은 세상의 조직을 가리켜 말한 것이므로 세상이라고 번역해야 합당하다. 그러나 아이온(aion)을 사용했다면, 이것은 세상의 시간을 가리키므로 시대로 번역해야 합당하다.
그러므로 내세는 오는 세상이 아니라 오는 시대이다. 오늘은 은혜 시대이고 장래 오는 시대는 주님이 오셔서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는 시대이다. 마태복음 12장의 이 부분을 읽을 때, 당신은 사람의 죄가 사함받는 시기가 두 기간임을 볼 수 있다. 어떤 것은 이생에서 사함받게 되고 어떤 것은 장래 시대에 사함받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징계를 받아 이생에서 사함을 받게 된다. 오늘날 행함이 좋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왕국 안에서 사함을 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때 사함을 받았으나 여전히 죄를 범하여 왕국 안에서 사함받지 못하고 도리어 엄한 질책을 받게 된다. 이것이 성경에서의 질책에 대한 가르침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질책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죄를 범하고서 현 시대에 하나님 앞에서 깨끗이 처리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장래에 여전히 질책을 받게 된다.
왕국 시대는 곧 질책을 받는 때이다
장래의 질책은 어느 때 있게 되는가? 내가 말했듯이 이것은 내세 곧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게 어느 시기인가?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 있는 세 시대에 대하여 보기로 하자. 오늘날의 시대를 가리켜 은혜 시대라 부를 수 있고, 복음 시대 혹은 교회 시대라고 부를 수도 있다. 오는 시대는 왕국 시대 혹은 천년왕국 시대라고도 부를 수 있다. 이는 그 시기가 천 년이기 때문이다(계 20:6). 이 시대가 지난 후에 또 하나의 시대가 있는데, 그것은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대이다.
성경에는 도합 이 세 시대가 있다. 교회 시대가 은혜 시대인 이유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하나님은 모든 불의한 사람을 구원하시고 사람에게 주 예수의 은혜를 가져다 주신다. 이 시대에서는 모든 것이 다 은혜이다. 오는 시대는 공의의 시대이며, 다시금 영원한 시대는 은혜시대이다. 오늘날과 새 하늘 새 땅에서는 전적으로 은혜에 대하여 말하지만, 왕국에서는 순전히 공의에 대하여 말한다. 만일 이것에 대해 분명하지 않다면, 성경에 대한 당신의 이해는 그릇된 것이다. 교회 시대와 새 하늘 새 땅의 시대는 모두 은혜 시대이다. 그러나 천년왕국은 하나님이 충성된 자에게 상급을, 범죄한 자에게는 질책을 주시기 위해 특별히 정해 놓으신 시기이다. 이 시기는 특별한 시기이다.
신약과 구약 모두 우리에게 천년왕국의 시기가 하나님이 공의로 사람을 대하시는 때임을 말해 준다. 시편 72편 2절, 85편 10절-13절, 96편 13절, 97편 2절, 이사야 11장 5절, 26장 9절, 33장 5절, 62장 9절, 예레미야 33장 15절, 다니엘 7장 27절을 읽어보라. 신 구약에서 왕국 안에서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한 구절을 최소한 이백 여 구절을 찾아 낼 수 있다.
왕국과 새 하늘 새 땅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성경은 이 두 가지를 매우 분명하게 구분짓는다. 계시록 19장 6절-8절을 보자.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이것은 왕국의 시작임을 주의하라)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이 구절들은 신부에게 세마포 옷이 주어졌다고 말한다. 비록 주어진 것이지만 거기에는 의가 있다. 세마포 옷은 믿는이들의 옳은 행실이다. 원문에서 여기의 의는 행함이 있는 의로서, 능동적인 행함의 뜻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의이다.
또 20장 4절부터 6절을 보기로 하자. 『또 내가 보좌를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이 구절들은 다스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왕국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순교자들을 위한 것이며, 사탄과 적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만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직 순교자들만이 왕 노릇 할 수 있고 사탄과 적 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들만이 왕 노릇 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이 천년왕국을 얻는 것이 값없는 은사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선한 행실로 인한 것임을 우리에게 증명해 준다.
물론 다른 곳에서 다른 분류의 사람들이 왕 노릇 하게됨을 볼 수 있겠지만, 계시록은 우리에게 특정한 의를 가진 사람만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고 주를 위해 순교한 자만이 왕 노릇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특정한 의가 없고 순교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왕 노릇 하는 데 참여할 수 없다. 이것이 천년왕국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대
여기서 계시록 21장 1절부터 7절까지를 보기로 하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계시록 19장과 20장에서 말한 왕국과 21장에서 말한 새 하늘 새 땅은 그 묘사에 있어서 완전히 다르다. 왕국에 대해 말할 때 여러분은 사람이 무엇을 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새 하늘 새 땅에 대해 말할 때 사람이 무엇을 했다는 것을 볼 수 없다. 21장을 1절부터 계속 읽어 갈 때, 당신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음을 본다. 하나님은 그분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였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전의 하늘과 땅이 다 지나가고 바다도 더이상 있지 않다고 하셨다. 이 모든 것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 가운데 임하게 될 것이고, 그분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분은 친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실 것이며,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갔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모든 말이 믿을 만한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이 알파요 오메가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사람은 어떠한 지위도 없다. 많은 것을 말했지만, 이 부분은 모두가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셨다고 말하며 결코 어떤 조건이나 요구를 언급하지 않는다. 당신은 이렇게 좋은 새 하늘 새 땅을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들어보라.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이 많은 말을 하신 후에 다음 한 마디로 이제까지 말씀하신 것을 결론 지으셨다.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무릇 목마름을 느끼고 마실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그에게 주신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다. 은혜는 값없이 당신에게 생명수 샘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은혜에 속한 것이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새 하늘과 새 땅은 순전히 그분이 당신에게 주신 것이다.
다음 구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여기서 요한이 말한 「이기는 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여기서 말한 이기는 자는 계시록 시작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보낸 서신에서 말한 이기는 자와 다르다. 여기서의 이기는 자는 세상 사람과 구별되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말한 것이지 일반 그리스도인과 다른 종류의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다. 계시록 3장의 이기는 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이기는 자를 가리키고 계시록 21장의 이기는 자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이긴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어떻게 해야 생명수의 강물을 마실 수 있는가? 믿음을 통해서이다. 믿는 자는 이것을 얻을 수 있다. 값없이 생명수 샘물을 마시려면 믿어야 한다. 우리로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다(요일 5:4절).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과 비교해 볼 때 다 이기는 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끼리 비교해 본다면 그들 중에 많은 패배가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과 비교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그들에게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다 이기는 자이다. 무릇 생명수 샘물을 마신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게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며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
22장은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언급한다. 1절-5절 :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새 예루살렘성에 있는 한 가지 중요한 항목은 바로 생명수의 강이다. 이 생명수의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왔다. 생명수이기에 생명나무가 있고 거기서 생명의 과실이 자라나오는 것이다. 계시록 22장에 이르러서 모든 것을 다 말한 후에 한 가지 강조한 것이 있는데, 바로 생명수의 강물이다. 이 생명수의 강은 성을 감돌며 흐른다. 어떻게 우리는 이 생명수의 강물을 누릴 수 있는가? 계시록 끝부분에 이르러서, 왕국이 지나가고 교회 시대도 지나 갔을 때 17절은 이렇게 말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바꾸어 말하면, 그때에는 모든 사람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온 것으로 인해 환영받는다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하나의 보좌가 있는데, 보좌 아래에는 하나의 강이 있고 이 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보좌를 그 근원으로 삼는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이다.
왕국에서는 어린양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반면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여러 번 어린양의 이름을 언급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22:1),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21:22).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31:23).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어린양을 언급했다는 것은 그때가 은혜시대임을 증명한다. 계시록 끝부분에서는 교회 문제나 왕국 문제나 환난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다만 목마른 자는 누구나 와서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마실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사람들을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오도록 초청한다는 뜻이다. 그때 모든 것은 값없이 얻어질 것이다. 값없는 것은 은혜이다. 우리는 새 하늘 새 땅과 왕국이 별개의 일임을 본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계시록의 이러한 가르침에 근거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은 은혜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고 왕국은 공의로 그리스도인을 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질책하시는 시기가 왕국 시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모든 것은 다 값없이 주어지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의 문제와 장래 문제와의 관계를 본다. 만일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육체를 좇아 제멋대로 생활한다면, 오는 시대에 하나님의 질책을 받게 된다. 그러나 만일 오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면, 장래 하나님의 은혜와 상급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알려준 세 시기에 관한 가르침이다. 여기서 나는 내가 한 말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세에 이러한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이 하신 말씀을 스스로 책임 지신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음을 알 뿐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왕국은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들을 다루시는 때이다. 만일 오늘 당신이 제멋대로 생활한다면 장래에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영원 안에서의 확고함이 있지만, 일시적인 위험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의 확고함이 있지만, 또한 왕국에서의 위험도 있다. 왕국 안에서 우리는 심한 형벌과 중한 질책을 받게 될 수도 있다. 구원받는 문제는 주 예수님의 역사로 인한 것인 반면에 상을 얻는 문제는 당신의 행위로 인한 것이다. 구원은 주 예수님의 행위로 인한 것이고, 상을 얻는 것은 당신의 행위로 인한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뜻을 좇아 행하고 자신의 뜻을 좇아 행하지 않았다면 상급을 얻게 된다. 우리가 얻은 은혜를 귀히 여기고, 하나님께 경고를 받아 왕국의 상급을 추구하게 되기를 바란다.
워치만 니
[워치만니 전집 29, 하나님의 복음 제 22장,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