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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요한 일서 2:5-6, 24, 27-28, 3:6上, 24, 4:4, 12下-13, 15-16. 5:20, 요한복음 14:17, 20, 15:4上, 17:21
만일 우리가 성경과 성경의 가르침들에 대해 전혀 생소한데, 누군가가 우리에게 와서 『나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그를 정신이상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 안에 있을 수 있으며, 하나님이 사람 안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와 같은 표현들에 꽤 익숙해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 그분 자신인 인격이 실지로 우리 안에 거할 수 있고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이 어떠한 비밀인지를 상고해본다.
하나님은 누구이며, 그분은 어디에 계시는가? 어떻게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는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단지 그분의 능력이나 사랑만이 아니라 바로 그분 자신이다. 우리가 지금 이 건물 안에 거하고 있다든가, 우리가 우리의 육체적인 몸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은 알기가 쉽다. 그러나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하나님에 관해 우리가 그분 안에 있고 동시에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어리석은 미신이 아닐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분명 이것이 미신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고, 성경이 밝히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체험하는 바이다.
거함에 대한 첫번째 언급
요한복음 14장 이전까지는 성경이 사람이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사람 안에 거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결국 하나님과 친밀하게 되었던 아브라함과 야곱에 대해 읽지만 그들이 그분 안에 거했다는 언급은 없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사십 일 동안 머물렀고 그로 인해 주입되어 그의 얼굴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났던 모세를 본다. 그럼에도 모세가 하나님 안에 거했다거나 그분이 모세 안에 거했다는 기록이 없다.
우리가 구약 전체를 살펴볼지라도,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안에 거할 수 있다고 지적한 구절은 찾아볼 수 없다. 구약에서 가장 익숙한 책인 시편을 보면 시편 기자들은 성전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고 주의 집의 살진 것들을 누리고 있었지만(시 27:4, 36:8), 그들이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지는 않았다. (비록 시편 90편 1절에서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신약에서 계시된 주님 안에 거하는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과 매우 가까왔던 선지자 다니엘조차도 그가 실지로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언급한 적이 없다.
구약의 나머지 부분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이며, 신약에 들어와서도 이것은 계속된다. 마태복음은 놀라운 책이지만, 사람이 하나님 안에 거한다거나 하나님이 사람 안에 거한다는 말은 없다. 마가복음, 누가복음 또는 요한복음 13장까지에서도 역시 이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요한복음 14장을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자! 『내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2-3).
주 예수님이 「나 있는 곳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무엇을 뜻하셨는가?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은 「천국에」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14장을 계속해서 읽어볼 때, 10절과 11절에서 분명히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다음 주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그들 스스로는 아버지 안에 거할 수 없고, 그들을 하나님 안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먼저 그 길이 열려야 한다고 설명하셨다.
그리스도 자신이 죄들과 죄와 옛 본성과 자아와 사탄과 세상 등의 장애물들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셨다.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신성한 인격 안에 있을 수 있도록 그 길을 닦으신 것이다. 그분은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시고 모든 좌절시키는 요소들을 끝내셨다. 20절에서 주님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성취하신 후 그분이 부활하시는 그 날에 제자들이 아버지 안에 계신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셨다. 그분이 있던 그곳에 그들도 있게 될 것이다.
누가 누구 안에 있는가?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은 신성과 인성의 놀라운 연합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신다.
요한복음 15장은 14장의 사상의 연속이다. 우리가 일단 하나님 안으로 이끌리면, 우리는 반드시 그분 안에 거하게 되며, 그분도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다(4절). 우리는 아들 안에 있고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신다. 지금 우리의 필요는 거기에 머무르는 것이다.
흠정역에는 거하다(abide)에 대한 다섯 가지의 서로 다른 번역이 있는데, 그것들은 거하다(abide-14:16, 15:4-7, 10), 거주하다(dwell-14:10, 17), 현존하다(being present-14:25), 지속하다(continue-15:9), 남아 있다(remain-15 11 16) 등이다. 하나의 헬라어 단어를 번역하기 위해 이처럼 많은 다른 용어들을 쓴 것은 그 단어의 의미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나타낸다. 이제 우리가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곳에 머물러야 하며, 그분 안에 남아 있어야 하며, 그분 안에 거주해야 하며, 그분 안에 정착해야 하며, 계속해서 거기에 있어야 한다.
요한 일서에서는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단지 두 번 언급한다(2:5, 5:20). 이 서신서의 대부분은 거함에 관계된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졌고, 따라서 요한 일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우리가 넣어진 그곳에 머물러야 할 필요성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말씀이나 그분의 사랑이나 그분의 능력이나 그분의 선하심이 아닌 바로 그분 자신 안에 거한다.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지 말라. 주 예수님은 이를 위해 기도하셨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 17:21). 삼일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은 말로 하기에는 너무나 놀라운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사도행전으로부터 시작하여 「안에」라는 작은 단어가 거듭거듭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 쓰였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롬 8:1, 고전 1:30). 로마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구(句)를 거듭 발견하게 된다. 에베소서라는 짧은 책 안에서도 얼마나 자주 「그분 안에」를 말하는지 살펴보라. 그분 안에 있는 것은 어떤 놀라운 장소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옮겨졌다. 물론 나는 중국에서 미국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 옮겨짐은 중요하지 않다. 훨씬더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담에게서 나와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천국에 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옮겨졌다(골 1:13). 우리는 아담에게서 태어났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할렐루야!
사실을 봄
성경 자체는 사실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는 지를 말해주고 있지 않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보자마자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상을 보는 것이 사실 안에 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마 교리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선포할지 모른다. 그러나 참으로 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심지어 이 메시지를 준비하면서도 나는 그분 안에 거하는 방법에 대한 어떤 암시가 조금이라도 있는지 보려고 서두에 실린 모든 구절들을 여러 번 검토해 보았다. 거기에는 아무런 암시도 없었다. 거한다는 사실은 있지만, 거하는 방법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우리는 우리가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지에 대해서는 들었지만, 어떻게 해야 그분 안에 거하는지에 대해서는 듣지 못한다. 참된 거함이란 사실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방법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가능해졌는가
우리가 삼일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고, 그분으로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엄청난 사실이다. 이 사실이 실현될 수 있기 전에 성취되어야 할 많은 것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영광이 충만하신 분이셨다. 그분은 사람 안으로 들어오실 수 없었다. 하나님이 사람의 본질 안으로 들어오시기 위해서는 성육신의 필요가 있었다. 타락된 옛 창조를 종결시키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심이 필요했다.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들을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구속이 있어야 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화목제물이 있어야 했다. 구속된 창조를 신성한 상황 안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부활이 필요했다.
이 모든 것은 지금 성취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 이것이 성육신이다. 육신이 되신 그분은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고 우리의 죄들을 없애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 그리고 나서 부활하심으로 마지막 아담이신 그분은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고전 15:45). 그 영이신 그분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생명으로 분배하신다.
만유를 포함한 영
오늘날 우리 하나님은 단순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분은 인성 또한 지니고 계신다. 인성 안에서 그분은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셨고, 그분의 구속되고 높여진 인성을 그분과 함께 부활 안으로 이끄셨다. 만유를 포함한 영이신 이 하나님이 바로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이시다.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그리고 영으로서 그분은 우리 안에 거주하신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삼일성에 대해 세 개의 분리되고 구분되는 인격들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이 말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칠 년 반 동안 나 자신도 형제회를 접촉하면서 그들의 가르침에 열중했었다. 나는 기도를 오직 아버지께만 드려야 한다고 배웠다. 사람들이 성령이나 주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기도할 때마다 나는 성령의 힘을 통해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기를 주의했다. 얼마동안 나는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에 만족했는데, 이는 그것이 나의 교리적 개념에 부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점차 나는 나의 기도하는 대상이 되는 분이 내게서 멀리 떨어진 천국에 있지 않고, 바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분은 단지 아버지만이 아니라 또한 아들이시기도 하다. 나는 종종 내 자신이 내 안에 계신 주님과 대화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 결국 나는 이 교리가 하나님을 그 안에 맞추기엔 너무나 제한적임을 알게 되었다.
삼일성의 셋은 하나이다. 물론 성경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문제가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람 안으로 분배하시기 위해 삼일이 되셨다. 그러나 일단 그분이 사람 안에 계실 때, 그 셋은 하나이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신다. 아들은 그 영이 되셨다. 하나님은 영으로서 사람에게 도달하신다. 그 영이 우리에게 도달하실 때, 아들이 거기 계신다. 아들이 거기 계실 때, 우리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계신다.
우리가 『오, 주 예수여!』라고 부를 때 그 영이 오신다. 왜냐하면 그 영은 곧 주 예수님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름 또는 칭호라 할 수 있고, 그 영은 그분의 인격이다. 우리가 만일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가르침들을 따른다면, 우리는 혼돈될 것이다. 나는 하나의 교리적 요점을 만들어내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기 원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하나님이 단지 창조주만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에게 새겨주는 것이다. 그분은 단지 근원으로서의 아버지나 과정으로서의 아들만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도달하는 흐름으로서 그 영이시다. 우리에게 도달하시는 그 하나님은 아버지나 아들로서가 아닌 그 영으로서 그렇게 하신다. 이 만유를 포함한 영 안에서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를 갖는다.
그분이 영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가 그분 안에 있기가 쉬워졌다. 그것은 우리가 공기 속에 거하고 공기가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쉬운 것과 같다. 그분은 신성한 공기(pneuma ; 원문-영, 호흡)이시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를 먼저 육신이 되신 말씀으로 제시한 다음,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제시한다. 20장 22절에서 그분은 결국 신성한 호흡이 되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라.』
그분을 부르라! 이 놀라운 영은 당신에게 이를 것이고, 당신 안으로 들어오실 것이다. 당신은 그분 안에 있게 될 것이고, 그분은 당신 안에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은 그분의 능력이나 속성들 또는 영향력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분 자신, 그분의 인격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근원이신 아버지, 구속자이신 아들, 전달이신 그 영-이 신성한 인격이 당신 안으로 들어오시고, 당신은 그분 안에 있다!
거함
만일 당신이 이것을 본다면, 당신은 영원히 여기 머무를 것이다! 당신은 지금, 바로 지금, 삼일 하나님 그분 자신 안에 있다. 당신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합당한 인식을 지닐 필요가 있다. 삼일 하나님 안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삼일 하나님을 그 안에 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헐뜯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뭔가를 훔칠 만큼 낮은 위치에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신은 천사들보다 뛰어난 위치에 있다. 어떻게 그런 당신이 죄에 빠져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이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 한 가지 사실이 당신을 모든 것 위로 높이 들어올릴 것이다.
당신이 삼일 하나님 안에 있고 그분이 당신 안에 계신다는 것을 보는 것이 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봄(seeing)이 곧 거함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 어떠한 비밀인가! 이 어떠한 사랑인가! 그것은 은혜보다 더 위대하다. 그분 안에 거하라!
위트니스 리
[요한 일서에 나타난 일곱 비밀, "거함의 비밀",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