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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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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우리는 가나안 땅에 대한 것을 보기로 한다. 그것은 가나안 땅이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의 예표(豫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 이 가나안 땅 위로 건축되는 도시와 성전이 그리스도의 충만함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예표임도 보기로 한다. 우리가 깊이 생각할 것은 바로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이다. 이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와, 그리스도 위에, 그리스도의 충만함인 교회가 건축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그리스도와 교회가 아닌,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와 그의 몸, 즉 그리스도의 충만함인 교회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만유의 실제이신 그리스도
성경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보고, 만지고, 즐기는 모든 육신적인 것들, 모든 물질적인 것들은 실제가 아니다.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들은 단지 실제의 그림자요, 그림일 뿐이다. 우리는 날마다 많은 물질적인 것들을 접촉하고 있다.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며, 의복을 입는다. 주택에서 거주하며 자동차도 몰고 다닌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그것들은 오직 그림자요, 그림일 뿐이다. 우리가 날마다 먹는 음식은 참 양식이 아니고, 참된 음식의 그림일 뿐이다. 우리가 마시는 물도 참된 물이 아니다. 우리 눈 앞의 빛도 참 빛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키는 형체인 것이다.
그러면, 실제는 무엇인가? 형제 자매들이여, 실제는 오직 그리스도 자신뿐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된 음식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된 음료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 빛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의 실제가 되신다. 우리의 육신적인 생명까지도 참 생명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하나의 그림일 뿐이다. 그리스도만 우리에게 참 생명(生命)이 되신다. 당신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면 당신은 생명이 없는 것이다. 당신은, 『나는 살아 있다. 내 몸 속에는 생명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의 생명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단지 그리스도 자신인 참 생명을 가리키는 하나의 그림자일 뿐이다.
나는 매일매일 집에서 살지만 이것이 참 생활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며 깨닫는다. 어느 날 나는 주님께 이렇게 고백했다. 『주님! 이것은 저의 참 거처가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 거처가 아닙니다.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 당신 자신만이 나의 거처이십니다.』 그렇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실제의 거처가 되신다.
이제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아마 이런 일은 여러분에게 일어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양식이라는 것,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생수(生水)라는 것,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빛이라는 것,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생명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분명히 알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바로 여러분이 살고 있는 땅이라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는가? 그리스도가 바로 그 땅이다. 여러분은 날마다 이 지구의 한 부분의 땅에 살고 있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이 지구가 여러분의 실제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지구조차도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하나의 그림일 뿐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는 실제의 땅이 되신다. 음식도 하나의 그림이요, 물도 하나의 그림이요, 빛도 하나의 그림이요. 우리의 생명도 하나의 그림이요, 땅도 여전히 하나의 그림이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참 실제의 땅이다. 나는 삼십 년 이상이나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했지만, 그리스도가 나의 땅이라는 것은 최근까지도 결코 생각하지 못 했다. 나는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이요, 빛이요, 양식이요,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나의 땅이라는 것은 몰랐던 것이다.
지난 수 년 동안 주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그분을 더욱 더 체험하도록 인도하셨다. 주님께서는 그가 우리의 땅이 된다는 것을 계시하시기 전에 먼저 그가 우리의 거처 되심을 보여 주셨다. 나는 주께서 우리의 거처라는 사실을 주목하지 못한 채 이십 년 이상 날마다 성경을 읽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시편 90편 1절에서 모세가,『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라고 말한 것을 언뜻 보게 되었다. 오! 그 날 주님은 나의 눈을 열어 주셔서 그분이 나의 거처임을 보게 하셨다. 그 때 나는 주님을 더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삼년 후 주님은 나의 눈을 훨씬 더 열어주셨다. 주님은 나의 거처일 뿐만 아니라 나의 땅이심을 보았던 것이다. 주님은 나의 땅이시다. 오! 그 순간부터 왜 주님이 구약에서 항상 땅에 대해 언급하셨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주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내시면서 그를 어떤 땅으로 인도하시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땅은 바로 가나안 땅이었다. 여러분은 창세기 12장부터 구약의 끝까지 주님께서 되풀이하여 얼마나 많이 땅을 강조하시고 언급하셨는지 생각날 것이다.
『내가 네 조상에게 약속한 그 땅, 그 땅.. 그 땅.. 내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 내가 이삭에게 약속한 땅.. 야곱에게 약속한 땅.. 내가 네게 약속한 땅.. 내가 너를 그 땅으로 인도하리라』. 그가 약속하신것은 항상 그 땅, 그 땅, 그 땅이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중심
구약의 중심은 성(城) 안에 있는 성전이다. 성 안에 있는 이 성전은 그 땅 위에 건축되었는데, 성전과 성이 건축된 부분의 땅이 바로 구약 성경의 중심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의 중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성전과 성(城)이 있는 이 부분의 땅을 마음에 두고 계신다. 우리가 성경을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본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중심은 상징적으로 말해, 성전과 성(城)이 있는 그 땅임을 깨달을 것이다. 구약은 창세기 1장부터 언제나 그 땅을 중심으로 택하고, 항상 그 땅에 관련된 것을 말씀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을 보자. 아마 여러분은 한 장을 다 암송할 수 있을만큼 대단히 익숙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여러분에게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창세기 1장에는 표면 아래 깔려 감추어진 매우 중요한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땅』이다. 깊이 생각해 보라. 창세기 1장의 기록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땅의 회복이다. 하나님은 땅을 회복하기 원하셨고 그 땅 위에 무언가 역사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 (하늘들과 땅)를 창조하시니라』 땅은 어떠했는가? 땅 위에는 혼돈이 있었다. 혼돈과 공허와 깊은 바다가 땅 위에 있었을 뿐이다. 땅은 깊음 속에 묻혀 있었다. 이 때 하나님이 역사(役事)하시기 위해 오셨고, 하나님은 땅을 회복하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어둠과 빛을 나누시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셨다. 그리고 나서 땅으로부터 물을 나누어 땅이 물에서 나왔으니 그것이 바로 세째 날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깊음 속에서 나오신 것도 바로 세째 날이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것은 하나의 예표이다. 세째 날에 하나님은 사망의 물 밖으로 땅을 나타나게 하셨다. 여러분은 이 예표에서 땅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뭍, 즉 땅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러면 땅이 물에서 나온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오! 온갖 종류의 생명이 생겨났으니-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과목이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그림을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즉 주님께서 사망으로부터 나오신 후 그는 풍성한 생명을 낳으셨다. 그렇다. 그는 모든 생명을 산출한 분이셨다. 그런 다음 생명으로 충만한 이 땅 위에 사람이 하나님의 모양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바로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권위가 위임되었던 것이다. 주께서 사망에서 나오신 후, 태어난 생명의 풍성이 있었고, 이 생명의 풍성 속에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과 하나님의 권위를 소유한, 하나님의 대표인 사람이 창조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산출된 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이다. 땅은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은 그 땅 속에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공급을 누리며 이 땅 위에 살도록 창조되었다.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은 그 땅 속에 있고, 그 땅은 곧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후에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백성을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셨는지, 그의 백성들이 어떻게 그 땅에 머물면서 그 땅의 모든 풍성을 누렸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결국에는 성과 성전이 출현했다. 그 성(城)과 성전은 이 땅을 누린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성과 성전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城)은 하나님의 권위, 즉 하나님의 왕국의 중심이고, 성전은 하나님의 집, 즉 하나님의 거처의 중심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집은 그 땅을 누린 결과 생긴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느 분량까지 이 땅을 누릴 때 나타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집이다. 만일 우리가 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소유하여 그의 모든 풍성을 누린다면, 어느 한계를 지날 때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 안의 성전,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교회인 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을 구약과 신약 성경에 적용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구약에 기록된 모든 것은 정확하게도 신약에 기록된 것과 똑같다. 전혀 차이가 없다. 구약과 신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땅이 되셔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을 누릴 땅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리스도의 풍성을 얼마만큼 누린 후에는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집,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교회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중심 사상이다.
땅을 위한 전쟁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주의깊게 읽어 본다면 심각하고도 무서운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대적인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을 누리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사탄은 땅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것이다. 성경 말씀을 읽어 보라. 하나님이 인류에게 땅을 누리게 하시려고 천지를 창조하신 지 오래지 않아 사탄은 하나님을 방해할 일을 행했다. 사탄의 반역 때문에 하나님은 우주를 심판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 심판 때문에 땅은 깊은 물 밑에 잠겨버렸다. 이 일은 하나님의 계획을 얼마 동안 방해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오셔서, 우리가 이미 본 대로 땅을 깊은 물에서부터 회복시켰다. 이 회복된 땅 위에 생명의 풍성함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 받은 생명이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그 후 오래지 않아 대적이 또 다시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탄은 사람을 속였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또 다시 세상을 심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복된 땅은 한 번 더 깊은 물 속에 있게 되었다. 홍수가 나서 온 세상을 뒤덮었는데 이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이신 그 땅을 누리는 데에서 분리된 것을 말한다. 에베소서에서의 『그리스도 밖에』라는 구절을 기억하는가? 홍수의 심판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진 사람들의 예표였다. 땅으로부터 떨어진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방주의 구출을 통해 노아와 그의 가족은 땅을 소유했고 그 땅의 풍성을 누릴 권리를 얻었다. 방주는 노아의 가족으로 하여금 그 땅을 누리도록 인도했다. 홍수는 사람들을 땅으로부터 분리시켰지만 방주는 사람들을 땅으로 다시 데려갔다. 다시 한번 사람은 땅을 소유했고 그 땅의 풍성을 누렸다.
그러나 대적은 오래지 않아 그 땅을 누리는 일을 파괴하기 위하여 또 다시 더 많은 일을 행했다. 그리하여 사탄에 의해 반역하게 된 민족으로부터 하나님은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그에게 그를 한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항상 땅을 회복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대적의 일은 항상 땅을 혼돈으로 몰아넣기 위해 파괴하고 방해하며 또 무언가를 행하는 것이다. 이제 주님은 그의 택한 자를 한번 더 그 땅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 택함을 입은 자가 점점 그 땅에서부터 애굽으로 흘러 떠내려갔음을 여러분은 잘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 주님은 아브라함을 한번 더 이 땅으로 데려 오셨지만 그의 아들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이 땅을 떠나서 애굽으로 내려갔다. 오랜 후에 주님은 또 한번 애굽으로 부터 모든 백성들을 불러내시어 이 땅으로 인도하셨다. 얼마 후에 대적은 또 다시 역사하여 바벨론 군대인 갈대아 사람들을 보내어 그 땅을 약탈하고 그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리고는 또 다시 70년 후에 그들을 한번 더 이 땅으로 인도하셨다.
사실 이것이 구약의 역사(歷史)이다. 주님은 몇 번이나 이 땅을 회복하셨던가? 적어도 다섯 번 내지 여섯 번은 될 것이다. 주님은 그 땅을 창조했지만 적(敵)은 그것을 파멸시켰다. 주님은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셨지만 적은 다른 것으로 반격했다. 주님은 회복하기 위하여 다시 역사하셨지만 대적은 또 다시 역습했다. 오, 여기에 전쟁이 있다. 여러분은 보는가? 여기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구약에 기록된 이 전쟁들의 목적을 깊이 생각해 보라. 그들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싸웠는가? 여러분은 그들이 모두 그 땅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대적은 그 땅을 습격하여 한 몫 보려고 왔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위해 싸워 그 땅을 회복하려고 역사하셨다. 구약의 모든 전쟁은 이 땅과 관계 있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분량
이 땅은 무엇인가? 결코 잊지 말라. 이 땅은 곧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시다. 단지 「그리스도」가 아닌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이다. 만약 내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가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여러분은 『오,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는 그분을 모시고 있읍니다. 내게는 그리스도가 있읍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어떠한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가를 묻고 싶다. 여러분의 경험에서는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가 아닌 적은 분량의 그리스도, 즉 부족한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지는 않은가?
한가지 실지의 이야기를 하겠다. 나는 구원받은 후 곧 성경을 공부했는데, 유월절 양(洋)이 그리스도의 예표임을 배웠다. 오. 이것을 배웠을 때 나는 얼마나 주님을 찬양했던가! 『주 예수여,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어린 양입니다. 당신은 나를 위한 어린 양입니다!』 그러나 어린 양과 땅을 비교해 보라. 한 마리의 어린 양을 큰 땅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양이란 무엇인가? 여러분은 틀림없이 양을 그리스도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린 양은 작은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그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목표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결코 그들에게 『좋다. 너희들이 어린양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족하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사실상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린 양을 준 이유는 그들을 그 땅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월절(逾月節)은 바로 그 땅을 위한 것이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가? 그렇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 그러나 양인가, 땅인가? 둘 중 어떠한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가? 애굽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날 어린양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미안한 말이지만 극소수만이 그 땅에 들어왔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 땅을 점령했다.
나는 구원받은 지 1, 2년 후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즐겼던 만나도 역시 그리스도의 예표임을 배웠다. 나는 참으로 즐거웠다. 『주님, 당신은 나의 양식입니다. 당신은 나의 어린 양일 뿐만 아니라 매일매일의 만나입니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만나가 하나님의 목적이요. 목표인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출한 것은 광야에서 만나를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던가? 아니다. 그 땅이 목적이요, 그 땅이 목표이다.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땅으로 누리는지 의문스럽다.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여러분 자신도 그 점에 대해 의문스러울 것이다. 여러분은 어린 양을 유월절로, 또 주님을 매일매일의 만나로 누린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를 땅으로 누린다고 하는 사람은 정말로 극소수이리라.
골로새서 2장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았다고 말한다. 이제 나는 여러분이 다음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았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 그리스도가 땅이요, 그리스도가 바로 흙이다. 식물이나 나무는 흙 속에, 땅 속에 뿌리를 박는다. 그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았다.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가 바로 여러분의 흙이자 땅임을 깨닫지 못했을까 염려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자신인 이 땅에 뿌리 박는 하나의 어린 식물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오륙 년 전에만 해도 나는 결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성경 말씀을 읽었고 골로새서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골로새서를 읽고 또 읽었지만 결코 이러한 빛을 얻지 못했다. 그리스도가 나의 흙이요 나의 땅이라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지난 이삼년전에야 비로소 내 눈이 열려졌던 것이다. 주님의 자녀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애굽에 남아 있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된다. 그들은 단지 유월절을 경험하고 주님을 어린 양으로 먹을 뿐이다. 그들은 어린 양에 의해 구원을 받았지만 이 세상에서 구출되지는 알았다. 또 몇몇 사람은 애굽에서 나왔다. 그 사람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구출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좀더 많이 누리고 그리스도를 매일매일의 만나로 누리며, 주님을 그들의 양식으로 누려 대단히 만족하다고 자랑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형제 자매들이여, 정말 이것으로 족한가? 그리스도를 매일매일의 만나로 누리는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참으로 기쁘다.
『오. 주님을 찬양합니다! 여기 날마다 실제로 주님을 그들의 만나로 누리는 형제 자매들이 있구나!』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지 우리가 그리스도를 조금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만유를 포함한 분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 2:6) 라는 말씀을 보라. 그는 우리가 그 안에서 걸어야 할 활동의 범위요, 한계이다. 그리스도는 양식이나 음료일 뿐 아니라 걸어갈 수 있는 한계요 땅이다. 우리는 그의 안에서 걸어가야 한다. 그는 우리의 땅이요, 우리의 세계요, 우리의 왕국이다. 그의 안에서 행하라. 이 그림은 아주 분명하다. 애굽에는 어린 양이 있었고, 광야에는 만나가 있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가나안 땅이 놓여 있었다. 그것이 목표이다. 그 땅이 하나님의 목표이다. 우리는 들어가야 한다. 그 땅이 우리의 분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포함된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그것을 점령해야 한다. 그 땅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누려야 한다.
요즈음 우리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의 표현에 대해 많이 말해오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내가 만유를 포함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점령하고 체험할 수 없다면 교회의 실제는 결코 있을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여러분과 나는 흙 속에 뿌리를 박은 식물처럼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단지 말로나 이론으로가 아닌, 실제로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한다. 흙이 식물에게 모든 것이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됨을 알라. 그리스도를 체험하기까지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여러분과 나는 이미 뿌리를 박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그 사실을 우리의 사실로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있다. 골로새서는 우리가 뿌리를 박았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어져가고 있다고 말한다. 만약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 뿌리 박은 경험이 없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어질 수 있겠는가? 그것이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에서 교회의 건축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전히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어떻게 성전과 도시가 이루어지겠는가? 그들이 그 땅을 점령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교회의 실제적인 건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그것은 다만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깨닫고 체험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주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기 원한다.
몇 가지 실제적인 예
날마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우리의 모든 말들이 그리스도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가?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말하는가?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말로서 사용하는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는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된다. 만일 여러분이 이것을 아는 빛을 받는다면 성령은 여러분을 날마다 인도하여, 여러분이 하는 말들이 그리스도이어야 한다는 것까지 깨닫게 할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입과 여러분의 언어에도 십자가의 역사(役事)를 받아드릴 것이다. 여러분의 대화에 새로운 변화가 올 것이다. 여러분의 언어는 일신(一新)될 것이다. 『주님, 제가 말하려 하는 것이 당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그런 말은 하지 않겠읍니다. 내 입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거치게 하겠읍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것으로 깨닫는 예(例)를 몇 가지 더 들어 보겠다. 우리는 먹을 때마다 즉시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 양식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주님, 이것은 나의 참 양식이 아닙니다. 당신이 곧 내가 먹고 살 양식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이 양식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에 의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 나는 이 양식을 먹기보다 당신을 먹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겠읍니다.』
우리가 휴식하고자 할 때에도 『주님, 당신이 나의 휴식입니다. 당신만이 나의 참 휴식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가 누리며 체험하려고 하는 실제임을 깨달아야 한다. 자매들은 자주 시장에 간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바로 여러분이 사려고 하는 그 물건임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내가 믿기에, 그런 생각을 해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마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된다는 메시지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집회에서는 『할렐루야!』하며 찬송을 불렀지만 잠시 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곤 했다. 여러분이 주님으로부터 참 빛을 받았다면 성령은 날마다, 걸음걸음마다 실제적인 방법으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지시해 줄 것이다. 그는 여러분이 사려고 하는 것이 다 그리스도의 표상(表象)임을 보여줄 것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밖의 것을 위해 값을 지불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저는 그리스도를 얻기 원합니다. 그리스도만 더욱 더 모시기 원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다. 청년들이여, 여러분은 공부할 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책입니다. 저는 당신을 읽겠읍니다. 이 책들보다 당신을 더욱 많이 공부하겠읍니다. 제가 독서하는 동안 바로 이 순간에도 당신을 적용하겠읍니다.』 매일매일 그러한 방법으로 훈련해 보라. 그리스도를 땅으로 받으라. 그를 여러분의 모든 것으로 받으라. 단지 양식뿐만 아니라, 빛이나 거처만이 아닌, 모든 것을 포함한 땅으로 받으라.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포함한 분이심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기를 훈련하고, 모든 일에서 그분을 적용시키라. 그러면 여러분으로 부터 무엇인가가 나와 하나님 나라 안의 교회 건축이 될 것이고, 성(城) 안의 성전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이다.
위트니스 리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소개의 말",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