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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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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아)―받아들이는 능력을 나타냄
이는 음식을 씹는 도구이다. 여기에서는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양식을 받아들이는 문제이다. 하나님이 성경 가운데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그분은 일찍이 우리를 위해 다양한 양식을 준비해 두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양식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어떠한가를 보여 준다. 여기에서 말하는 받아들이는 능력은 결코 어린아이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한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데, 이는 이것이 우의(寓意)적인 것으로 성장한 자만이 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왜 양 무리를 말하는가? 양 무리는 반드시 풀을 먹는다. 당신 안에는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있는데, 이것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양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반드시 안에 그리스도와 같은 어떤 것이 있어야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양털」은 성경에서 육체에 속한 생명 혹은 육체에 속한 열심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양털옷은 입을 수 없다(겔 44:17). 성경에서 흰 세마포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의를 가리키는 표징이다. 성도는 십자가에서 이미 그의 천연적인 생명이 끝났기 때문에, 그녀의 이가 털 깎인 한 무리의 양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뜻은, 그녀의 받아들이는 능력이 천연적인 능력의 자극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님 앞에서의 추구와 주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과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모든 것에서 혈기의 열심을 의지할 수 없다. 자기의 노력을 사용하고 자기를 따를 때, 이것은 주님이 칭찬하시는 이(齒)가 아니다. 방금 털을 깎고 목욕을 한 양은 아주 깨끗하고 단정하다. 여기의 목욕은 그녀의 추구하는 목적이 깨끗케 되기 위한 것임을 뜻한다.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그 뜻은 단정하다는 것이다. 즉 받아들이는 능력이 일률적이며, 어떤 일은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떤 일은 받아들일 수 없으며 영적인 일에는 믿음이 있고 물질적인 일에는 믿음이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만일 어떤 일은 받아들일 수 없고 물질적인 일에서는 믿음이 없다면, 쌍태를 낳은 것이 아니라 새끼를 잃은 것이다. 쌍태를 낳고 새끼를 잃지 않은 것이 바로 완전한 받아들임이다. 천연적인 이는 모두 한 쌍이다. 그녀의 이가 모두 각각 쌍태인 것은, 그녀의 받아들이는 능력에 조금도 가지런하지 못함이 없다는 것이다.
워치만 니
[워치만 니 전집 2집 23권 - 노래 중의 노래, p.82-83,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