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말씀을 누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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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혼동이 되어오던 「여김」에 대해 보기로 하자. 먼저 로마서 6장 6절을 다시 보기로 하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시간에 있어서 과거형이다. 이 사건을 과거에 두었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귀한 것이다. 이 사건이 이미 이루어졌고 더이상 폐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마지막이자 영단번에 이루어진 일이다. 우리 옛사람이 영단번에 못 박혔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못 박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 후에 무엇이 뒤따르는가? 성경을 더 읽도록 하자. 다음 명령은 11절에 있다.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 이 말씀이 6절에 이어지는 것임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이 두 구절을 연결시켜서 읽어보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의 체험의 순서도 이러하다. 우리가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 때 다음 단계는 함께 못 박힌 자로 여기는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했다는 진리를 말할 때 종종 이 진리의 두번째 요점인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기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중요시해야 할 기점은 우리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는 것이 여기는 것 이전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준다. 『알거니와... 여길지어다』. 이 순서는 중요하다. 우리의 여김은 앎에 근거해야 한다. 이 앎은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사실을 얻는 데서 비롯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기초를 잃게 된다. 우리가 알았다면 우리는 자연히 여길 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 일을 말할 때 우리가 여기는 것을 지나치게 주의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 알기도 전에 여기려고 한다. 그들은 이 사실에 대해 성령이 계시한 바를 얻기도 전에 여기려고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쉽게 당하게 된다. 시험이 임할 때 그들은 맹렬하게 『나는 죽었다. 나는 죽었다. 나는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로 그들이 여기고 있는 순간에 화를 내버린다. 사후에 그들은 『이 방법은 안 통한다. 로마서 6장 11절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6절이 없다면 11절이 소용없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여긴다면, 여기면 여길수록 긴장하게 되어 결국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주님을 믿은 후 수년 동안 나는 여겨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아 왔다. 나는 1920년부터 1927년까지 「여겨 왔다」. 죄에 대하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길수록 나는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자신이 죽었다고 믿지 못했고 죽어지지도 않았다. 이런 문제로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으려고 할 때마다 그들은 나에게 로마서 6장 11절을 읽으라고 했다. 그러나 로마서 6장 11절을 읽고서 여기면 여길수록 내가 죽었다는 사실은 내게서 더욱 멀어졌고 이런 여김은 나로 「죽음」을 얻게 하지 못했다.

 

나는 우리가 자신을 죽은 자로 여겨야 한다는 이런 가르침을 매우 감상했다. 그러나 나는 여러 번의 여김이 왜 아무런 결과를 낳지 않는지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나는 이것 때문에 수개월 동안 번민했던 것을 시인한다. 나는 주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님, 만일 이 일을 분명히 해주지 않으시면, 내게 이 기본적인 일을 보여주지 않으시면 나의 모든 일을 멈출 것입니다. 다시는 전도하거나 당신을 섬기지 않겠습니다. 먼저 이 일에 대해 철저한 인식을 갖게 하소서.』 수개월 동안 때로 나는 금식까지 해보았지만 아무런 결과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그 아침을 나는 영원히 잊어버리지 못한다-위층의 책상 앞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주여, 내 눈을 열어주소서!』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바로 그 순간에 나는 보게 되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된 것을 보았고, 내가 그의 안에 있으며, 그분이 죽을 때 나도 죽었고, 나의 죽음이 장래의 일이 아닌 현재의 일이며, 그분이 죽으실 때 내가 그분 안에 있었기 때문에 나의 죽음이 그분의 죽으심과같이 참되다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하여 모든 문제가 내게 알려졌다. 이런 발견으로 나는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어서 의자 위에서 펄쩍 뛰면서, 『주님을 찬미합니다. 나는 죽었습니다!』라고 크게 외쳤다.

 

나는 아래층으로 달려가 주방에서 돕는 한 형제를 만나 그를 붙잡고서, 『형제님, 내가 이미 죽은 것을 아십니까?』라고 말했다. 그 형제는 내 말에 어리둥절해져서 『형제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이어서 그에게,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으신 것을 모르십니까? 내가 그분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나의 죽음이 그분의 죽음처럼 참되다는 것을 모르십니까?』라고 말했다.

 

오, 나에게 이 일은 이렇게 참되었다! 나는 정말 상해의 도로들을 한번 두루다니면서 내가 발견한 사실을 외치고 싶었다.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씀의 결정성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내 말은 이 일을 살아나타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잠시 후 우리는 함께 죽은 사실에 대해 볼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6장 6절이 함께 죽은 것을 체험하는 우선적인 조건이다. 그렇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여김의 비결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바로 계시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온 계시가 필요하다(막 16:17, 엡 1:17, 18).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사실을 알 뿐 아니라 더욱 눈이 열려 이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계시는 결코 모호하고 애매한 것이 아니다. 불확실한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으신 것을 본 날이 언제인지 기억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보는 데 있어서도 확실한 날짜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계속 전진하는 것의 기초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모호해서는 안 된다.

 

내가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긴다고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나는 내가 죽은 자라는 것 곧 하나님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끝내셨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내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한 계산 방법이다. 여기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죽음을 향해 나아갈 것이 아니라 죽음을 출발점으로 삼고 여겨야 한다.


둘째 단계 :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

 

여긴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헬라어에서 여긴다는 말은 장부에 기록한다는 뜻이다. 회계는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화가가 풍경화를 그릴 때 완전히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는가? 역사학자가 모든 기록의 절대 정확성을 보증할 수 있는가? 혹은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 모든 지도의 절대 정확성을 보장할 수 있는가? 그들은 대략적인 정도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매일 우리의 언행도 마음 속으로야 진실하게 말하고자 하지만 완전히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말은 왕왕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한다. 너무 많이 말하거나 너무 적게 말한다. 오직 수학만이 절대 정확성과 진실성을 갖고 있다. 수학에는 과오가 용납되지 않는다. 의자 하나에 한 의자를 더할 때 두 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런던에서나 상해에서나 동일하다. 당신이 서쪽으로 여행하여 뉴욕까지 가든 동쪽으로 여행하여 싱가폴까지 가든 이것은 동일하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 더하기 하나는 변함없이 둘이다. 하늘에서든 땅에서든 심지어 지옥에서도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인 것이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라고 하시는가? 이는 우리가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회계로 비유하겠다. 가령 내 호주머니 속에 십 오 실링이 있다 하자. 나는 어떻게 장부에 기록해야 하는가? 나는 십 사 실링 육 펜스라고 기록할 수 있는가? 또는 십 오 실링 육 펜스라고 기록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나는 장부에다 내 호주머니 속의 실지 실링을 기록해야 한다. 회계는 사실적인 계산이지 환상(幻想)적인 계산이 아니다. 같은 원칙으로, 내가 참으로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계산하라고 알려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실이 아닌 것을 장부에 기재하라고 하실 수 없다. 만일 여전히 살아 있는 자라면 그분은 결코 나에게 나를 죽은 자로 계산하라고 하실 수 없다. 이것은 계산이라고 할 수 없고 그보다 오산(誤算)이라고 하는 편이 낫다.

 

계산은 허위적인 형식이 아니다. 만일 내가 내 호주머니 속에 십 이 실링밖에 없는데 십 오 실링이 있기 바라기 때문에 내 장부에 십 오 실링으로 기록한다면 그 계산법은 차액을 보충할 수 있는가? 물론 그럴 수 없다. 만일 내게 십 이 실링밖에 없는데 자신에게, 『내게 십 오 실링이 있다. 내게 십 오 실링이 있다. 내게 십 오 실링이 있다.』고 말한다 하자. 당신은 이렇게 의지와 생각으로 자신을 설득시키는 것이 호주머니 속의 액수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계산한다고 해서 십 이 실링을 십 오 실링으로 만들 수 없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 되게 할 수 없다.

 

다른 면에서, 만일 실지로 내 호주머니 속에 십 오 실링이 있다면 나는 마음놓고 장부에다 십 오 실링이라고 기록할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결코 여김으로써 죽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도리어 우리가 죽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보라고 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계시는 자연히 우리를 계산하는 데로 이끈다. 우리는 결코 우리에게 『너희도... 여길지어다』라는 명령이 주어졌다는 것을 소홀히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확실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더러 장부에다 기록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나는 이미 죽었다』고 기록하고 그런 다음 그 사실을 붙잡기를 원하신다. 무엇 때문인가?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계실 때 내가 그의 안에 있었기 때문에 나도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사실로 간주한다. 나는 내가 이미 그분 안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간주하고 선포한다. 바울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이것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것이 참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또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언제나 참된 것일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을 바라본다면 당신은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당신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돌이켜 주님을 바라본다면 그분이 이미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주여, 당신을 믿고 당신 안에 있는 사실을 의지합니다.』 우리는 종일토록 이것을 붙잡아야 한다.


믿음의 계산

 

로마서 앞 네 장 반은 거듭 믿음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롬 3:28, 5:1).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과 죄 사함을 얻었고 하나님과 화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역사를 믿지 않고서 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로마서 두번째 부분에서는 믿음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얼핏볼 때에 강조점이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두번째 부분에서 비록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여김」이라는 단어가 「믿음」의 자리에 들어간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여김」과 「믿음」은 동일한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은 항상 이미 이루어진 사실에 근거한다. 믿음은 장래 일을 믿는 것이 아니다. 장래 일은 우리에게 있어서 소망이지 믿음이 아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한 믿음은 장래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아마 이 때문에 여기서 「여기다」라는 단어를 택했을 것이다. 이 단어는 과거와 관계있다. 그 의미는 이미 완성된 일을 돌이켜 보는 것이지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마가복음 11장 24절에서 말한 그런 종류의 믿음이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여기서 말하는 것은, 만일 당신이 구한 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으면(물론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그대로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한 믿음은 당신이 어떤 것을 받을지 모른다거나 능히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요 심지어 장래 받을 것이라는 것도 아니다. 여기의 믿음은 당신이 이미 얻은 믿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오직 과거와 관련된 것만이 여기서 말한 믿음이다. 이외에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 혹은 『하나님이 필히...』 , 『하나님이 장차...』라고 말하는 사람은 참으로 믿은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참된 믿음은 항상 『하나님이 이미 이루셨다』고 말한다.

 

그러면 나의 십자가에 못 박힘에 관하여 어느 때가 내게 믿음이 있는 때인가?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다.』 혹은 『하나님이 장차 하실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반드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다.』고 말하는 때가 아니다. 그 때는 내가 즐겁게,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내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못 박혔습니다.』라고 말하는 때이다.

 

로마서 3장은 우리에게, 죄 사함을 위하여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보여준다. 로마서 6장에서는 우리가 그분의 죽음 안에 포함되어 있고 이로써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보여 준다. 성령이 첫번째 사실을 우리에게 계시할 때 우리는 믿고 의롭게 되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다시 우리에게 두번째 사실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게 하신다. 그러므로 실행면에서 두번째 부분의 「여김」은 첫번째 부분의 「믿음」을 대치한 것이다. 서로의 강조점이 다른 것이 아니다. 거룩한 사실을 봄으로써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계속 진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거룩한 사실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그분의 십자가이다.


시험과 실패는 믿음의 시금석이다

 

역사상 두 가지의 가장 위대한 사실이 있다. 하나는 우리의 죄가 주님의 피로 처리된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 자신이 십자가로 처리된 것이다. 시험에 관하여는 어떤가? 우리가 이 두 가지 사실을 보고 또 믿었는데 이제 옛 정욕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것보다 더 악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전에 아는 죄에 빠질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성질을 내거나 혹은 성질을 내는 것보다 더 나쁜 어떤 것이 일어날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들로 인해 앞에서 말한 모든 사실들이 다 거짓되다고 말할 것인가?

 

우리는 마귀의 주된 목적이 항상 우리로 하나님의 사실을 의심하게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창 3:4 참조).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아 실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보고, 또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긴 후에 사탄은 우리에게 와서, 『속에 활동하는 것이 있지 않느냐, 이것은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을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이것은 결정적인 시금석이다. 당신은 당신 앞에 놓여진 자연계 안의 만질 수 있는 사실을 믿는가? 아니면 볼 수 없고 과학으로도 증명될 수 없는, 영적 한계 안의 접하기 어려운 사실을 믿는가?

 

여기서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믿음으로 붙잡으라는 것과 붙잡지 말라는 것들을 상기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의 방법을 말씀하셨는가? 먼저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뽑아버린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계산한다면 우리는 완전히 잘못 계산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앞에서 우리가 말했듯이 장부에 기록을 잘못한 것과 같다. 그 사람은 호주머니 속에 십 이 실링밖에 없었지만 장부에다는 십 오 실링으로 기록하였다. 사실상 죄의 본성은 제해지지 않았다. 죄의 본성은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를 정복하여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다시 범죄하게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계속 보혈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범죄를 처리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피로 인하여 그분은 다시 우리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과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이 간접적인 방법을 쓰고 계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분은 죄의 본성을 제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제하신다. 우리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전에 죄의 도구였던 육신의 몸은 실직하게 되었다(롬 6:6, 윈문 참조). 비록 옛 주인인 죄의 성품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를 섬겼던 노예가 이미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우리 몸을 지배할 수 없다. 도박꾼의 손이 실직하고 맹세하는 자의 혀가 실직하였기 때문에 이제 이 지체들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롬 6:13).

 

그러므로 우리가 「죄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하는 것이 「죄를 이김」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욱 성경적이다. 로마서 6장 7절과 11절이 말한 「죄에서 벗어남」과 「죄에 대하여 죽고」라는 말씀은 우리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권세가 아닌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실재하는 권세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죄의 본성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알고 또한 해방의 정도가 날로 증가한다.

 

이 구원이 이렇게 참되기 때문에 요한은 담대하게,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요일 3:9)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잘못된 길로 인도된다. 요한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죄가 다시는 우리의 역사(歷史) 중에 출현하지 않고 우리가 다시는 범죄치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뜻은 범죄가 하나님께로서 난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 안에 심겨진 그리스도의 생명의 성질은 범죄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종종 어떤 존재의 성질은 그것의 역사와 큰 차이가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은 우리의 역사와 큰 차이가 있다. 이 일을 설명하기 위하여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한 가지 예를 들겠다. 우리는 나무가 성질상 물에 잠기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나무의 성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 나무를 손으로 누른다면 잠기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의 죄의 본성이 우리의 역사에서 하나의 사실인 것같이 이 역사는 하나의 사실이다. 이뿐 아니라 본질도 하나의 사실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은 새 성품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를 범할 수 없다. 오직 아담 안에 있는 자만이 능히 범죄하고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에게 사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권세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어떤 사실을 우리의 의지로 삼고 생활의 수단으로 하는가에 있다. 우리는 매일 우리의 체험 중에서 접촉한 사실을 택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강력한 사실을 택하는가? 그분의 부활 능력이 우리 쪽에 있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한다(롬 1:16).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실을 우리 체험에서 실제화하는 데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나는 여러분들이, 히브리서 11장이 신약뿐 아니라 실지로 성경 전체에서 믿음에 대한 유일한 정의임을 알 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이 정의를 확실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어떤 상태만을 뜻하지 않고 일종의 행동을 뜻한다. 수년 동안 나는 이 단어에 합당한 용어를 생각했었다. 영어 성경 중 다비의 번역판은 이 단어를 매우 훌륭하게 번역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제화요』(substantiate). 이 단어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이는 실제화는 바라는 것들을 체험으로 화하는 행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사물을 「실제화」하는가? 사실상 우리는 매일 이런 일을 하고 있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살 수 없게 된다. 당신은 「실상」과 「실제화」 사이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아는가? 실상(實狀)은 내 앞에 있는 어떤 물체의 현상을 말하고 실제화는 그 물체를 우리에게 참이 되게 하는 어떤 힘 혹은 기능을 가리킨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의 오관을 통하여 우리는 자연계 안의 것들을 우리의 의식 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그것들을 감상할 수 있다. 예컨대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세상에 있는 빛과 소리를 실제화시키는 두 가지 기능이다. 또 세상에 있는 홍색, 황색, 녹색, 자색 등 각종 색상들은 모두 참되다. 그러나 눈을 감아 버릴 때 그 색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같이 색상의 실재성을 잃어 버리게 된다. 그러나 시력이 있을 때 나에게는 색상을 실제화할 능력이 있게 된다. 시력을 통하여 황색은 내게 황색이 된다. 그러므로 황색의 존재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황색을 실제화할 능력이 나에게 있다. 나는, 어떤 물체를 내게 참된 것이 되게 하고 내 의식 속에 실제가 되게 할 능력을 갖고 있다. 이것이 실제화의 의미이다.

 

만일 내가 색맹이라면 색상을 분별하지 못할 것이다. 혹 내게 듣는 능력이 결여되었다면 나는 음악을 감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음악과 색상은 모두 참된 것들이다. 그들의 실재는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영향받을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비록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참된 것들이다. 우리가 천연적인 감각으로 신성한 사물들을 실제화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라는 것들」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실들을 실제화하는 능력은 오직 믿음이다. 믿음은 사실을 우리의 체험에서 진실한 것이 되게 한다. 믿음은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을 실제화시킨다. 천천만만의 사람들이 로마서 6장 6절의,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씀을 읽어보았다. 믿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참되고, 의심하거나 머리로만 동의하고 영적인 빛이 결여된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참되지 않다.

 

다시 말하거니와, 여기서 우리는 약속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다루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붙잡도록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약속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여전히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의 사실을 믿지 않는다 해도 이것은 여전히 참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사실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 사실 자체는 결코 믿음에 의해 그 진실성이 더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으로만이 그것들을 만질 수 있고 그것들을 우리 체험에서 참된 것이 되게 할 수 있다.

 

무릇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된 것들을 우리는 마귀의 거짓말로 여겨야 한다. 그 일들 자체는 우리의 느낌에 상당히 실재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더 큰 사실을 선포하셨기 때문에 이 선포 이전의 모든 것들은 다 굴복되어야 한다. 내게 어떤 체험(세밀한 원칙에서 완전히 이 일에 적용 될 수는 없지만)이 있는데, 그 체험으로 이 원칙을 설명할 수 있다. 수년 전 나는 병을 앓았는데 엿새 밤이나 열이 높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하나님은 성경으로부터 나를 치료하시는 한 마디를 주셨다. 이로 인해 나는 모든 병세가 즉시 사라지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반대로 나는 여전히 한순간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을 뿐더러 전보다 더욱 불안해졌다. 체온이 높아졌고 맥박도 더 빨리 뛰고 머리도 전보다 더 심하게 아팠다. 마귀는 나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어디 있느냐?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네가 올린 기도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어 왔다. 이 때문에 나는 미혹되어 다시 기도하면서 이 일을 해결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책망을 받았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이 성경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들어왔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면 이 증상은 다 무엇인가? 이 증상들은 다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귀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이 불면증은 거짓이다. 이 두통도 거짓이며 고열도 거짓이다. 이 빠른 맥박도 거짓이다. 하나님이 내게 하신 말씀으로 보아 이 모든 증세는 너의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에게 진리이다.』 오 분 내에 나는 잠이 들었고 이튿날 아침 깨어날 때에는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위에서 말한 것 같은 특이한 개인의 일은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속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실에 있어서는 결코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없다. 사탄의 변론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든간에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노련한 거짓말쟁이는 말로만 아니라 또한 태도와 행동으로도 속인다. 그는 위조지폐를 내놓고 사용하듯이 거짓말을 한다. 마귀는 노련한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에 결코 그자가 말로만 거짓말한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그는 어떤 표시나 느낌, 혹은 체험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요동시키려고 한다.

 

내 말을 정확히 기억하기 바란다. 나는 육체의 실재를 부인하지 않는다. 앞으로 우리는 육체에 대해 더 많이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한 것은 거짓말이, 계시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떠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받아들일 때, 사탄은 최선을 다하여 매일 우리 체험을 증거로 하여 우리가 근본적으로 죽지 않았고 도리어 매우 활동적임을 믿게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사탄의 거짓을 믿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를 믿는지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밖으로 나타난 상태의 지배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의 지배를 받을 것인가?

 

나의 이름은 「니」이다. 나는 내가 「니」라는 것을 안다. 이것은 내가 자신 있게 믿는 사실이다. 물론 나는 기억력을 상실함으로 내가 「니」라는 것을 잊어버리거나 꿈 속에서 나를 다른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내 이름은 깨어날 때도 「니」이고 잠잘 때에도 여전히 「니」인 것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을 때에도 내 이름은 「니」이고 잊고 있을 때에도 내 이름은 여전히 「니」이다.

 

만일 내가 나를 다른 사람으로 가장한다면 사정은 어려워질 것이다. 가령 내가 내 자신의 이름을 「왕」이라고 한다 하자. 그렇다면 나는 내 자신에게, 『나는 왕씨다. 이제 너는 네게 왕씨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끊임없이 말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내 자신을 여길지라도 내가 유념하지 않을 때 누가 나를 『니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내가 대답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것은 사실이 상상보다 승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가 어떻게 간주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내 이름이 「니」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니」라고 간주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로서 내게 체험이 있든 없든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느끼든 느끼지 않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나는 어떻게 이것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으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나의 체험이 이 사실을 확증하든 안 하든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사실 위에 서 있을 때 사탄은 우리를 이기지 못하게 된다.

 

마귀는 항상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것을 공격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될 때, 그의 목적은 달성되고 우리를 그의 능력 아래 둘 수 있게 된다. 반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사실에 대해 의심치 않고 확신한다면, 하나님이 그분의 역사 혹은 그분의 말씀에 대해 불의하실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사탄이 어떤 궤계를 사용하든 우리는 여전히 마귀를 비웃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누가 나에 대하여 내 성이 「니」가 아니라고 설득시키려고 할 때 내가 흔들리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 함이로라』(고후 6:7). 여러분은 아마도 사실에 관한 이런 비유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사실」과 「믿음」과 「체험」은 담 꼭대기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세 사람과 같다. 「사실」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않고 곧게 전진하며 또한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믿음」은 사실을 따라간다. 오직 「믿음」의 눈의 초점을 「사실」에 둘 때만이 만사가 순조롭다. 그가 체험을 관심하여 돌이켜 자신이 어떻게 전진하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그는 즉시 담에서 떨어진다. 거기에 따라 가련한 「체험」도 이어서 떨어지게 된다.

 

모든 시험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 시험은 우리의 눈을 주님 자신으로부터 보이는 것들로 돌아가게 한다. 믿음은 종종 산봉우리의 장애물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된 상태를 만나며 접촉하는 물질적인 세계와의 뚜렷한 모순에 부딪친다. 그러나 실패한 사실이든 느낌이든 혹은 암시적인 실패이든 이것들은 모두 믿음을 저지하는 산봉우리들이다. 믿음과 산봉우리는 공존할 수 없고 그 중 한 가지가 제헤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많은 때에 산봉우리만 남기고 믿음을 잃어버리는 데 있다. 우리는 정말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느낌을 좇아 진리를 발견하려고 한다면 사탄의 거짓말이 우리의 체험과 일치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된 것들을 거절하고 단순히 그분을 믿는 태도를 갖는다면, 우리는 사탄의 기만이 허물어지고 우리의 체험이 한 걸음씩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야만 이런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것은 구체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분이 우리에게 단계적으로 참되게 되시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그분이 참 공의인 것과 참 거룩인 것과 참 부활 생명이심을 보게 될 것이다. 본래 우리가 보았던, 그분 안에 있는 객관적인 사실들이 이제 우리 안에서 주관적으로-참되게-역사하는 상태에 이를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그분 자신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숙의 표시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가 바로 이런 뜻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실을 참되게 만든다. 믿음은 항상 영원한 사실-영원히 참된 사실-을 참되게 만든다.


그분 안에 거함

 

비록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적지 않은 시간을 사용했지만 여러분의 이해를 위해 한 가지를 더 말하겠다. 성경은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수차 언급했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죽었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가 죽은 사실을 발견하려고 할 때 모든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갈 것이다. 이는 「우리 속」은 우리가 죽은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 매우 익숙하다. 이제 이 말씀을 한번 상고해보자. 먼저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데 있어서 우리의 몸부림과 노력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는 우리가 이미 그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셨다. 이는 곧 우리가 배치된 곳에 머물러 있으라는 뜻이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역사이다. 우리 편에서 해야 할 일은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이 구절은 우리에게 신성한 원칙을 세워준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먼저 만유를 포함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밖에서」 완전하고도 궁극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의 이런 역사는 장차 그리스도인의 체험이 되는 것이다. 그분밖에서는 우리의 영적 체험이 없다. 성경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 안에서 살리셨고 하늘에 앉히셨으며, 우리가 그분 안에서 충만하여졌다고 말한다(롬 6:6, 엡 2:5, 6, 골 2:10). 이런 일들은 우리가 완성하도록 남겨둔 일이 아니다(물론 우리는 이런 체험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런 일들은 이미 완성된 일이고 그분과 연합함으로써 완성된 일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 안에서 이루신 일은 바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포함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이루신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루어진 것이다. 그분이 머리를 다루실 때 모든 지체도 다루어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떠나서 자신 안에서 단독적으로 영적인 생명을 체험하려 한다면 우리는 완전히 끝난 것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개인적인 체험을 줄 뜻이 조금도 없으시다. 또한 그분은 당신을 위하여 그런 일을 완성할 뜻도 없으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영적 체험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체험하셨다. 소위 「우리의 체험」은 우리가 그분의 역사와 체험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불과하다.

 

만일 한 그루의 포도나무에서 어떤 가지는 붉은 색 포도를 맺으려 하고 다른 가지는 녹색 포도를 맺으려 하고 또 다른 가지는 자색 포도를 맺으려 한다 하자. 만일 모든 가지들이 포도나무를 상관치 않고 자기가 내고 싶은 포도를 낸다면, 이것은 정말 세상을 놀라게 할만한 기이한 일인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불가능하고 불가사이한 일이다. 가지의 성질은 포도나무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각종 체험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부활과 승천을 각각 개별적인 일로 생각한다. 그들은 모든 것이 주님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오직 주님이 우리 눈을 열으사 그분이 만유이심을 보게 될 때 비로소 참된 체험이 있게 된다. 모든 진실한 체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우리가 그 사실들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분에게서 얻지 않은 체험들은 모두 눈 깜작할 사이에 사라질 체험들이다. 『주님을 찬미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그 체험을 발견했습니다. 그 체험은 이미 내 것이 되었습니다! 주여, 내가 그 체험을 갖는 것은 그것이 당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실이 우리의 체험의 기초라는 것을 안다면,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기본 원칙은 우리에게 어떤 것들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로 어떤 일들을 거치게 함으로써 결국 그것들을 우리 안에 두어 우리의 체험이 되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어떤 일을 완성하사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지 않으신다. 즉 『저는 삼월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혹은 『저는 1937년 1월 1일에 죽음에서 부활했습니다.』 혹은 『지난 수요일에 제가 구하는 어떤 확실한 체험을 얻었습니다.』 일은 그렇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 은혜 시대에 우리는 더이상 체험 자체를 우리가 추구할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으로 우리의 사상을 통제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전기(轉機)는 어떻게 된 것이냐고 말할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의 일생에서 참된 전기를 체험한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뮬러 형제가 어느 날 땅에 엎드러져 『뮬러는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내 말을 기억해두라. 나는 우리가 거친 영적 체험 중에서의 실제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그분과 동행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전기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그 반대로 나는 우리의 생활에서 확실한 전기가 필요하다고 강하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중요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느 개인에게도 개인적인 체험을 주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모든 개인의 체험은 하나님이 이미 완성하신 사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바로 시간 안에서 영원한 사실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사가 우리의 체험과 영적인 역사가 되었다. 우리는 그분을 떠나서 단독적인 역사를 가질 수 없다. 우리에 대한 모든 역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 안에서 역사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하신 그분의 역사 외에 따로 어느 개인에게 역사하지 않으신다. 심지어 영원한 생명도 단독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은 이미 그분의 아들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고 또한 우리를 그분의 아들 안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그리스도의 일부가 되었다.

 

이상 말한 것들의 요점은 굳건한 믿음 안에서 이렇게 말하는 데 있다. 『하나님이 이미 나를 그리스도 안에 두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참된 것이라면 나에게도 참된 것입니다. 나는 그분 안에 거해야겠습니다.』 이런 믿음은 매우 실제적인 가치가 있다. 사탄은 자주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끌어내어 그리스도 밖에 있게 하려고 한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고 여기도록 우리를 권하고 설득한다. 또한 유혹과 실패와 고통 그리고 시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고 확실히 느끼게 한다.

 

이 때 우리는 종종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런 상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의 느낌으로 판단한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여, 저를 그리스도 안에 넣어 주소서.』라고 기도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고 명하셨다. 이것이 구원의 방법이다. 어떻게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가?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 몸에서 무언가를 역사하실 기회를 얻으실 수 있다. 이럴 때 그분은 뛰어난 능력-부활의 능력(롬 6:4, 9, 10)-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사실을 점차적으로 매일 우리가 체험하는 사실들이 되게 할 기회를 얻게 되신다. 본래는 『죄가 왕 노릇 하였으나』(롬 5:21) 이제는 기쁨 안에서 우리는 진실로 『다시는 저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게 된다(롬 6:7).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만유라는 기초 위에 굳건하게 서 있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이 점차적으로 우리 안에서도 그러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초 위에 서 있다면 우리는 옛사람의 모든 것이 여전히 우리 몸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서 있는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 들어간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 밖에서 자아가 죽는 것을 찾으려고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장소를 잘못 찾은 것이다. 이는 죽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계속 우리 속을 들여다본다면 죄를 향하여 우리는 십분 살아 있을 것이다. 그 반면에 만일 우리가 주님을 앙망하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죽음을 여기에 역사하시도록 한다면 결국 새 생명은 우리의 것이 된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가 될 것이다(롬 6:4, 11).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이것이 이중적인 내용의 말씀이다. 한 부분은 명령이고 다른 부분은 약속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객관적인 면이 있는 반면에 주관적인 면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주관적인 면은 객관적인 면에 근거한다.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는 우리가 그분의 안에 거한 것의 결과이다. 우리는 일의 주관적인 면을 지나치게 관심함으로 객관적인 사실을 소홀히하고 자신을 향하는 결과를 낳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객관적인 면-내 안에 거하라-만 붙잡고 주관적인 면은 하나님께 맡기라. 주관적인 면은 하나님께서 감당하시고 행하신다.

 

우리는 전등으로 이 일을 설명한 적이 있다. 만일 당신이 집 안에 있고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면 책을 읽기 위해 당신은 등을 켜야 할 것이다. 당신 옆의 탁자 위에 등이 하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그 등에 기대를 걸고 그 등이 빛을 발하지 않을까 하고 지켜보겠는가? 아니면 헝겊으로 전구를 닦겠는가? 당연히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다른 쪽으로 가서 벽에 부착된 스위치를 켤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전기의 근원을 주의하고 거기에 요구되는 행동을 취한다면 등은 즉시 켜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초점을 그리스도 한 분에 고정시켜야 한다.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순서이다.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믿음은 그 사실들을 주관적인 진실로 만든다. 이것은 마치 바울이 말한 것과 같다.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같은 원칙으로 이것을 생명의 열매 맺음에 적용할 수 있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요 15:5). 우리는 스스로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혹은 맺은 열매에 주의를 기우릴 필요조차도 없다. 우리의 본분은 그분을 앙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이행하신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분 안에 거하는가?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안에 있고』. 당신을 그리스도 안에 두신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또한 그분은 이미 이것을 이루셨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당신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지 말라. 자신 안에 있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 다만 그리스도를 주시하고 그분 안에서 당신을 보라. 그분 안에 거하라. 하나님이 당신을 그분의 아들 안에 두셨다는 사실에 안식하라. 또한 그분이 당신 안에서 그분의 일을 완성하실 것을 믿으라. 그분은 영광스런 그분의 약속을 실현하신다-『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롬 6:14).


워치만 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성장하는 길-여김",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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