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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ug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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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번안의 비결
이러한 주제로 글을 써야 한다는 작은 느낌이 있었지만 오래도록 주저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제는 분명 필요가 있는 주제이기는 하지만 쓰는 사람에게도 쉽지 않고 듣는 사람에게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쓰는 사람에게 '자신의 자격'에 대해 고민하게 끔 하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아직 되지 않은 사람이 마치 잠시 된 자가 되어 쓰는 글과도 같습니다. 주님의 보호하심과 빛이 이 글을 쓰는 동안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찬양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모든 믿는 이들은 공통적인 인식이 있을 것입니다. 간혹 진리 추구에 부담이 많은 지체들도 진리 추구의 정점에 이를 때는 찬송에 대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다만 이러한 찬송의 형태 중에 언어의 차이로 인해 '번안'의 필요성이 있고 그 와중에 원곡의 느낌과 부담을 진리적인 결핍과 언어적인 불완전함 없이 어떻게 하면 전달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 '번안자'로서 요구하는 자격 요건과 필요한 존재의 준비가 있습니다. 그러한 준비 중에 기본적인 것이 언어와 진리와 시적 감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이 모든 것이 준비되었음에도 우리가 하는 번안이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진리적인 결핍이 없고 언어적인 이해에도 문제가 없으며 시적 감각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번안된 곡에 한가지 부족한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번안된 곡 안에 포함되어야 하고 내포되어야 하는 영적인 느낌, 곧 생명에 대한 느낌입니다.
어떤 사람이 한 번안은 참 아름답지만 아름다운 것이 곧 영적인 느낌이 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언어적으로도 불완전함이 없고 진리적으로도 정확하지만 그것이 곧 영적인 느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투박한 번안 속에 오히려 생명의 느낌이 있기도 하고 때로는 객관적인 언어 보다는 주관적인 언어 속에 생명의 느낌이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 곡을 번안한 다음에 불러 봐서 아는 것이 아닌 번안을 하면서 안에서 분별되는 느낌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번안을 하면서 속에서 어떤 말이 떠오를 때 잔잔한 기름 부음이 있다는 느낌이 들면(때로는 강한 기름부음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 가사가 진리적으로 정확하고 언어적으로도 부족함이 없고 시적인 느낌도 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이 인정하시는 번안이라는 것을 속에서 알게 됩니다.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 번안을 해야만이 그 곡을 부를 때 지체들이 누리게 되고 생명이 전달되며 공급이 있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원하지는 않지만 불가피하게 감추인 방식으로 지체들의 약함을 도움을 주기 원하는 영으로 말해야 한다는 불편한 느낌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말할 때 저를 보호해 주시고 지체들에게는 드러냄이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가령 예전에 출판된 한 악보집이 있었습니다. 그 악보집에는 새로운 찬양과 많은 번안곡이 수록되었고 지체들은 그 악보집에 대해 많은 감상과 기대를 하며 그 찬송들을 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가 느끼기에 그 번안 중의 많은 부분이 '한 가지가 결핍된' 부분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즉 언어적으로도 부족함이 없고 진리적으로도 완전하며 시적인 느낌까지 있었지만 한가지 '생명에 대한 느낌'이 부족하였습니다. 결국 그 찬양 악보집은 많이 확산되었음에도 생명력은 부족하여 그 찬양 악보집에 있는 곡들, 특히 번안곡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부르지 않은 곡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 악보집에 참여했던 봉사자 중에 한 사람과 이 문제에 대해 몇번 교통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봉사자는 그 이유에 대해 여러 번안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즉 지체들이 여러 번안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미 어떤 번안에 익숙해 있었는데 그와 다른 번안이 나왔기 때문에 잘 누리지 못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물론 그런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번안을 한 지체들이 생명의 느낌과 자신의 생각의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 봉사를 했고 그 결과가 언어적으로도 부족함이 없고 진리적으로도 결핍이 없으며 시적인 느낌과 심지어 '아름다움'까지 있지만 지체들이 잘 누리지 못하는 찬양 악보집이 나오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한번은 그 찬양 악보집에 어떤 번안곡이 실려 있음에도 지체들이 다른 번안을 찾는 것을 제가 몇번 본 적이 있습니다(그 곡은 누림이 되지 않는다며..). 그럴 때마다 만일 그 악보집에 이 번안이 실렸더라면 지체들에게 얼마나 큰 누림이 되었을까를 생각하며 안타까워 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어떤 교회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교회의 봉사하는 한 지체와 번안에 대해 함께 수고할 기회가 있었는데 주로 제가 번안을 하고 그 지체가 어떤 단어나 어구에 대해 수정을 했으면 하는 부분을 말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체가 어떤 단어나 어구를 말할 때마다 제 안의 느낌은 그것이 진리적으로도 맞고 언어적인 이해에도 부족함이 없지만 생명에 대한 느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 지체가 말한 부분은 대부분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그 지체는 그의 교회 봉사에 대해 계속 해야 될지 멈춰야 될지 결정하는 기로점에 놓여 있다는 고백을 해 주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그 지체는 영어도 잘하고 인성도 좋고 다른 면에서는 거의 문제가 없었지만 생명의 내적 느낌에 대해서는 불분명했고 이것이 그의 봉사의 어려움의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주님의 안배에 따라 찬양 합창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한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인도하시는 분의 교통에 따라 아름답고 분명한 목소리로, 그리고 멀리까지 잘 들리도록 발성법에 주의하며 오랜 시간 연습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찬양에는 '영'이 부족했으며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문제라는 것에 대해 많은 느낌이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의 찬양 합창은 화려했고 웅장했으며 멀리까지 잘 들리는 발성법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지만 그것이 영적인 공급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적인 느낌과 관련하여 제가 예전에 참석했던 한 봉사집회에서 참석했던 많은 지체들에 대해 제가 만일 말할 자유가 있다면 저의 작은 분량만큼 어떤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생각은 생각에 그치고 누구에게도 직접적인 언급을 한 적은 없지만 아직까지 제 마음 안에 어느 정도 남아 있는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님은 봉사집회 처음 시작에는 영적인 흐름이 있었지만 계속 논의가 지속될 수록 생각을 좀 더 많이 사용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형제님은 서로 관점의 차이가 있지만 여전히 한 흐름 안에 있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두 형제님은 어느 정도 생각과 육체 안에 있었으며 또 두 형제님은 봉사집회 초기부터 그 두 형제님이 봉사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본인들에게는 손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형제님은 교회 생활 가운데 큰 굴곡없이 바르게 자랐지만 이제부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 형제님은 그 지체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딱 한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을 말하는 것을 보고 영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혜로운 형제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지체들이 참석하였지만 아직까지 제 마음 안에 남아 있는 부분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가 모든 봉사에서 중요하고 번안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의 봉사는 우리의 존재를 초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분별하고 사람이 한 말의 근원을 인식하는 것이 어쩌면 봉사의 가장 높은 지점이 아닌 시작 지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는 많은 때 이러한 지점에 미치지 못하고 이러한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상태에 있거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외적인 장비는 어느 정도 된 지체들도 많이 있지만 내적인 존재의 준비는 주님의 긍휼과 오랜 연단을 통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다룸이 깊을수록 우리는 어떤 사람이 한 말 중에 영 안에서 한 말과 자기 스스로 한 말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 안에서 한 말 중에도 그의 존재를 통과하여 나올 때 그의 존재의 어떤 부분이 처리되었고 처리되지 않았는지를 증언해 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긍휼로 찬송 번안과 관련하여 어느 정도 수고를 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목표 지점에 이른 것이 아닌 함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많은 부분 미흡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우리의 존재가 어느 정도 주님의 긍휼로 준비되었다고 해도 우리가 어느 정도 할 수 있는가는 여전히 주님의 긍휼에 속한 문제입니다.
또한 이런 점에서 우리가 반드시 어느 지점에 이르러야 어떤 봉사를 반드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 우리가 생명이 어리지만 주님의 긍휼과 누림이 있어 어느 정도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주님의 긍휼을 우리의 존재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이 발생하곤 합니다.
찬송가 가사를 수정하는 것은 참으로 기묘해서 어떤 부분이 미흡하다고 생각해서 수정을 했지만 수정을 하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원래의 가사가 더 좋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찬송가 가사는 비록 부족하다고 해도 흡입력이 다른 번역과는 많은 차이가 있으며 영적인 느낌을 심지어 초월하는 것과 같은 부분도 있습니다.
저도 이러한 점에 대해 배우고 있는 사람으로 주님이 우리를 외적인 장비뿐만이 아니라 내적인 존재에 있어서도 유용한 그릇으로 조성하시고 온전케 하시기 원합니다.
형제님의 글은 기도로 시작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형제자매님의 곡을 보고 들으면,
저는 그 어떤 '선함'과 '신실함', 그리고 '신성한 로맨스'가 느껴집니다.
그 느낌이 너무 좋습니다. 그것이 아마도 생명의 느낌 , 영적인 느낌이겠죠?
그 배경에 번안의 고민이 들어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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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지난 몇 주간 저는 제 안에서 형제님께서 이번 글에서 언급하신 그 '생명의 느낌'에 대해서
제대로 느끼지 못 해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성경도 찬송도 잘 들어오지 않고 , 계속 배고프고 목마르기만 합니다.
사탄의 역사라고 생각되지만.. 잘 이겨내길 기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