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4.23 19:55

영의 법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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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지각을 아는 것이 영을 좇아 행하는 첫째 조건이기 때문에 믿는이는 영의 지각을 알기를 배워야 한다. 만일 믿는이가 영의 지각과 혼의 느낌을 분별 할 줄 모른다면 영의 요구를 따라 행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굶주림을 느낄 때에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춥다고 느낄 때에는 무언가를 입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지각은 어떤 필요와 요구를 나타내 준다. 사람은 자신의 육신에 있는 지각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만 물질적인 것들로 그 필요를 채우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이는 반드시 영의 지각이 어떤 것인가와 영의 각종 지각의 의미와 그 지각들이 요구하는 것들이 무엇인 것과 어떻게 그 요구를 채울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오직 믿는이가 이렇게 자기 자신의 영과 자신의 지각을 알 때만이 영을 좇아 행할 수 있다.

 

영의 법칙에 대하여 믿는이가 마땅히 알아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다. 믿는이가 영의 법칙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영의 지각의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에 영에서 나온 어떤 것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에서 나온 많은 것들을 영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결국 일상 생활에서 영이 가져야 할 위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가 영에 직감과 교통과 양심의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안 후에 우리는 영을 좇아 행할 수 있기 위하여 또한 이것들의 활동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성령으로 충만한 믿는이의 영에는 많은 살아 있는 활동이 있는 법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상관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해를 입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영의 활동을 살피는 습관을 갖는 것이다. 믿는이는 두뇌의 활동보다 영의 활동을 더욱 알아야 한다.


영의 중압감

 

우리의 영은 극히 자유스러운 상태로 보존되어야 한다. 항상 짐이 없고 하늘을 나르는듯한 영을 가진 사람만이 생명을 자라게 하고 사역에 장애가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믿는이는 영의 중압감이 무엇인가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많은 때에 사람은 천근(斤)의 중압감이 마음에 있는 듯이 자신의 영에 압박과 묶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압감의 유래를 연구해 보아도 어떤 이유를 찾아내지 못한다. 이러한 중압감은 대부분이 갑작스럽게 임한 것이고 부지불식 간에 돌연히 몰래 들어온 것이다. 이러한 압박감은 믿는이를 성령과 동역하지 못하고 영의 기능을 상실케 하도록 그의 기쁨과 경쾌함을 약탈하기 위하여 대적이 사용하는 수단이다. 만일 믿는이가 이러한 압박감의 근원과 영에 압박을 느끼는 그 의미를 모른다면 그는 자기의 영이 즉각적으로 정상 상태로 회복할 수 있도록 이 중압감을 처리하지 못한다.

 

그런데 믿는이는 자신의 이러한 느낌의 유래를 이상히 여기거나, 그것을 천연적이거나 우발적인 것으로 생각하거나 조금도 상관치 않고 영에 압박을 그냥 내버려 둔다. 많은 때에 믿는이들은 이러한 중압감을 상관치 않고 임의로 계속 사역하기 때문에 갈수록 점점 괴로움이 더하여 자주 대적이 사용하는 압박감에 의해 희롱을 당하게 된다.

 

결국은 많은 때에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고자 하지만 그는 그러한 중압감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지 못하게 되고 이러한 압박 하에 영의 직감은 아주 우둔하게 변해 버린다. 그러므로 사탄과 그의 악령들은 믿는이의 영에 압박을 가하고 자유하지 못하도록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얼마나 많은 경우에 믿는이들은 이 중압감이 사탄으로부터 온 것임을 모르고 혹 안다 하더라도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지.

 

만일 믿는이에게 이러한 중압감이 있다면 결국 실패하고 만다. 만일 아침에 이러한 중압감이 있는데에도 즉시 제거하지 않는다면 온 종일 실패하고 만다. 자유의 영이 승리의 근본이다. 우리에게 아무 근심이 없는 영을 가지고 있어야만이 대적과 싸울 수 있고 하나님의 생명을 살아 나타낼 수 있다. 만일 영 안에 압박이 있다면 믿는이는 분별력을 잃게 되고 하나님의 참된 인도도 잃게 된다. 일단 사람의 영이 압박을 받으면 생각은 이에 영향을 받게 된다. 생각이 작용하지 못할 때에 모든 것이 멈추게 되거나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영 안에 압박감이 있을 때에 혹은 무게를 느낄 때에 즉시 처리하는 것이다. 결코 내버려 두는 태도를 취하지 말라. 당신이 중압감을 그냥 내버려 둔다면 그 중압감은 당신에게 고통을 안겨다 줄 것이다. 또한 이 중압감은 점점 심해질 것이다.

 

만일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것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습관이 되어서 그것을 제거할 생각도 갖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될 때에 부지불식 간에 이러한 중압감은 당신의 생명의 일부가 된다. 이렇게 될 때 영적인 것들은 당신에게 골치 아픈 것들이 되고 영적 노정에서 진보하기가 어려워진다.

 

만일 당신이 한번 처리하지 않는다면 다음에 중압감은 더 쉽게 당신에게 임할 것이다.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은 즉시 수중의 일을 멈추고 영의 지각의 요구를 멸시치 않는 것이다. 즉시 의지로 중압감을 거절하고 영으로 거절해야 한다. 어떤 때에는 목청을 높여 이 중압감을 반대하는 말을 외쳐야 한다. 어떤 때는 영의 힘으로 하는 기도로 거절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이 우리 영 안에 압박감을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중압감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도 필수적인 수속(手續)이다. 만일 그 원인을 제거하지 않았다면 중압감은 계속 남아 있게 된다. 그러므로 대적의 공작을 거절할 때에 대적이 공격하는 이유까지도 거절해야 한다. 이럴 때에 당신은 그가 강탈해간 위치를 되찾을 수 있다.

 

만일 당신에게 분별력이 있다면 당신은 당신이 실패한 이유가 어떤 때, 어떤 일에서 하나님과 동역하지 않기 때문인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동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적이 중압감으로 당신을 압제할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이러한 지위는 필히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는 대적이 우리의 실패로 인해 일하는 그 근원을 거절해야 한다. 이것은 대적을 도망가게 할 것이다.


영의 봉쇄

 

영은 자신을 표현할 기관으로서 혼과 몸이 필요하다. 영은 주부로서 그를 위해 일하고 그의 뜻을 성취해줄 하인과 종들이 필요하다. 영은 전류로서 필라멘트가 있어야 그 빛을 표현할 수 있다. 만일 혼과 몸이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고 악령의 공격을 받는다면 영은 봉쇄되어 출구를 얻지 못하게 된다.

 

원수는 영의 욕구를 알기 때문에 그는 자주 믿는이의 혼과 몸 안에 역사하여 혼과 몸의 본래 기능을 멈추게 한다. 이러므로 영이 필요로 하는 표현의 기관을 갖지 못하게 하고 영이 승리하는 지위를 박탈해 간다. 이러한 때에 사람의 생각은 공격을 받아 분란하게 되고, 감정은 외로움과 괴로움을 느끼며, 의지는 살아 있지 못하고 피곤하게 느껴 능동적으로 온 존재를 다스릴 수 없게 된다. 몸은 어쩌면 아주 피곤을 느끼고 혹은 조금 게을러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만일 믿는이가 자기의 혼과 몸이 이러한 공격을 받은 후에 즉각적으로 그것을 대적하고 처리하지 않는다면 그의 영은 봉쇄되어 대적과 산 방식으로 싸울 수 없게 되고 또한 자신의 승리의 진지(陣地)를 보존할 수 없게 된다.

 

일단 영이 봉쇄되면 믿는이는 활발한 태도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는 조금 수줍어 하게 되고 자신을 감추며 대중 앞에서 무엇을 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 그는 승리의 진지(陣地) 후방으로 물러나기를 좋아하고 「나타나기를 싫어하게」 된다. 혹 그는 이것을 자신의 깨달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지로는 그의 영이 봉쇄된 것임을 모른다.

 

성경을 읽을 때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기도할 때에는 할 말이 없어져 버린다. 그는 자신의 모든 영적인 일과 체험에 대해 아무런 흥미가 없어져 버린다. 어떤 때는 그것을 재미 있는 것이라고 느낀다. 전달하러 갈 때 그는 조금도 효력을 느끼지 못하고 공식대로 일을 하는 것같이 느낀다. 만일 이러한 봉쇄된 상태가 계속 지속된다면(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혹은 그 사람 자신의 기도로 그 중에서 구원받지 않은 한) 나중에 대적의 더 심한 공격을 받게 되고 숨이 막히고 불통함을 느낀다. 만일 믿는이에게 지식이 없다면 이것을 이상히 여길 것이다.

 

더 일반적인 상황은 사람들이 그 근원과 원인을 연구하지 않고 포기하고 방임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실제로 말하자면 모든 영성의 체험과 느낌은 다 원인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의깊게 살펴서 이러한 것들을 우리 안에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체험의 원인은 바로 영이 봉쇄되었기 때문이다. 영 밖의 혼과 몸이 닫혀서 결국 영은 표현할 길이 없게 된다. 사탄은 영을 봉쇄하여 암실(暗室)에 가두고 혼이 영의 인도를 받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영의 봉쇄가 제거될 때 믿는이는 공기가 통하듯 과거의 가벼운 상태를 회복하게 된다.

 

이러한 때에 믿는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의지를 사용하여 소리 높여 말하는 것이다. 사탄을 대적하는 말을 하는 것인데 큰 소리로 십자가의 승리와 대적의 실패를 선포함으로 자기의 혼과 몸 안에 있는 대적의 역사에 전일하게 대항해야 한다.

 

우리의 의지는 이러한 선포 뒤에서 모든 봉쇄를 강력하게 거절해야 한다. 기도가 그 중의 한 방법이다. 많은 때에 기도는 영을 열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럴 때에는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요한다. 이때의 기도는 대적의 모든 공격을 이기기 위해 주 예수의 승리한 이름을 부르는 것이 가장 좋다. 또한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힘껏 밖으로 뚫고 나올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영의 피해

 

믿는이의 영은 악한 영의 독(毒)을 먹을 수 있다. 이것은 곧 대적의 화전(火箭)이다. 그는 직접적으로 그의 화전(火箭)을 믿는이의 영 안으로 쏘아 넣을 수 있다. 사탄은 근심과 걱정, 슬픔과 괴로움과 마음 아픔을 믿는이의 영에 심고 믿는이로 하여금 『영 안에 슬프게 한다』(삼상 1:15). 그러나 『영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잠 18:14).

 

그러므로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믿는이가 슬픔을 느낄 때에 그는 그 슬픔이 자신으로 인한 것이고 그것은 아주 천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뿐 그 슬픔의 근원을 살피지 않고 조금도 대적하지 않고 아무 소리 없이 아무 의심도 없이 자기에게 임한 모든 것을 받아 들인다. 이것이 가장 위험한 일임을 기억하자. 우리는 결코 어떤 사상이나 느낌을 함부로 우리 안으로 받아 들이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영을 좇아 행하려 한다면 반드시 범사에 깨어서 우리의 사상과 느낌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살펴야 한다.

 

어떤 때에 사탄은 우리의 영을 강팍하고 온유하지도 않고 불순종하며 비좁고 이기적이게 만든다. 이것은 우리의 영이 성령과 동역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믿는이의 사랑을 잃게 한다. 또한 온유한 인품과 남을 동정하는 것과 남의 약함을 체휼하는 마음을 잃게 한다. 이럴 때 그는 성령이 그를 크게 쓰지 못하게 한다. 이는 그가 이미 주님의 관대하심을 잃어버리고 자기를 어떤 한계 안에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때에 대적은 믿는이에게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영을 준다. 이것은 믿는이가 가장 해를 받기 쉬운 점이다. 거의 모든 영적인 믿는이가 타락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렇게 남의 흠만을 잡고 복수하려는 것은 영적인 생명을 가장 심하게 해치는 독소이다. 믿는이는 이러한 것에 의해 독을 먹었어도 그것에 대해 분명치 않고 다만 그것이 자신의 미움이므로 제거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사탄에게서 온 것임을 모른다.

 

어떤 때에 사탄은 믿는이의 영을 비좁게 만든다. 그는 믿는이로 남과 선을 긋고 갈라지게 한다. 만일 믿는이가 교회가 한 몸이라는 관점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작은 단체」를 주로 삼는다면 이것은 그의 영이 이미 위축되고 비좁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난다.

 

영적인 믿는이는 곧 하나님의 일을 자기 일로 삼고 온 교회를 마음 속에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만일 그의 영이 열린다면 생명의 강수는 어디나 흐르게 될 것이다. 그 반면에 그의 영이 비좁아진다면 그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자신의 유용성을 감소시키게 된다. 만일 믿는이의 영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포용할 정도로 넓지 못한다면 그의 영은 이미 독을 먹은 것이다.

 

어떤 때 사탄은 믿는이의 영을 교만하게 만든다. 이럴 때 믿는이는 자기를 높이고 존귀하다고 생각한다. 대적은 믿는이로 자기 자신이 볼 품 없는 사람이 아닌 아주 중요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일에서 자기 자신은 적지 않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게 한다. 이러한 영 또한 믿는이가 넘어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영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악한 영은 바로 이러한 것들 혹은 다른 독소를 믿는이의 영 안에 주입한다. 만일 믿는이가 즉각적으로 이것들을 대적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즉시 「육체의 일」이 될 것이다. 만일 믿는이가 영 안에 사는 법을 알았다면 그것들은 최초에 독이 있는 씨앗에 불과할 뿐 육체의 일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믿는이가 그것들을 대적하지 않고 받아 들였다면-혹 부지불식간에-얼마 안 되어서 그것들은 육체의 죄로 변해 버릴 것이다.

 

영 안의 독소를 제거하지 않을 때 그 독소는 즉시 영 안의 죄로 변한다. 영 안의 죄는 어떤 죄보다 더욱 심각하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가라사대 너희는 무슨 영으로 말하는지도 모르는구나』(눅 9:54-55). 우리가 어떤 영을 품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많은 때에 우리는 우리의 영이 사탄에 의해 선동(煽動)되었는데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영이 틀렸을 때에 모든 것이 틀린 것이다.

 

이 두 제자의 체험에서 우리는 잘못된 영이 말에서 제일 잘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말이 표현하는 것은 목소리보다 더 많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경우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그 성조(聲調)가 잘못되었다. 만일 우리가 승리하려면 우리의 말의 성조를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영이 악한 영에 의해 만진 바 될 때 우리는 즉시 온유함을 잃게 된다. 강팍한 음성과 강포한 음성과 귀를 따갑게 하는 음성은 다 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음성은 그 소리를 말한 사람이 이미 사탄의 독소에 의해 선동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평상시 어떻게 말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정죄의 뜻을 갖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의 말이 참되다 하더라도 그 말 뒤에 비평과 정죄와 분노와 시기하고 미워하는 영이 잠재되어 있을 수가 있다. 우리는 마땅히 사랑 안에서 참된 말을 해야 한다. 만일 우리의 영이 청결하고 온유하다면 우리는 참된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말 속에 정죄하는 영이 있다면 우리는 죄를 범한 것이다. 죄는 어떤 행위만이 아닌 어떤 상태인 것이다. 모든 일 배후에 있는 영이 제일 중요하다. 많은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일하면서도 죄를 범할 수 있다. 일은 진행하더라도 그 배후에 불성실과 싫어하는 것과 원망하는 영이 숨어 있을 수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영을 달콤하고 온유한 상태에 보존해 두어야 한다. 우리의 영은 순전하고 전일해야 한다. 우리는 잘못된 영을 죄로 여기는가? 우리는 원수가 우리의 영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영이 원수의 독을 먹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죄를 제할 정도로 겸손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의 어조가 높아질 때 우리는 영으로 말을 멈추고 계속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말하는 사람에게 즉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는 같은 말과 청결한 말을 하기 원합니다. 우리는 원수를 반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형제에게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에는 죄가 남아 있게 된다.

 

믿는이는 자기의 영이 원수에 의해 선동되지 않도록 자기 영을 보존하기를 배워야 한다. 또한 어떻게 자기의 영이 달콤하고 온화하게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평상시에 우리는 원수의 화전(火箭)을 멸하기 위해 일찍이 믿음의 방패를 가져야 한다. 이 뜻은 원수의 공격에 대항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앙망하기 위해 살아 있는 믿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의 방패이지 축출기(逐出機)가 아니다. 믿음은 화전을 끄기 위한 것이지 화전을 빼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일 믿는이가 화전을 맞았다면 즉시 화전의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즉각적으로 대적하는 태도를 취해야 하고 대적에게서 온 모든 것을 거절해야 하며 하나님께 정결케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영의 침체

 

이 「영의 침체」가 발생하는 이유는 대개가 믿는이가 자기 속을 들여다 보는데에서 기인한다. 혹은 혼 생명이 작용하여 대치되지 않으므로 결국 모든 체험이 자신 때문이고 외부 흑암의 세력의 침투나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경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믿는이의 영이 밖으로 향하지 않고 속을 향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은 즉시 멈추게 되고 한 동안 지난 후에-만일 믿는이가 즉시 속을 들여다 보는 것을 처리하지 않으면-영은 혼에 의해 감싸지게 된다. 때로 이 영이 혼에 의해 침체되고 잠기는 이유는 다름이 아닌 믿는이가 악한 영에 속았기 때문이다.

 

악한 영은 몸의 감각과 여러 가지 기이하고 즐거운 체험을 믿는이에게 준다. 만일 믿는이가 살펴보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부지불식간에 이러한 감각 세계에서 생활하게 되고 이로 인해 영이 혼의 위치에 떨어지게 된다. 때로 믿는이는 그리스도가 계신 곳을 모르기 때문에 속아서 영을 하락시킨다. 성령이 믿는이의 영 안에 거하는 것은 곧 보좌에 앉은 그리스도를 믿는이에게 나타내시는 것이다.

 

사도행전과 에베소서와 히브리서는 현재 그리스도가 하늘의 위치에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믿는이의 영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그러나 무지함으로 믿는이는 자기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한다. 그는 자기 속에 있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려 해보지만 이것은 그들의 영을 구름 위로 높이 치솟지 못하게 하며 침체되어 혼의 영역 안으로 떨어지게 한다.

 

총괄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작용들은 믿는이로 생활가운데서 영 안에 살기 보다 느낌 안에 살게 한다. 믿는이는 자신이 아직 영에 속하지 않았을 때에는 아직 실제적으로 영 안에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적은 가장(假裝)된 것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영 안에서 성령의 능력이 옮겨 부어짐을 체험한 후에 그의 앞에는 전에 몰랐던 별천지가 놓이게 된다. 위험은 바로 이 때이다. 사탄의 역사는 믿는이로 영 안에서 살지 못하게 하는데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에게 크나큰 손실을 주기 때문이다. 사탄의 방법은 바로 혼과 몸의 감각을 이용하여 믿는이를 매혹하고 속이며 그것을 믿는이에게 누림이 되는 영적 체험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많은 믿는이들이 비록 영적인 생명 안에 들어갔지만 영의 법칙들을 모르기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사탄은 여러 가지 몸의 느낌과 초자연적인 체험을 믿는이에게 준다. 만일 믿는이가 외부로부터 온 초자연적인 것들이나 감각상의 영적 체험을 의지한다면 이것은 믿는이의 영 안에 영적인 생명이 저지를 당하게 된다. 이것이 믿는이로 밖의 혼이나 몸 안에 살게 하고 이로 인해 (가장 깊은 곳에 있는)영의 하나님과의 동역을 잃게 한다. 이렇게 될 때 사람의 혼과 몸은 다시 새로이 높이 치솟고 세력을 얻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영이 완전히 침체하게 된다.

 

영이 침체될 때에 사람은 영의 지각을 감지 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많은 영적인 믿는이가 때때로 자신의 영이 없어진 것같다고 느끼는 이유이다. 혼과 몸이 차지하는 위치가 너무 광범위하고 또 사람이 지각에 의해 살기 때문에 사람의 혼과 몸은 모든 압박과 고난과 싸움을 느끼게 된다. 이럴 때에 사람의 감각이 영의 역사를 대치하게 되고 영의 지각은 혼과 몸의 강력한 느낌 안에 매몰된다. 그 결과 영적인 생활과 일은 완전히 중단된다. 만일 이러한 상태를 오랫동안 내버려 둔다면 완전히 타락하여 악한 영에 들릴 것이다.

 

그러므로 영의 지각을 해치는 것은 모두 거절해야 한다. 광적인 웃음이나 슬픈 울음, 몸의 각종 열렬한 표현을 막론하고 이 모든 것을 거절해야 한다. 몸은 온전히 안정된 상태가 유지되어야 한다. 초자연적인 것을 감지하는 것이나 지나치게 천연적인 사물을 감지하는 것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 영을 좇아 행하지 않고 육신을 좇아 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영의 미세한 지각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일을 한 가지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 일단 영이 침체되면 혼은 영을 포위하고 다스리려고 하기 때문에 믿는이는 자기의 영이 자신 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밖으로 향하게 하기를 배워야 한다. 믿는이는 자기의 영이 밖을 향하여 사탄을 공격하지 않을 때에 도리어 사탄의 공격을 받아 영이 침체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믿는이의 영이 밖으로 흘러 나갈 때만이 성령은 유출된 사람의 영을 통해 그분 자신의 생명을 흘러 보낼 수 있다.

 

믿는이가 자기 속을 들여다 볼 때 자기의 영은 침체하게 되고 성령의 「넘쳐 흐름」은 즉시 저지를 당하게 된다. 성령이 하나님의 생명을 유출시키기 위해서는 믿는이의 영이 필요하다. 만일 믿는이가 자기 속을 들여다 봄으로 영을 침체하게 한다면 성령의 생명은 외부로 흘러나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이는 자기의 영이 무엇 때문에 침체되고, 어떻게 해야 자기 영을 원래 위치로 회복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믿는이는 자기 영의 능력이 새어나가는 것을 보는 자기의 영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고 즉시 회복할 길을 찾아야 한다.


영의 부담

 

영의 부담은 영의 중압감과 차이가 있다. 영의 중압감은 사탄에게서 온 것으로서 믿는이를 괴롭게 하고 억압한다. 영의 부담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서 그분의 뜻을 나타내고 믿는이의 동역을 얻어야 한다. 영의 중압감은 압박을 주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쓸모가 없고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한다. 영 안의 부담은 하나님이 주신 짐으로서 그분으로 인해 (1) 일하거나 (2) 중보기도 하거나 (3) 메시지를 전하게 한다. 이러한 부담은 목적과 이유가 있고 이익이 있다. 믿는이는 영의 부담과 영의 중압감을 구분하기를 배워야 한다.

 

사탄은 믿는이에게 무엇을 짊어지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믿는이의 영을 포위하여 어떤 중량으로 믿는이를 억압한다. 사탄이 주는 중압감은 믿는이의 영에 속박을 주고 생각이 작용하지 못하게 한다. 짐을 지는 사람은 부담을 지기만 하는 반면에 사탄의 억압을 당하는 사람은 온 몸이 묶임을 당한다. 흑암의 권세가 임할 때에 믿는이의 몸은 즉시 자유함을 잃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부담은 이것과 다르다. 하나님의 짐이 아무리 「무겁다」하더라도 기도하지 못할 정도가 되지 않는다. 기도의 자유함은 결코 어떠한 부담 하에도 상실되지 않는다. 그러나 원수가 집어 넣어준 중압감은 믿는이로 기도 안의 자유함을 잃어버리게 한다. 또한 기도로 싸우고 대적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 중압감을 제거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부담은 우리가 기도하기만 하면 짐을 벗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원수의 중압감은 이렇지 않다.

 

또한 영의 중압감은 은밀히 기어 들어온 것이고 영의 부담은 영 안에서 성령이 역사한 결과이다. 영의 중압감은 아주 고통스러운 것으로 믿는이의 생명이 억압을 당하게 하나 영의 부담은 아주 즐거운 것-물론 육체는 아주 즐겁다고 여기지 않는다-이다. 그러나 만일 이 영의 부담을 거절하고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이는 이것이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11:30 참고).

 

모든 진실된 사역은 거의가 먼저 영 안에 부담으로 시작된다(자연히 영 안에서 부담이 없을 때에는 생각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고 그분을 위해 말하거나 누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게 하려고 우리 영 안에 어떤 짐을 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영의 법칙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의 수중(手中)의 일을 임의로 계속함으로 영 안에 짐을 더욱 무겁게 하지 않을 것이다. 혹은 시일이 오래 됨으로 이 부담에 대한 느낌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 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도록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할 것이다. 이 부담의 의미를 이해한 후에 우리는 우리가 아는 대로 행해야 한다. 일이 성사된 후에는 이 짐이 필경 우리를 떠날 것이다.

 

믿는이의 영은 평상시 늘 아무 압박이 없이 자유로워야만이 하나님에게서 부담을 받을 수 있다. 이는 오직 자유한 영만이 성령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무거운 짐으로 가득한 영은 직감의 예민도를 잃었기 때문에 좋은 그릇이 될 수 없다. 많은 때 믿는이는 하나님에게서 부담을 받고서 그 부담의 요구대로 행하지 않으므로 그의 영은 그 부담으로 인해 수일 동안 고통을 느끼고 또한 하나님이 주신 부담을 줄일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기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힘입으며 생각을 사용하여 이 부담의 의미를 살펴 아는 것이다.

 

많은 때에 영 안의 부담은 기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골 4:12). 사실상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부담을 넘어설 수 없다. 부담이 없이 계속 기도하는 것은 결코 효력을 볼 수 없다. 그런 기도는 자아의 뜻에서 나온 것이다.

 

영 안의 기도의 부담은 오직 기도함으로 가볍게 할 수 있다. 모든 부담이 이와 같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에 어떤 일을 짊어지라고 했을 때 오직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일을 이행-기도, 그분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 등으로-해야만이 영 안에 부담이 덜어질 수 있다. 영 안에 이러한 기도의 부담이 있기에 우리가 성령 안에서 기도하게 되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는 기도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영 안에 기도의 부담이 있을 때에 기도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그러한 부담을 제하고 거기서 해방받을 길이 없다. 그 일을 성사시켜야만이 즉시 부담이 제거된다.

 

적지 않는 때 믿는이들은 그들의 영 안에 쌓인 기도의 부담이 너무 무겁기에 기도를 시작할 때에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기도라고 느낀다. 그러나 기도하면 할수록 믿는이는 자기의 영 안에서 계속 아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영에 부담이 되는 것이 완전히 우리에게서 내려질 때까지 최선을 다해 기도 안에서 그것을 말해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생명과 우리의 모든 것을 기도 안에서 표현하면 할수록 우리는 평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 안에서도 늘 있는 한 가지 시험은 바로 부담이 다 털어지기도 전에 우리가 기도를 멈추는 것이다. 믿는이는 대개 영 안에 약간 상쾌함을 느낄 때 그의 기도를 이미 마쳤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영적인 일의 시작인줄이야! 만일 이 때에 다른 일로 돌이킨다면 영적인 일은 손상을 입게 된다.

 

믿는이는 결코 영적인 일은 다 기쁘고 상쾌한 것인 반면에 부담이 있는 것은 영적 체험을 잃게 된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영 안의 부담이 곧 참된 영적인 일이라는 점을 믿는이들이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이다. 기타 소위 종일토록 감각에서의 쾌락과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짐을 지기를 두려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사는 혼적인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부담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우리는 이제 자신이 타락했다거나 무엇을 잘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탄은 믿는이들로부터 공격을 피하기 위해 믿는이들이 이러한 논조(論調)를 갖는 것을 가장 좋아 한다. 우리는 자신을 잘못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사탄의 말을 듣고 우리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잘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사탄(마귀)은 더욱 우리를 참소하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참된 영적인 일은 바로 사탄을 향해 공격하고 믿는이들을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다 즐거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자아에 대해 죽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혼적인 사람 중에 참된 영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종일토록 즐거움을 느낀다고 해서 이것이 곧 믿는이가 신령하다는 증거는 아니다. 도리어 자기의 느낌을 주의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전진하는 사람만이 신령한 사람이다.

 

믿는이가 영 안에 부담을 받아 원수와 싸울 때에 홀로 모든 인간 사회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한적한 곳에 가서 원수와 싸울 때가 얼마나 되는지! 또한 싸움의 끝에는 얼굴에 웃음까지 잃을 때가 있다. 그러므로 믿는이는 주님이 그에게 주신 부담을 기뻐해야 한다.

 

믿는이는 반드시 영의 법칙을 알고 하나님과 동역할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그는 이러한 부담을 상관하지 않고 자신을 고통에 빠지게 하고 얼마 안 되서 그 부담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영광스러운 동역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 안에 부담이 생길 때마다 우리는 즉시 기도 안에서 그 부담이 무엇을 위한 부담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만일 싸우라는 부르심이라면 나가서 싸워야 한다. 만일 그것이 복음 전하라는 부르심이라면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기도하라는 부르심이라면 기도해야 한다. 낡은 부담이 지나가고 새 부담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과 동역하기를 배워야 한다.


영의 쇠퇴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이 믿는이의 영 안에서 조수(潮水)처럼 쇠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알듯이 믿는이가 혼에 속할 때에 그들은 그들의 느낌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즐겁다고 느낄 때가 영성이 가장 높을 때라고 생각한다. 그 반면에 고갈되고 안식이 없다고 느낄 때가 영적 생명이 가장 낮을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들의 느낌일 뿐 영적 생명의 실제적인 상태가 아니다.

 

영적 생명도 가라앉을 때가 있다. 이것은 혼의 감각과 다르다. 믿는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나서 그는 어느 한순간에 전과(충만할 때) 똑같을 수 있으나 얼마 못되어 점점-돌연적인 것이 아님-쇠퇴해진다. 감각의 쇠퇴와 실제적인 쇠퇴의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자는 대개가 돌연적인 것이고 후자는 대개가 점차적인 것-자기 영 안의 생명과 능력이 자기가 단번에 받은 것이었으나 이제는 점차적으로 쇠퇴했다고 느낀다-이다. 이것은 그의 영 안에 있어야 할 기쁨과 평강과 능력을 잃게 한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하루하루 그를 약화시킨다.

 

이럴 때에 믿는이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도 아무 맛이 없고 성경을 읽는 것도 흥미가 없으며 그의 마음에 감동을 줄만한 메시지나 구절도 없는 것같이 느끼고, 설사 그러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전과 같이 많지 않다. 기도도 고갈되고 무미건조하고 아무 의미가 없고 할 말이 없어진 것같이 되어 버렸다. 간증하기도 싫어지고 전과 같은 넘쳐 흐름이 없는 것 같이 되어 버린다. 생명도 전과 같이 강건하지 않고 그렇게 흥분되거나 가볍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게 되어 모든 것이 다 쇠퇴한 것 같이 되어 버렸다.

 

조수(潮水)에는 실지로 밀물과 썰물이 있다. 그런데 우리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도 이러한 오르락 내리락이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생명은 쇠퇴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영원히 넘쳐 흐른다. 하나님의 생명은 바다의 조수같이 밀물 썰물의 구분이 없고 영원히 흐르는 생수의 강과 같이 항구적으로 흐른다(요 7:38).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조수와 같이 어떤 때 반드시 쇠퇴할 필요가 없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영영 변하지 않으신다. 그분에게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 영 안에 있는 생명은 쉬지 않고 흐르는 강수같이 넘쳐 흘러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믿는이가 자기 생명이 이미 쇠퇴해졌다고 느낀다면 이것은 자기의 생명이 쇠퇴한 것이 아니라 이 생명이 멈추고 흐르지 않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쇠퇴가 불필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결코 사탄에게 속아서 아직 육체 안에 사는 사람은 영원하고도 항구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은 생수의 강같아서 저지함이 없다면 영원하고도 항구적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믿는이가 항구적으로 넘쳐 흐르는 체험을 가질 수 있다면 쇠퇴함은 필수적인 것이 아닌 비정상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지금 문제는 영적 생명이 쇠퇴하는데 있지 않고 어떻게 그 생명이 넘쳐 흐르게 하느냐에 있다. 현재의 필요는 어떻게 해야 충만할 수 있느냐에 있지 않고 어떻게 해야 흐르게 하느냐에 있다. 생명의 근원이 아직 믿는이 안에 있기는 있지만 단지 현재 막혔을 뿐이다. 들어오는 입구는 문제가 없는데 나가는 출구가 막혀 있다. 바로 흐르지 않고 통하지 않기 때문에 생명의 강수가 다시 흘러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출구가 뚫린다면 생명의 강수는 변함없이 흐르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이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생명이 아니라 더 많은 생명의 넘쳐 흐름이다. 믿는이가 자기 영 안에 있는 생명이 쇠퇴한 것같이 느껴질 때에는 어떤 부분이 막힌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사탄은 그것을 당신의 영성의 퇴보로 여기게 할 것이다. 주위의 사람들은 당신이 능력을 잃었다고 생각할 것이고 당신 자신은 당신이 무슨 큰 죄라도 지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사실 같이 보이지만 실지로 그렇지 않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일 때가 있으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많은 때 그렇게 된 것은 끝없는 강수를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과 동역하는 법과 하나님의 조건을 이행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이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믿는이는 즉시 기도하고 묵상하며 시험하고 연구하고 조심하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쇠퇴」한 원인을 계시해 주시도록 그분께 간구해야 한다. 당신은 살아 있는 방식으로 영적 생명이 항상 흐르게 하는 조건을 이행하지 않은 부분이 어디인지 그 「쇠퇴」한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참으로 쇠퇴했다는 것-이 단계는 또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인정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살아 있는 방식으로 쇠퇴하게 된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사탄과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의 모든 가상(假想)이 믿을만하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때로는 참된 것일 수가 있기 때문에 역시 고려해볼 가치가 있다. 원인을 안 후에는 즉시 그 근원을 처리해야 한다. 영적 생명은 자동적으로 흘러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영적 생명의 흐름을 저지하는 원인을 제거하지 않았다면 영적 생명은 흐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매번 영성의 「쇠퇴」가 있을 때마다 당신은 즉시 기도와 묵상 가운데서 그 원인을 연구해보고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는 법칙을 이해하고 원수의 공격을 대적하는 것은 이 생명으로 다시 넘쳐 흐르게 한다. 이럴 때에 이 생명은 원수의 모든 견고한 진을 파하기 위해 다시 흥분되어 전보다 더 힘 있게 된다.


영의 실직

 

사람의 영은 전등과 같다. 영이 성령을 접할 때에 빛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러나 일단 성령을 떠나면 즉시 흑암으로 덮여진다. 본래 사람의 영은 여호와의 등이었다(잠 20:27). 하나님의 목적은 영이 빛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때에 믿는이의 영은 흑암에 덮여 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사람의 영이 성령과의 접촉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이의 영이 성령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알아 보려면 이 영이 광명을 잃었는지를 보면 된다.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하나님의 성령은 사람의 영 안에 거하시고 사람이 성령과 동역하는 것도 그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람의 영이 비정상적이 되는 것은 마치 성령과의 연결을 잃고 빛 비춤을 잃은 것과 같다. 믿는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과 동역할 수 있도록 자기의 영을 건강하고 조용한 상태에 유지시키는 것이다. 사람의 영이 외부의 분란함에 영향을 받을 때에는 즉시 성령과 동역할 수 없고 흑암으로 변하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이상에서 말한 여러 가지 상태는 모두 영을 실직하여 성령과 동역하지 못하게 한다. 영이 실직할 때에 승리는 불가능한 일로 변해 버린다. 만일 믿는이가 아침 일찍 일어날 때에 자기 영이 없어진 것같이 느낀다면 원수는 이것은 어제 그가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육신의 피로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믿는이가 살피지 않는다면 그의 영이 실직하여 하루의 시험을 대적하고 하루의 일과를 마칠 힘이 없게 된다.

 

그는 마땅히 즉각적으로 자기의 몸이 영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것과 사람의 영이 마땅히 있고 강건하여 능히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을 이해한 후에 그는 자기의 영이 현재 원수의 공격을 받고 있고 이미 실직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는 즉각적으로 원래 상태대로 회복시켜 달라고 주께 간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에 그는 실패하고 만다. 아침 일찍부터 우리의 영이 실직했다면 결코 그런 상태가 정오까지 지속되도록 내 버려 두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실패를 자초하는 길이다.

 

믿는이가 자기의 영이 실직하는 것을 알 때 즉각적으로 사탄의 모든 역사와 그렇게 역사한 원인을 거절해야 한다. 만일 이것이 원수의 공격에 지나지 않는다면 대적할 때 우리의 영은 자유함을 회복하게 된다. 만일 이 공격에 원인이 있다면(즉 믿는이가 그를 위해 여지를 남겨 두었기 때문이라는 뜻임) 마땅히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서 제거해야 한다. 이것은 믿는이의 과거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는 사탄이 왜 자신의 영을 공격할 수 있는지, 자기 자신과 자신의 환경과 가정과 친척과 친구와 자녀와 사업 등을 일일이 기도해 보아야 한다.

 

만일 그가 어떤 일에 대해 기도할 때에 영 안에 불편한 것이 느껴진다면 그는 자기의 영이 공격받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것을 제거해야 한다. 기도를 마친 후에 그는 자유함을 얻고 영도 그 기능을 회복하게 된다. 때로 영이 실직하는 이유는 믿는이가 자기의 영을 자유한 상태에 방임하고 통제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데서 기인한다. 결국 그는 정상적인 궤도에서 이탈된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다』(고전 14:32)고 말한다. 「자기의 영을 좇는 사람」은 「우매한 선지자」(겔 13:3)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믿는이가 자기의 영이 너무 지나치거나 너무 못 미치지 않도록 의지를 사용해서 영을 통제하지 않고 성령과의 동역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영도 역시 실직하게 된다. 믿는이는 마땅히 사람의 영도 방종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잠언에 「거만한 영」(16:18)이라는 말씀이 있다.

 

사람의 영은 성령을 떠나서 단독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만일 믿는이가 성령께 순종하도록 자기의 영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그의 영은 자유로이 행동하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이는 자기의 영이 하나님의 궤도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안정됨 가운데에서의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으므로 하나님과 동역을 잃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때로 영의 실직은 믿는이의 영이 강팍하게 되는 데에서 기인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부드러운 영이 필요하다. 만일 영이 강팍하고 자신을 위하며 겸손히 순종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성령의 역사는 제재를 받게 된다. 성령을 의지하는 영만이 성령의 뜻을 성취할 수 있다.

 

믿는이는 반드시 제일 짧은 시간 내에 성령과 일치한 뜻을 따르려는 「자원하는 영」(출 35:21)을 가져야 한다. 믿는이의 영은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감지하여 즉각 반향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예민해야 한다. 만일 믿는이의 영이 약간 강팍해져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지 않을 수 없고 영 안에서 성령이 발한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이는 자신의 영을 부드러운 상태에 보존하고 항상 영 안의 세미한 지각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말한 『영을 근심케 하지 말라』(살전 5:17)의 의미이다.

 

영의 모든 역사와 감동과 지각을 믿는이는 마땅히 조심스럽게 추종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그의 영 안의 지각이 갈수록 예민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도 이 가운데서 그분의 뜻을 알게 하실 수 있다.

 

영을 좇아 행하기 원한다면 믿는이는 마땅히 자기의 영이 언제 실직하여 성령과 동역하지 못하게 되는지와 무엇 때문에 실직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는 자기의 영이 항상 안정과 단순함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평안함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접촉을 잃게 하는 원수와 자신에게서 나온 모든 분란함을 대적하도록 깨어 자기 영을 지켜야 한다.


영의 상태

 

총괄적으로 말해서 믿는이가 영의 모든 법칙을 알아야만이 영을 좇아 행할 수 있다. 만일 그가 깨어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동역을 잃어버린다면 그는 타락한 것이다. 영의 법칙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영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다. 영의 상태를 살피는 이것이 바로 이상에서 말한 것들의 주된 부분이다.

 

믿는이는 자신의 영의 상태를 인식해야 한다. 그는 영의 정상적인 상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정상을 잃은 영의 상태가 어떤가를 알아야 한다. 본래 영은 사람의 혼과 몸을 다스리는 가장 높은 위치에 처해 있으며 가장 능력 있어야 한다. 믿는이는 마땅히 자기의 영이 이러한 상태에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그는 자기의 영이 싸움이나 환경 때문에 정상도를 잃고 피해를 입지 않았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영의 상태는 다음 네 가지이다.

 

1) 영의 상함 즉 침체됨을 뜻한다.
2) 영이 안정되고 강건하여 정상적인 위치에 처함
3) 영이 재촉함과 강요당함으로 지나치게 활동함.
4) 영에 더러움이 있음(고후7:1). 즉 영에 문제가 있고 죄를 용납함.

 

믿는이는 최소한 영의 이 네 가지 상태를 알고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많은 때에 믿는이의 영은 깨어 있지 않거나 원수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일종의 「밀어댐」을 당하여 결국 그의 영은 가라앉게 된다. 이때에 믿는이는 하늘의 위치와 광명과 승리를 잃어버리고 냉담함과 답답함과 높이 치솟지 못한다는 것을 느낀다. 영은 슬픔이나 기타 백 가지 원인 때문에 완전히 하락하여 날아갈듯한 기쁨을 잃어버리게 된다. 영이 이렇게 상처를 입으면 정상적인 수준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때때로 영도 재촉함을 당하여 정상적인 위치를 떠나 미친듯이 달릴 수가 있다. 믿는이는 혼의 자극으로 인해 뜨거워져서 결국은 영의 안정을 잃어버리게 된다. 때때로 믿는이는 「살아 있는 물체」를 좇으므로 「풀어진 영」을 갖게 된다. 지나친 웃음과 다른 종류의 원인도 다 영을 방임하고 수습하지 못하게 한다.

 

대적과의 오랜 싸움도 역시 영으로 지나치게 활동하게 한다. 사탄은 믿는이의 영이 그와 싸울 때에(혹은 그 후에) 그 싸움에 너무 시달려서 영의 냉철함을 잃고 쉬지 않고 활동하게 한다. 그는 기이한 기쁨이나 다른 것을 믿는이에게 줌으로써 믿는이의 영이 생각이나 의지의 통제를 떠나서 활동하게 한다. 이런 것에서 보호받지 못할 때에 믿는이는 실패하고 만다.

 

때때로 우리의 영은 너무 낮거나 너무 높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더러움이 있다. 이러한 더러움은 때로 영의 강팍함과 불순종 등등의 영 안의 태도로 인한 것이다. 때로는 교만, 질투 등과 같은 영 안의 죄들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천연적인 사랑과 감정과 사상 등의 혼의 작용이 섞어져 있기 때문이다. 영이 더렵혀질 때 정결케 될 필요가 있다(고후 7:1, 요일 1:9).

 

만일 믿는이가 영을 좇아 행하기 원한다면 자기의 영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의 영이 정상적인 위치에 있는지, 아니면 너무 낮거나 너무 높거나 더럽혀진 위치에 있는지를 식별해야 한다. 믿는이는 어떻게 성령의 수준에 이르도록 자신의 억압당한 영을 들어올리고, 어떻게 자기의 의지를 사용하여 지나치게 활동한 영을 제재하여 정상으로 되돌아오게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또한 자신의 영이 하나님과 새로이 동역할 수 있도록 어떻게 더럽혀진 영을 정결케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 제23장 영의 법칙들,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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