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4.23 18:43

영적 노정의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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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을 좇음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날마다 영을 좇아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믿는이들을 항구적인 신령함에 머물게 할 것이다. 또한 믿는이를 육체의 세력에서 지키며 항상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사탄의 공격을 받지 않게 한다.

 

우리가 영의 기능을 안 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즉시 그것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 시도 풀어 놓아서는 안 될 순간순간의 일이다. 오늘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성령의 가르침만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 것이다. 많은 믿는이가 실패한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 단지 성령의 가르침만 받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또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영적 지식으로 만족하지 말고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을 귀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자주 사람들에게서 「십자가의 길」에 대해 듣는다. 대체 「십자가의 길」이란 무엇인가? 십자가의 길은 다름이 아닌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은 자기의 뜻과 애호와 자기의 사상까지도 죽음에 넘기는 것을 요한다. 영의 직감과 계시를 좇으려면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

 

아마 모든 영적인 믿는이는 앞에서 우리가 말한 것같은 영의 기능에 대해 어느 정도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단지 때때로 그러한 체험이 있을 따름이다. 이는 그들이 아직도 영의 모든 기능과 법칙을 명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항상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인지를 모른다. 이러한 진리를 들을 때 간혹 그들의 체험이 그 진리의 진실성을 증명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체험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의 직감이 충분한 성장을 가졌다면 그들은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항상 영을 좇아 행할 수 있게 된다(무릇 영 밖의 있는 것들은 모두 바깥 세계임을 주의하라). 많은 믿는이는 영의 법칙을 모르기 때문에 영을 좇아 행하는 생명이 정함이 없고 실행하기 어려운 일정한 표준이 없는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영 안에 있는 성령의 인도만을 좇으려고 결심하나 그들이 아직 직감의 인도가 믿을만한지를 모르기 때문에 담대함과 경건한 마음을 잃어버리는 믿는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것은 그들이 아직 직감의 뜻을 아는 일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직감의 모든 느낌이 의미하는 바를 모른다. 그 직감이 그들더러 행동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멈추라는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영의 합당한 상태를 모른다.

 

결국 그들은 계속적인 영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 많은 때에 그들은 그들의 영을 정상적인 상태로 보존하지 않으므로 영이 역사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물론 때로 그들이 직감의 계시를 얻지만 여전히 왜 그 때 직감에 계시가 있고 다른 때에 힘써 얻으려고 해도 계시를 얻지 못하는지를 모른다. 그들은 그 실제 안에 있을 때에도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부지불식간에 영의 법을 좇아 행하므로 계시를 얻게 된 것이다. 그들이 다른 때에 간구하기는 했으나 영의 법대로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시를 얻지 못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항상 부지불식간에 영의 법을 좇아 행할 수 있다면 그들은 항상 영의 인도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영의 계시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위해서는 영의 법칙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영의 모든 느낌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 의미를 알도록 배워야 하고 또 이렇게 해야만이 영의 요구를 좇아 행할 수 있고 항상 영을 좇아 행할 수 있다. 영을 좇아 행하기 위해서 영의 법칙을 아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많은 믿는이들은 그들의 영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를 일생의 체험에서 가장 놀라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체험을 매일 갖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이것이 믿는이의 일생에서 한두 번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영의 법대로 영을 좇아 행한다면 그들의 생명이 높이 이끌려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영적 체험을 평상시에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아주 특별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영적 체험은 믿는이들이 날마다 가질 수 있는 정상적인 체험임을 모른다. 이 위치를 떠나서 어두움 가운데 사는 것이야말로 비정상적인 체험이다. 때때로 우리는 어떤 사상같은 것을 얻는다. 만일 우리가 분별할줄 안다면 그 사상이 우리의 영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혼에서 나온 것인지를 살필 것이다.

 

어떤 사상은 영의 불탐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상은 혼의 조급함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다. 믿는이는 이것들을 분별하기를 배워야 한다. 만일 주의한다면 믿는이는 영에 속한 것과 혼에 속한 것을 쉽게 구분할 것이다. 언제든지 믿는이는 자기의 온 존재의 각 부분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알아야 한다. 생각할 때에는 그 사상의 근원을 알아야 하고 무엇을 느낄 때에는 그 느낌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아야 하며 일할 때에는 그 힘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이 무엇이 영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알고 그것을 좇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느낌을 좇아 행하지 않을 수 있고 이것은 우리 몸에 임한 것들이 혼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영에 속한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우리가 알듯이 혼은 바로 우리의 「자각(自覺)-혹은 자기의식」이기 때문에 많은 자기 성찰과 자기의식은 완전히 혼에 속한 것이며 가장 해롭다. 이것은 이러한 종류의 자기 성찰과 자기의식은 항상 자신을 생각하므로 믿는이 자신을 속박하기 때문이다. 또 이로 인해 자아의 생명은 자라게 된다. 자고하는 것은 대개 이러한 자기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 동시에 또 한 종류의 「자기 분석」이 있는데 이것은 영적 노정에서 불가결한 지식이다. 이것을 통해서만 믿는이는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좇아 행하는지를 알 수 있다.

 

해로운 자기의식은 자기의 승패를 생각하므로 자기를 높이거나 열등 의식을 갖는다. 유익한 자기분석은 오직 자신의 사상과 느낌과 애호의 근원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각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그분의 뜻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두뇌가 없는 사람같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지나친 자기의식은 제거해 버려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의 모든 진행 상황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활동을 힘써 살피는 것은 필수적이다.

 

많은 믿는이들이 이미 거듭났지만 언제나 자기에게 영이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에게 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영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 뿐이다. 혹 그에게 영의 직감이 있으나 그러한 직감이 영에서 비롯된 것임을 모를 따름이다. 참되게 거듭난 신자가 의지하여 사는 참된 생명은 바로 그의 영의 생명이다. 만일 그가 가르침 받기를 원한다면 영의 직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혼은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으나 영은 그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혼은 아름다운 경치와 조용한 대자연을 보며 듣기 좋은 음악과 외부 세계에 속한 것들을 볼 때에 즉시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감정이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영은 그렇지 않다. 만일 성도의 영이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다면 그의 영은 혼과 독립되기 때문에 혼과 같이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활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은 어떤 상황에서도 활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믿는이가 참으로 신령하다면 자기의 혼에 어떤 느낌이 있든 없든 육신에 힘이 있든 없든 그의 영은 언제나 활동할 수 있다. 이는 그가 항상 활동하는 영을 좇아 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말한다면 혼의 느낌과 영의 직감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혼의 느낌은 많은 부분에서 영의 직감과 같다. 이 두 가지는 믿는이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히 같아보일 때가 있다. 이러한 상황이 자주 발생하지는 않지만 간혹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정말 분별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만일 이러한 때에 급히 행동을 취한다면 믿는이는 속임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인내로 기다리고 그 느낌의 근원을 거듭 시험해 본다면 성령은 적절한 때에 진상을 그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영을 좇아 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결코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 혼에 속한 믿는이는 누구나 어떤 것에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믿는이는 대개 감정이 아니면 이성에 기울어진다. 이러한 신자는 영에 속하고 영을 좇아 행하려고 할 때에 자주 전에 그들이 기울어졌던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위험이 있다. 감정에 속한 신자는 이때 자기의 명철한 이성을 영의 인도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면에 이성에 속한 성도는 자기의 열렬한 감정을 영의 인도로 착각한다.

 

그도 과거 자신의 냉냉한 생활이 혼에 속한 것임을 알고서 현재 자신의 감정이 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서로 위치를 바꾼 것일뿐 여전히 똑같이 혼에 속한 것임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영의 기능을 기억해야 한다. 영의 인도를 따른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이것은 바로 직감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인 지식이든 교통이든 양심이든 이 모든 것이 직감을 통해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바로 이 직감으로 말미암아 믿는이를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믿는이는 무엇이 영적인 것인지를 판단하지 말고 직감을 좇아 행하기만 하면 된다. 만일 우리가 성령을 좇고자 한다면 반드시 직감 안에서 성령의 뜻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목숨을 다하듯 성령의 은사를 추구한다. 많은 때에 이러한 추구는 기쁨을 구하는 것일 뿐이고 또한 이 배후에 「나」가 있을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자주 느낌에서 성령의 강림하심을 느끼고 그의 몸을 다스리는 외부의 능력이 있어서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불덩이같이 뜨거움을 느낀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의 침례라고 생각한다. 물론 성령도 사람에게 어떤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감정을 의지해 성령을 추구하는 것은 큰 해로움이다. 이것은 사람의 혼 생명을 격동시킬 뿐 아니라 또한 사탄의 거짓된 역사를 유발시키기도 한다.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 어떻게 주님의 임재를 느끼거나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는가를 느끼는데 있지 않고 우리가 직감에서 영을 좇아 행하고 영 안에서 우리에게 성령이 계시해준 것을 좇아 사는 데 있다. 얼마나 많은 때에 우리가 본 「성령의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 천연적인 생명을 의지해 사는 것에 불과할 뿐이며 거기에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이 없고 영적 세계를 해부해 주는 예민한 직감도 없다. 감정이 아닌 직감으로 주와 교통하는 이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 안에 영의 작용에 관한 기록을 읽어본 후에 우리는 영이 감정과 같이 뜨거울 때도 있고 이성과 같이 냉정할 때도 있음을 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체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엇이 영에서 나온 것이고 무엇이 혼에서 나온 것인가를 구분할 줄 안다. 만일 믿는이가 직감으로 참되게 하나님을 알고 이 직감을 좇아 행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서 헛되이 생각 안의 추론이나 감정에서 성령의 감동을 느끼려는 것을 추구한다면 그는 여전히 육체를 좇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영적 생명을 생기 없는 상태에 떨어지게 할 것이다.

 

바울의 행위에서 우리는 영의 직감을 좇아 행해야할 중요성을 더욱 깨달을 것이다. 그는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계시하시기를)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 갔노라』(갈 1:16-17). 전에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계시는 영 안에 속한 것이다.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아 계시록을 쓸 때에도 그는 영 안에서 계시를 받은 것이다(계 1:10). 성경은 동일하게 계시가 믿는이의 영 안에 있는 것이라고 증거한다.

 

사도는 당일 영 안에 계시를 받아 주 예수를 알고 하나님이 그를 이방인에게 보낸 것을 알게 된 것은 이 영의 인도를 좇아 행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는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사람의 의견과 사상과 사람의 이론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또한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영적인 선진들」을 만나서 이 일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묻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영의 인도를 좇아 행했다.

 

그가 직감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했다면 그는 또 다른 증거를 구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볼 때에 영 안의 계시는 그를 인도해 주기에 충분하였다. 당시에 주 예수를 이방인 가운데 전파한 것은 창조적인 행동이었다. 만일 사람의 혼을 좇아 행한다면 많은 사람의 뜻을 모아 보고 몇몇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며 특별히 먼저 전도 경험이 있는 사람의 말을 들어볼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가장 영적인 사도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상관치 않고 오직 영을 좇아 행했다.

 

이로 보건대 우리가 마땅히 좇아 행해야 할 것은 소위 영적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우리 영 안에서 주님 자신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이다. 그러면 영적으로 성장한 자의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 나름대로의 용도가 있다. 그들의 깨우침과 가르침은 여전히 도움을 주는 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여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영 안에서 주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얻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얻은 감동이 참된 영 안의 계시인가를 확증할 담력이 없을 때에 주 안에 깊은 체험이 있는 분의 가르침은 큰 도움이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그렇게 계시한 것을 당시 바울의 체험과 같이 이미 확실히 알았다면 오늘날 사도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 단락의 문맥을 읽어 보았다면 여기서 사도가 주의하는 것은, 그가 전한 복음이 다른 사도들에게서 전수(傳授)된 것이 아니라 계시로부터 얻은 것임을 볼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요점이다. 우리가 전파한 복음은 누구에게서 들은 것이나 무슨 책을 읽거나 생각으로 무엇을 연구해서 얻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복음이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것이 아니라면 그 복음은 아무런 영적 가치가 없다.

 

오늘날 어린 신자들이 누구를 「스승 삼는 것」을 중요시 하고 영적으로 진보한 이들은 정확한 신앙을 후대에게 전달하는 것을 중요시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아무런 영적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우리가 믿고 전파하는 것이 계시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다 무(無)로 돌아간다.

 

믿는이가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부터 많은 놀라운 사상을 전달 받으면서 그 사람 자신은 영 안에서 빈곤하고 공허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새로운 복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종들의 전파를 멸시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선지자의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동시에 우리에게는 계시가 절대 불가결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계시가 없다면 과거 전파한 모든 것은 다 공허한 것이다.

 

우리가 얻은 진리가 영 안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일 때 비로소 우리의 전파는 영적인 효과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에게서 많은 것들을 도매로 사들였지만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된다. 모든 그리스도의 사역자에게 있어서 영 안의 계시는 마땅히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해야 한다. 이것이 사역자의 첫째 자격이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이 영적인 일을 할 수 있고 영을 좇아 행할 수 있다. 오늘날 자기 지혜와 사상을 의지해 사역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가장 정통적인 신앙을 가진 믿는이들 가운데서도 생각으로만 진리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죽은 것들이다. 우리가 전파한 것이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에게서 얻은 것인지를 자문해 보자.


사탄의 공격

 

우리의 영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성령이 성도와 교통하는 기관-사탄은 믿는이가 영의 기능을 알고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을 가장 시기한다. 사탄의 목적은 믿는이가 혼 안에 살면서 『영을 소멸하는 것이다.』 사탄은 믿는이의 몸에 여러 가지 이상한 느낌이 충만하게 하고 생각에 여러 가지 방탕한 사상이 충만하게도 한다. 그는 바로 이러한 느낌과 사상으로 믿는이의 영적 지각(知覺)을 혼란시킨다. 이렇게 하여 믿는이들로 혼란된 상태에서 무엇이 영에서 나온 것이고 무엇이 혼에서 나온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게 한다. 사탄은 믿는이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기 영 안의 지각(안타깝게도 많은 신자들은 아직도 이것을 모르고 있다!)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사탄은 전력을 다해 믿는이의 영을 공격한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러한 영적 전쟁에서 믿는이는 절대로 자기의 느낌과 돌발적인 사상을 좇아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기도한 일은 결코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지 말라. 많은 믿는이들은 그들이 기도할 때의 모든 사상을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기도가 그들의 행한 모든 일을 그릇되지 않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이 기도한 일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생각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기관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 안에서 우리를 가르치신다.

 

사탄은 감정과 사상을 사용하여 믿는이가 혼을 의지해 살고 영을 좇아 행하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이것보다 더 무서운 수단을 사용한다. 만일 그가 믿는이들이 사상이나 느낌으로 겉 사람 안에 살게 하는 일을 성공시키면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믿는이 안에 거짓된 영을 만든다. 이것은 먼저 믿는이 안에서 어떤 지위를 얻은 다음 많은 느낌을 조작해 내는 것이다. 만일 믿는이가 이러한 느낌들을 거절하지 않는다면 그 느낌들은 믿는이 안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하여 얼마 안 되어서 그것들은 영의 작용을 이기거나 영의 지각에 제재를 가하게 된다.

 

만일 믿는이가 사탄의 책략을 모른다면 그는 자신의 영의 작용을 중단시킬 것이다. 그리고 거짓된 느낌을 좇는 것을 영을 좇아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이 영의 지각이 멈출 때 사탄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믿는이를 속이게 된다. 사탄은 믿는이로 하여금 하나님이 이제 새롭게 된 생각으로 그를 인도한다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은밀하게 그의 영을 사용하지 않는 과실과 사탄의 역사를 덮어버린다.

 

영의 활동이 멈출 때에 사람은 성령과 동역할 수 없게 된다. 자동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부터 온 모든 것도 끊어지게 된다. 믿는이가 이렇게 거짓된 영의 지각과 돌발적인 사상을 좇은 결과로 그는 완전히 육체와 혼을 좇아 행하게 되고 참된 영적 생활도 상실하게 된다. 만일 믿는이가 살피지 않는다면 사탄은 그를 더욱 심하게 공격할 것이다. 이때 사탄은 믿는이의 감정이 하나님의 임재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게 하면서도 그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므로 감지할 필요가 없다고 일러준다. 혹은 믿는이가 끝없이 고통을 느끼게 하고 그것이 영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받는 것이라고 일러준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탄은 거짓된 영을 사용하여 믿는이를 속여 그로 실지로 자기 뜻을 따르게 한다. 이러한 체험은 영적인(그러나 살피지 않은) 믿는이에게 있는 체험이다.

 

영적인 믿는이는 그의 모든 행위와 처신을(영적인) 이성을 좇아 행하도록 영적인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그로 일시적인 감정의 작용으로 무엇을 하지 않고 또한 자극이나 생각 속에 어떤 돌발적인 사상으로 무엇을 하지 않게 한다. 믿는이는 마땅히 당황하지 말고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것은 영적인 시야의 검사를 거쳐야 하고 또한 영 안의 직감에서 나온 지식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을 취해야 한다. 결코 자극이나 감정이나 돌발적인 사상으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거나 멈추기 전에 먼저 잠잠하고 냉철하게 고려해 보고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영을 좇아 행하는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살피고 시험해 보는 것이다. 영적 생활에서 믿는이는 결코 엉뚱하게 나날을 보내지 않고 자기에게 임하는 사상이나 느낌(즐거운 것이든 근심스러운 것이든)등 모든 일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사탄에게서 온 것인지 아니면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자세히 생각하고 살펴 보아야 한다.

 

믿는 이가 임의로 행하는데 습관이 되므로 하루 동안 만난 일이 무엇이든 그 환경에 안연히 처하여 사탄이 그들을 위해 안배한 것을 받아 들일 때가 많다. 그들은 시험해 보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의 명령은 『범사에 헤아려(시험해)보라』(살전 5:21)고 한다. 영적인 믿는이의 능력과 특징은 바로 이 점에 있다. 그는 『영적인 말로 영적인 것들을 풀이한다』(고전 2:13 원문 참조). 여기서 「풀이하다」는 원문에서 「비교하다」, 「시험하다」, 「조합해 보다」, 「판단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영적인 믿는이들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성령은 영적인 믿는이에게 이러한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생활 가운데서 그는 자기에게 임한 모든 일을 시험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악령의 갖가지 속이는 생활 가운데서 하루하루를 보내기가 어려워진다.


사탄의 참소

 

믿는이가 전적으로 영의 직감의 인도를 좇아 행하는 가운데 사탄의 또 한 종류의 공격은 믿는이의 양심을 거짓된 것으로 만들어서 그를 참소하는 것이다. 믿는이는 자기 양심을 거리낌 없이 보존되게 하려고 양심의 책망을 받아 들이고 양심이 정죄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탄은 바로 이 점에서 믿는이의 갈망을 이용하여 믿는이를 참소하고 그로 그 참소를 자기 양심의 책망인 것으로 오해하게 한다. 이러므로 사탄은 자주 믿는이의 평강을 잃게 하고 힘들게 노력하게 하며 전진하기 위해 필요한 두렵고 떠는 마음을 상실하게 한다.

 

영적인 믿는이는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할 뿐 아니라 또한 자주 우리 속에서 우리를 참소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탄은 믿는이를 혼란케 하여 자신의 잘못을 알게 함으로써 그에 따른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참소한다. 사탄은 믿는이에게 두렵고 떠는 마음이 있어야 영적 노정에서 진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양심을 조작하여 만든 참소로 믿는이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착각하게 함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게 한다. 그러나 믿는이의 문제는 악의 영의 참소와 양심의 책망을 구분하지 못하는데 있다.

 

많은 때에 믿는이는 양심의 책망을 착각하여 악한 영의 참소로 생각하므로 결국은 하나님을 거스리게 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안의 이러한 소리를 상관하지 않는다면 더이상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참소는 더 격렬해진다. 그러므로 영적인 믿는이는 일부러 양심의 책망을 기꺼이 순종해야할 뿐 아니라 또한 악한 영의 참소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악한 영의 참소 중에 어떤 것은 믿는이에게 죄가 있으므로 참된 것인 것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실지로 믿는이에게 죄가 없는데 악한 영이 믿는이에게 죄가 있다고 느끼게 한 것이다. 만일 믿는이에게 정말 죄가 있다면 즉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백하여 보혈의 씻음을 구할 수 있다(요일 1:9). 만일 자백했는데도 참소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악한 영의 소리인 것이다.

 

만일 믿는이가 자기가 정말 틀렸다는 것을 앎으로 양심의 책망을 받거나 자신이 틀리지 않았고 그것이 단지 악한 영의 참소라는 것을 알기를 원한다면 그는 마땅히 자기에게 죄를 미워하는 진실한 마음이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양심인가, 악한 영인가를 묻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즉 만일 그것이 정말 틀렸다면 나는 그 죄를 제거하고 자백하기를 원하느냐를 물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원하고 죄를 미워한다면 설사 우리가 참소하는 소리를 따라 행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담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당신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때에 악한 영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을 가지고서 우리를 참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뜻을 정했다면 믿는이는 어떤 일이 자기 자신이 한 일인지를 상세하고 확실하게 살피고 판단해야 한다. 만일 믿는이 자신이 어떤 일의 장본인이라면 그는 그 일이 정말 틀렸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그는 마땅히 성경의 가르침과 직감의 인도를 따라 자신이 정말 틀렸다는 것을 알고난 후 하나님께 죄를 자백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죄를 범하지 않았는데도 당신이 정말 죄를 범한 것처럼 사탄은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

 

악한 영은 여러 가지 느낌을 사람에게 넣어 주기를 좋아한다. 그는 사람을 즐겁게도 하고 슬프게도 한다. 그는 사람이 선하다고 느끼게도 하고 아주 악한 존재라고도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믿는이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느낄 때에 실지로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때에 우리 자신이 옳다고 느끼지만 실지로는 틀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자신이 잘못했다고 느낄 때에도 그가 실지로는 틀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지 그가 자신이 틀렸다고 느끼는 것일 뿐 실지로는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이의 느낌이 어떻든 자신이 어떤가를 정확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자신이 죄를 범했는지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모든 참소에 대하여 믿는이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즉 그 참소의 근원을 안 후에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자신이 성령의 책망인지 악한 영의 참소인지를 모른다면 그는 조급하지 말고 잠잠히 확증을 기다려야 한다. 만일 책망이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고 또 그것을 제거하기 원한다면, 현재 그의 기다림은 그의 무지일 뿐 그의 반항이 아닌 것이다. 믿는이는 마땅히 외부의 강압적인 힘의 영향을 받고 사람에게 죄를 자백하는 것을 절대로 거절해야 한다. 이는 대적이 이러한 행동을 취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어쨌든 성령이 우리에게 준 참된 자책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반면에 사탄의 목적은 우리를 참소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참소는 믿는이로 하여금 자주 자신을 참소하게 할 뿐이다. 그가 이렇게 하는 데에는 믿는이를 괴롭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만일 영적인 믿는이가 처음에 사탄의 참소를 받아 들였다면 사탄이 장래에 거짓된 평강을 믿는이에게 주어 실패할 때에도 괴로워 하지 않게 한다. 이것은 가장 해로운 것이다.

 

양심의 책망이 있을 때에 죄를 자백하고 보혈의 씻음을 구하면 아무 문제가 없게 된다. 그러나 사탄의 참소는 믿는이가 사탄이 참소하는 것을 제거했는데에도 그 참소하는 소리가 여전히 멈추지 않는 그것이다. 양심의 책망은 우리를 보혈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반면에 악한 영의 참소는 거의 믿는이를 낙심케 하고 자신은 구제불능인 자로 생각하게 한다. 사탄의 목적은 참소로 말미암아 믿는이들이 『우리는 완전해질 수 없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에 떨어지도록 만드는데 있다.

 

어떤 사탄의 참소는 양심의 책망 위에 가해진다. 실지로 죄를 범했을 때에 양심만이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도 이로 말미암아 참소하게 된다. 이 때에 믿는이가 성령의 뜻을 따른다 할지라도 이 소리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것은 악한 영이 참소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도록 믿는이가 죄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것 외에 또한 성령의 책망과 악한 영의 참소를 구분하기를 배워야 한다. 또한 어느 때에 악한 영의 참소만 있고 어느 때에 양심의 책망 만이 아니라 악한 영의 참소도 있다는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상 어떤 죄든지(정말 죄라면) 일단 거절하거나 보혈의 씻음을 구하면 성령은 다시 책망하지 않는다.


또 다른 위험들

 

믿는이의 영을 좇아 행하는 생활 가운데 사탄의 위장술과 각종 공격 외에도 영적인 믿는이가 마땅히 알아야 할 다른 위험들이 있다. 많은 경우 우리 자신의 혼에서(악한 영의 위장술이 아님)나온 어떤 느낌 때문에 어떤 행동을 취할 때가 있다. 믿는이는 마땅히 자기의 몸과 혼과 영에도 어떤 느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모든 느낌이 다 영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혼이나 몸의 느낌을 영의 직감으로 착각하지 않는 것이다.

 

믿는이는 자신의 체험에서 매일매일 무엇이 자기의 참 직감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분별하기를 배워야 한다. 가장 범하기 쉬운 실수는 믿는이가 직감을 좇아야 할 중요성을 깨달은 후에 영 외에 다른 부분들도 느낌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림으로써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사실상 영적인 생활은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 생활은 매우 간단하다. 그러나 이것은 또 한 면에서 복잡한 부분도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여기에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다른 느낌들을 영의 직감으로 착각하는 것이고 둘째는 직감의 뜻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이 문제들은 매일 우리가 부딪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갑자기 펴서 보게된 성경 구절을 가리키지 않음)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받은 감동이 성령에게서 온 것임을 증명하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도 성령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선 그 일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지를 보아야 한다. 이는 성령이 과거 성경을 쓰도록 선지자에게 준 감동의 모양은 결코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이 주신 감동과 다를리가 없다. 성령이 과거 부당하다고 말한 것이 오늘날에 와서 그것을 타당한 것이라고 말할리가 없다. 우리 영 안의 직감은 성경의 가르침의 확증이 필요하다. 직감만 따르고 성경을 따르지 않은 것은 필경 틀린 것이다. 영 안에서 우리가 느끼는 성령의 계시는 성경 안에서의 성령의 계시와 완전히 일치되어야 한다.

 

우리의 육체는 어디에서든지 자신의 능력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을 때조차도 육체의 침입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 완전히 성령의 뜻을 계시해준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따르므로 성령의 뜻에 일치되는 것같이 보이나 실지로는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이는 많은 때에 믿는이가 자신의 천연적인 머리로 많은 성경의 교리를 수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것들을 이해하고는 행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러한 상황하에서 어떤 것에 대한 이해는 육체로 말미암을 수도 있다. 또한 육체의 힘으로 집행하는 위험도 있다. 비록 우리가 이해하고 행한 바가 완전히 성경적 일지라도 그 안의 모든 것이 육체의 범주에 속한 것일 뿐 조금도 성령을 의지하지 않은 것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 영 안에서 깨달은 성령의 뜻에 성경의 확증이 필요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이해한 성경일지라도 그것이 영으로 말미암아 집행되어져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따르는 일에서조차도 육체가 앞장서기를 원한다는 것을 인식해야한다. 영은 직감이 있을뿐 아니라 능력도 있다. 생각에서 우리가 깨달은 교리를 영의 힘으로 집행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아무런 영적 가치가 없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다른 일이 있다. 즉 우리가 지나치게 자신의 영으로 말미암아 살고 행하는 위험이다. 비록 성경에서 믿는이 개인의 영을 중요시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극단에 빠질 위험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믿는이의 영이 이렇게 중요한 지위가 있는 이유는 성령이 사람의 영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을 좇아 행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이 영이 성령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 사람의 영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뜻을 나타낸다. 우리가 받은 인도와 통제는 곧 성령의 인도하심과 통제하심이다. 성령이 사람의 영을 기관으로 삼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영을 기관으로 삼는 성령을 중요시 하고 또한 성령이 사용하는 기관인 사람의 영을 중요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의 영의 역사와 기능을 깨달은 후에 전심으로 자기의 영만을 의지하고 우리의 영이 성령의 종일뿐 직접적으로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영이 아닌 성령임을 망각하는 위험에 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을 떠난 사람의 영은 사람의 다른 기관과 같이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결단코 사람의 영과 성령의 위치를 바꾸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믿는이들이 사람의 영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너무나 모르기 때문에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뜻은 사람 안에서의 성령의 지위가 사람의 영보다 못하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람의 영을 이해하는 목적은 더욱 성령을 순종하고 높이는 방법을 알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도하심을 받는 것과 큰 관계가 있다. 이는 성령이 내려진 본래의 의도는 그리스도의 몸(전체)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개별적인 믿는이 안에 거하는 이유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몸 전체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요 또한 믿는이들이 그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는 단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전 12:12). 성령이 개인을 인도하는 이유는 그분이 온 몸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개인의 길을 인도하는 목적은 몸 전체를 위한 것이다. 한 지체의 활동은 온 몸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 개인의 영이 받은 성령의 인도는 다른 지체들과 연관이 있다. 영적인 인도는 다 「몸」의 인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개인의 영에 어떤 인도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두세」 지체의 영의 확인과 확증이 필요하다. 「몸」 안에서의 이러한 행동은 영적인 일에서 가장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될 사항이다. (선한 뜻으로) 개인의 영을 좇아 단독적으로 행동한 것으로 인해 발생한 실패와 분쟁과 미움과 분열과 수치와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므로 영을 좇아 행하는 모든 믿는이가 받은 인도가 성령에 의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다름이 아닌 그가 영적인 몸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에 있다. 우리의 일과 행위와 신앙과 가르침에 있어서 우리는 지체와의 관계에 통제를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바로 이러한 오류에 빠졌다. 하나님은 가장 뛰어난 사도의 실수를 허락하여 후세에 있는 우리를 가르치셨다. 물론 바울의 오류에서 하나님은 특별히 은혜를 주사 그 일을 잘 통과하게 하였다. 또 그가 잘못을 범했기에 그가 로마에서 증거할 수 있었고 많은 서신을 쓸 시간이 있었다.

 

바울은 자기가 『영에 매임을 받아』(행 20:22)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생각했으나 성경은, 성령이 두로의 제자들을 감동케 하사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다(행 21:4). 우리가 알듯이, 비록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로 사도의 이번 실패를 덮으셨지만 더욱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사람을 인도하는 원칙이 개인적인 것이 아닌 전체적인 것임을 보아야 한다. 영적인 믿는이는 마땅히 어느 때가 사람의 말을 상관하지 말고 단독적으로 전진해야 할 때이고, 또 어느 때가 그의 형제의 말을 들어야 할 때인지를 알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영적인 길 주위에는 함정이 많다.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하고 만다. 우리에게 첩경이 없다. 우리가 배운 지식들이 결코 우리의 영원한 보장이 될 수 없다. 도리어 모든 체험을 스스로 거쳐야 한다. 과정을 거친 사람들은 우리가 그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우리 장래의 당할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깨우쳐 줄 뿐이다. 우리가 어떤 노정을 뛰어넘을 방법을 구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 일이다. 성실히 주를 따르는 사람은 불필요한 실패를 면하게 된다.


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 제22장 영적 노정의 위험,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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