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말씀을 누려요. ^^

  • 목록
  • 아래로
  • 위로
  • 0
  • 청지기
  • 조회 수 1845

영광과 아름다움을 위하여

 

의복을 입는 데에는 세 가지 주요 이유가 있다. 다른 말로, 우리가 입는 의복은 세 가지 목적을 가진다. 타락 이전에 사람은 아무런 옷도 입지 않았다. 그러나 타락 이후,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벗었음을 인식하고 그들의 드러남을 가리기 위해 무엇인가를 만들었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을 덮기 위해 가죽옷을 제공하셨다.

 

그러므로 의복을 입는 첫째 이유는 우리의 적신을 가리는 것이다. 도덕적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합당하게 가리기 원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벗은 몸을 드러내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반대로 부도덕성은 드러내는 것을 조장한다. 벗는 것은 죄요 수치이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머리부터 발가락까지 다 가리워졌다. 그러므로 의복의 첫째 목적은 우리의 벌거벗음을 가리는 것이다.

 

옷을 입는 둘째 이유는 우리의 건강과 관계된다. 합당한 의복을 입음으로써 우리는 추위와 바람과 비로부터 보호받는다. 우리는 또한 지나친 열로부터 보호받는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기후에 대해 매우 민감하여 지나치게 덥거나 지나치게 찬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적절한 옷을 입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모든 상황에서 알맞은 옷을 입지 않는다면 우리의 건강이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옷은 또한 우리의 건강을 지키는 목적을 가진다.

 

셋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미화시키기 위해 의복을 입는다. 출애굽기 28장에 의하면 제사장의 의복은 영광과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의복들의 목적은 주로 벌거벗음을 가리거나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광과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었다. 특히, 에봇은 대제사장의 벌거벗음을 가리거나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전적으로 영광과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었다.

 

출애굽기 28장이 첫째로 영광을, 둘째로 아름다움을 언급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우리가 먼저 영광을 고려하고 그 다음에 아름다움을 고려해야 함을 가리킨다. 우리의 의복들을 고를 때 우리는 먼저 아름다움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영광이어야 한다.

 

우리는 여기의 영광이 신성한 표현 즉 신성한 속성들을 가리키며, 아름다움이 인간적인 미덕들을 가리킴을 지적하였다. 옷을 입을 때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관심해야 한다. 예를 들면, 자매는 어떤 의복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입을 수 있는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자매들이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의 의복을 고려한다면 그들이 입는 의복 양식은 다소 다를 것이다. 그러나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아름다움을 관심할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전혀 관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봇은 먼저 신성한 영광을 위하고, 그 다음에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위하였다. 붙들어 내는 데 사용된 이러한 옷의 부속은 신성한 영광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으로 조성되었다.


그리스도에게 붙들어 매임

 

오직 대제사장만이 에봇을 입을 권리가 있었다. 이것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에봇이 상징하는 것을 입을 권리가 없음을 예표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에봇을 입으신다. 이것은 오직 그분만이 붙들어 매는 능력과 죄는 힘을 가지고 계심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붙잡으시고 묶으시며 우리를 그분 자신에게 붙들어 매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분 자신에게 연결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붙잡는 능력은 그분의 신성한 영광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에봇이 붙들어 매는 데 사용된 한 벌의 옷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세 개의 판(plate) - 두 개의 견대와 흉패 - 이 에봇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판들이 에봇에 고정되어 있었으므로 그것들은 또한 대제사장에게 고정되고 묶이고 죄어져 있었다.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으므로 그것들은 그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없었다. 이것이 에봇의 의미이다.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고정하는 능력과 매는 힘과 묶는 역량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능력과 힘이나 역량이 없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우리를 붙잡으시고 품으시며 지키시는 방법에 관해 말한다. 어렸을 때 나는, 목자가 그의 두 팔에 어린 양을 품듯이 주 예수님이 우리를 붙드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우리를 품으시고 안으시는 주님을 마음에 그렸다. 그러나 우리가 에봇의 묘사를 깊이 살펴본다면, 주님이 단지 우리를 붙드시는 것만이 아님을 볼 것이다. 판들이 에봇에 연결되듯이 그분은 우리를 묶으시고 그분 자신에게 우리를 고정시키신다.

 

붙드는 것은 고정시키는 것만큼 의미심장하지 않으며 품는 것은 죄거나 묶는 것만큼 의미심장하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고정된다. 우리는 그분에게 묶인다. 그렇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짊어지시며 우리를 안으신다. 그러나 그분은 어린 양을 안는 목자처럼 우리를 그분의 팔에 안으시지 않는다. 대신, 그분은 견대들과 흉패가 안전하게 고정되었던 에봇을 입고 있는 대제사장처럼 우리를 안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그분 자신에게 고정시키셨다. 이 고정은 그분의 신성한 영광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으로 말미암는다. 이것은 그분의 신성한 영광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이 우리를 그분 자신에게 고정시키는 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출애굽기 28장 9절과 10절은, 『호마노 두 개를 취하여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그들의 연치대로 여섯 이름을 한 보석에, 나머지 여섯 이름은 다른 보석에』라고 말한다. 이들 호마노에는 믿는이들인 우리를 상징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을 상징한다. 12절은, 『그 두 보석을 에봇 두 견대에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을 삼되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어서 기념이 되게 할지며』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양 어깨 위에 있음을 상징한다. 우리는 어린 양들처럼 그분의 두 팔에 붙잡힌 바 되지 않는다. 우리는 호마노 조각들처럼 그분의 양 어깨 위에 있다. 우리는 신성한 영광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으로 조성된 고정시키는 부품인 에봇 위의 보석들이다.

 

구원받은 이래로 당신은 그리스도께 붙잡힌 바 되었다. 그러나 당신은 이 시간까지 내내 무엇이 당신을 붙들어오고 있는지 아는가?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능력이 있으며 우리가 그분의 능력에 붙잡힌 바 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요한복음 10장 28절이 이것을 암시한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를 붙드심을 암시한다. 요한복음 10장 29절에서 주 예수님은 계속해서,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믿는이들을 붙드는 두 손 -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손과 아버지의 손이 있다.

 

이러한 손들은 능력을 상징하고 사랑을 상징하지만 신성한 영광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의미하지 않는다. 에봇에 고정된 판들에 관한 묘사에 의하면 우리는 그분의 신성한 영광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으로 인해 그리스도께 매인 바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성한 영광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이 우리를 그분 자신에게 묶는 고정시키는 힘이다. 우리는 그분의 신성한 영광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그분께 붙잡힌 바 된다.


주님께 붙잡힌 바 되는 체험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체험 가운데 우리가 주님께 붙잡힌 바 되는가를 자문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붙잡힌 바 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주 예수여, 제게는 아무런 믿음이 없습니다. 제가 당신의 손 안에 있다는 것과 당신이 나를 붙잡고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제게 믿음을 주소서.』라고 기도할지 모른다. 나는 종종 이렇게 기도했었다. 나는 이런 종류의 기도와 믿음에 관하여 체험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할수록 나는 주님을 덜 신뢰하는 것 같았다. 믿음을 구할수록 나는 믿음을 더 작게 가졌다.

 

많은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유사한 체험을 가졌다. 아마 당신은, 『주여, 당신은 나의 보호자이십니다. 당신은 지키시는 은혜를 갖고 계시고 당신에게는 나를 붙드시는 능력이 있으시며 당신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주님, 나를 품으시고 나를 지키소서. 그러나 주님, 당신은 제가 괴로움이 올 때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 같음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저는 제게 당신의 믿음을 주입하시기를 당신께 구합니다. 오 주님, 당신 자신을 제게 저의 살아 있는 믿음으로 주입하소서.』라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렇게 기도할수록 믿음은 더 작게 당신 안으로 주입되는 것 같다.

 

사십 년 전 나는 결핵을 심하게 앓게 되었었다. 그 기간에 나에게는 주님이 나를 치료하시리라는 믿음이 전혀 없었다. 물론, 나는 주님 안에서 나의 기본적인 믿음, 구원에 대한 믿음을 잃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주님이 결핵에서 나를 치료하시리라는 믿음을 상실하였다. 장로들과 동역자들과 모든 성도들과 함께 교회는 나를 위해 기도하였다.

 

나는 성도들에게 주님이 신실하심을 말하며 그분을 믿으라고 권하는 많은 메시지들을 전하였었다. 나는 그분은 결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므로 그분을 의지하라고 그들에게 권하였다. 그리고나서 나는 아프게 되었고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어려움을 발견하였다.

 

하루에 세 번 내게 음식을 날라다 주는 어떤 자매가 믿음에 대해 나와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내게, 왜 내가 주님께서 나를 치료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지 않는가를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자매여,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내게는 작은 믿음이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도와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내게 말해줄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내가 그녀에게 그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다소 이상한 것 같았다. 그녀는 나의 복음 전파를 통해 구원받았고 이제 나는 그녀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놀랐고 내게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 모든 복음 전파자의 상황이 이와 같다.

 

여기서 나의 초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성한 영광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깨달을 때 자동적으로 그분께 붙들어 매인 바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믿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다. 고정시키는 능력은 우리의 믿음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분의 어떠함과 그분이 소유한 것으로부터 온다. 주님은 신성한 영광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지니신다. 그분은 영광스러우시며 아름다우시다. 우리가 그분을 깊이 생각하고 응시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체험에서 실제적인 방법으로 그분에게 고정된다. 우리는 이미 그분께 죄어져 있으므로 그분을 믿으려고 시도하거나 그분을 신뢰하려고 시도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나는 사복음서를 읽고 연구하기를 즐긴다. 복음서들을 읽을 때 때로는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고 때로는 그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주님께서 사람으로서 땅 위에서 육신 가운데 계신 동안에도 그분의 영광이 보였다. 성육신 안에서도 그분은 영광스러우셨다. 복음서들을 읽을 때 우리는 신성한 영광이 그분과 함께하셨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주님의 인간적인 아름다움, 섬세하고 매우 귀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사복음서에 계시된 주 예수님의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묘사하기에 충분한 말이 없다.

 

그러나 복음서들을 읽을 때 우리 존재 안의 어떤 것이 주님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깨닫는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1장에서 그분이 그분의 제자들을 다루신 방법과 마리아, 마르다와 대화하신 방법은 아름다웠다. 우리가 복음서들 안에서 주님의 신성한 영광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깊이 상고할 때 우리는 저절로 그분에게 고정된다. 그때 우리는 그분께 붙잡힌 바 되고 나아가 그분의 양 어깨 위에 매인 바 된다. 그분의 신성한 영광과 그분의 인간적인 아름다움은 우리를 그분 자신에게 맨다.

 

나는 우리 중 많은 사람이 복음서들을 읽을 때 이런 종류의 체험을 가졌으리라 믿는다. 땅 위에서의 주님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그분의 신성한 영광과 그분의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보고 그분에게 고정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안전하고 확고하다는 느낌을 가진다. 우리는 우리가 결코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것이 에봇의 체험이다.

 

당신은 그러한 에봇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내게 그것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만일 당신이 나를 연구한다면 당신은 고정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는 신성한 영광도 부족하고 인간적인 아름다움도 부족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르다. 그분은 에봇을 가지고 계시며, 그분에게는 신성한 영광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위트니스 리
[출애굽기 라이프 스타디Ⅲ, "제사장의 의복", 한국복음서원]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kakao talk
퍼머링크

댓글 0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찬양노트의 말씀방입니다. image 청지기 12.02.20.18:01 4814
178 희년 청지기 12.03.08.11:37 1144
177 회중, 권속, 몸, 새 사람 1 청지기 12.03.21.19:09 1302
176 회복의 밝은 빛들―죠지 뮬러 편 청지기 12.03.05.15:00 1144
175 회막과 모든 제물들 청지기 12.05.02.13:37 3154
174 혼적인 신자의 경험 청지기 12.04.18.18:38 1087
173 혼의 처리 청지기 12.04.20.14:06 1159
172 혼의 잠재력 2 청지기 12.05.03.10:53 4019
171 혼과 영의 구분 청지기 12.03.08.10:13 1659
170 합일과 분열의 근거 청지기 12.03.08.08:57 909
169 합일 청지기 12.05.03.11:48 4481
168 한 여인이 한 사내아이를 낳다 청지기 12.02.20.18:50 1246
167 한 성경―한 계시 청지기 12.03.08.12:59 991
166 하늘에 속한 이상―몸에 대한 이상 청지기 12.03.06.12:23 1151
165 하늘에 속한 이상―그리스도에 대한 이상 청지기 12.03.06.12:16 1421
164 하나님이 산에서 지시하신 식양대로 청지기 12.03.21.19:16 1283
163 하나님이 믿는이들을 다루시는 길―천국에 들어가는 조건 청지기 12.03.23.17:14 1023
162 하나님이 믿는이들을 다루시는 길―징계와 상급 청지기 12.03.22.19:03 1333
161 하나님이 믿는이들을 다루시는 길―왕국에서의 징계(Ⅱ) 청지기 12.03.23.17:30 1016
160 하나님이 믿는이들을 다루시는 길―왕국에서의 징계(Ⅰ) 청지기 12.03.23.17:24 1195
159 하나님이 계심에 대한 체험과 토론 청지기 12.03.07.16:06 961
158 하나님의 이기는 자들! 청지기 12.02.20.17:23 1654
157 하나님의 요구들과 하나님의 양식 청지기 12.05.02.13:49 2618
156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은혜를 앎―씨와 땅 청지기 12.03.26.09:51 1177
155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목적을 이루는 집회 청지기 12.04.24.11:01 2276
154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음 청지기 12.03.05.14:53 968
153 하나님의 긍휼 청지기 12.03.03.13:46 1151
152 하나님의 구속의 방법 청지기 12.03.22.18:47 943
151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어린양의 일곱 눈 청지기 12.03.08.09:04 846
150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 삶―영광스런 중재(仲裁) 청지기 12.03.26.10:01 875
149 판결의 흉패 청지기 12.03.27.13:35 871
148 특별하고 최종 완성적인 예수의 증거 청지기 12.03.26.10:07 874
147 축하의 밤 & 당부 청지기 12.03.01.19:47 839
146 척량과 흐름 청지기 12.03.03.14:34 1158
145 처음 익은 열매 청지기 12.03.27.13:23 905
144 진리의 기둥과 터 청지기 12.03.08.12:43 1158
143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청지기 12.03.08.10:00 1616
142 증가를 위해 체계를 바꿈 Jacob 18.06.07.13:59 1496
141 주님의 재림 청지기 12.03.27.13:31 992
140 주님의 이름을 부름 청지기 12.04.18.18:57 1542
139 주님의 상 집회에는 하나님 앞에 어떤 순서도 없음 3 Jacob 17.06.22.16:37 2721
138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진리의 절대성 청지기 12.03.05.15:43 902
137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주관적이지 않아야 함 청지기 12.03.05.15:38 890
136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함 청지기 12.03.02.17:19 1133
135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어야 함 청지기 12.03.02.17:25 1193
134 주 예수에 대한 두 종류의 인식 청지기 12.03.08.10:22 960
133 죄와 사망의 법 청지기 12.03.21.19:00 1957
제사장의 의복―흉패와 에봇 청지기 12.04.18.18:40 1845
131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성장하는 길-여김 청지기 12.04.23.18:26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