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말씀을 누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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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가 오늘날 개신교의 기독교 상황을 점검해 본다면 우리는 개신교의 기독교에 일곱 영이 결여되어 있음을 볼 것이다. 그들의 죽어 있음은 일곱 영의 부족에 기인한다. 그들의 조직 때문에 그들에게는 또한 빛나는 별들이 필요하다. 이것이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강화된 영과 빛나는 별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일곱 영을 주목하지 않는다. 일곱 영은 그 영이신 그리스도가 완전하게 강화된 실제화이다. 이것은 이른바 오순절 운동이나 초자연적 은사주의 운동의 문제가 아니라 칠 배로 강화된 영의 내주하심에 관한 문제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죽어 있는 개신교에게 필요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지위나 조직이 아닌 빛나는 별들을 필요로 한다. 그들을 인도하는 자들은 반드시 빛나는 자들이어야 한다...


사망은 하나님 앞에서 죄보다 더 더럽히는 것이다(레 11:24-25, 민 6:6, 7, 9). 이 구절에서 더러움은 사망의 속성에 속한 것이다. 사데의 더러움은 죄의 더러움이 아니라 사망의 더러움이었다. 사망은 죄보다 더욱 더러운 것이다. 구약에 의하면 만일 누가 죄를 지으면 그는 단순히 속죄제물을 드림으로써 사함을 받을 수 있었다(레 4:27-31). 그러나 누가 사람의 시체를 만지면 칠 일을 기다려야만 정결함을 받을 수 있었다(민 19:11, 16). 이것은 사망의 더러움이 죄의 더러움보다 더 심각한 것임을 가리킨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망에 대한 의식이 없다. 만일 당신이 라스베가스에 가서 카지노에서 도박을 한다면 당신은 범죄했음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죽은 방식으로 집회에 온다면 당신은 그것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이 사망의 상황은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에서 도박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


지방 교회들 안에서 우리 모두는 반드시 사망을 미워해야 한다. 나는 교회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잘못되어 있는 것을 보는 게 낫다. 나는 형제 자매들에게 왜 집회 가운데서 기능을 발휘하지 않느냐고 여러 번 물어보았다. 흔히 그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실수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이에 대해서 나는 『당신이 실수를 많이 할수록 더 좋습니다. 살아 있는 아이들은 많은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무덤 속에 있는 죽은 아이들은 전혀 실수하지 않습니다.』라고 응답했다. 만일 당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집회 가운데 앉아 있다면 당신은 결단코 잘못될 수 없다. 그러나 비록 당신이 옳다 해도 그것은 죽은 옳음일 따름이다. 나는 차라리 올바르게 죽어 있는 것보다 틀리더라도 살아 있고 싶다. 나는 실수할지 모르지만, 내가 얼마나 생생한지 누구나 알 것이다. 당신은 어떤 것을 더 좋아하는가? 죽어 있는 옳음인가 아니면 살아 있는 틀림인가?


위트니스 리
[요한계시록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14―사데 교회-흰 옷과 주님이 시인한 이름,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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